꼬맹이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경정은 그제야 원생에서 무림맹에서 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 무림맹 지하 감옥에 황목(黃目)을 지닌 소년이 죄수로 들어온 적이 있었어. 무슨 꼬마 아이를 무림맹 지하 감옥에 가두냐며 말이 많았지. 사실은 그자가 겉모습만 꼬마고 속은 쉰이 넘는 노마두(老魔頭)였다고 했던가?’
경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누각선이 맞구나. 흑시 놈들이 또 도망치고 있어.’
경정은 고개를 돌려 와룡산을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무림맹을 불러올까?’
경정이 어찌할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첨벙’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린 소년들이 짐을 나르던 인부들을 강에 빠트리고 있었다.
인부의 심장을 비수로 찌른 뒤에 돌을 달아 강에 내던지니 그들은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회강에 빠져 떠오르지 않았다.
‘저런 악독한 놈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마귀로다.’
경정은 소년들의 잔혹함에 몸서리를 쳤다.
인부들을 모조리 회강에 빠트리자, 황색 눈을 가진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나머지 짐을 누각선에 실어라. 일다경(一茶頃, 약 15분에서 20분 사이) 후에 이곳을 떠난다.”
소년들이 일사불란하게 남은 짐을 누각선 위에 싣기 시작했다.
‘지금 와룡산에 도움을 청하러 가긴 늦었다. 다른 수를 생각해 내야 한다.’
경정은 여인의 겉옷을 벗고 무복을 드러냈다.
머리를 위로 묶고 면사까지 쓰니 영락없는 무명검(無名劍)이었다.
경정은 소년들이 짐을 나르는 동안 어둠을 틈타 누각선 위로 몸을 날렸다.
***
흑시는 와룡산의 안의 계곡 안 동굴 속에 숨겨져 있었다.
“벽맹주. 뭔가 이상하네. 아무리 무림맹이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쉽게 흑시의 입구까지 들어오다니 이상한 일이네.”
제갈원의 말에 벽서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당철한과 남궁후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흑의인들을 물리치고 다가왔다.
“침입자가 나타났는데도 누구도 안에 사실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네.”
“마치 시간을 벌려는 듯 죽기 살기로 우리의 검을 막아 내더군. 혹시 함정은 아닐까?”
“흑의인들을 죽이지는 않았겠지?”
제갈원의 물음에 당철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려서 흑시에 관해 물으려고 했는데 입 안에 독약을 숨기고 있었네. 더는 버텨내지 못할 것 같자 바로 약을 먹고 절명했어.”
“모두 죽었다는 것인가?”
“그래. 살아남은 자가 없다.”
당철한의 말에 풍죽오우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때 무림맹원들이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을 열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안에서 잠긴 듯 철문은 열릴 줄 몰랐다.
멀리서 지켜보던 풍운검이 다가와 철문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냥 문이 아닐세. 기관(機關)으로 작동시키는 문이야.”
제갈원도 고정엽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풍운검의 말이 맞네. 무력으로는 뚫을 수 없어. 기관을 파훼하는 수밖에 없어.”
당철한과 남궁후는 머리를 싸매며 말했다.
“하. 아무래도 우리가 당한 것 같은데?”
“놈들은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네.”
기관에 조예가 깊은 제갈원은 재빨리 철문과 그 주위를 확인하며 기관이 어찌 동작하는지를 가늠했다.
그때 고정엽이 다가와 땅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제갈원은 고정엽이 그리는 것을 보고 놀라 가까이 다가갔다.
“이것이 무엇인가?”
“황궁 감옥의 기관이 이런 식으로 동작하네. 어떠한가? 이 철문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게.”
“이것은 일급 기밀이니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하네.”
“걱정하지 말게.”
제갈원은 몸을 틀어 고정엽이 바닥에 쓴 것을 남들이 볼 수 없게 했다.
“...결국 문을 조이는 걸쇠는 천장에 달린 셈이지. 이런 식으로 동작하는 걸세. 자네가 보기엔 어떠한가?”
황궁 감옥의 기관이 어찌 동작하는지 들은 제갈원은 눈을 번뜩였다.
그는 고정엽이 바닥에 그린 그림을 손으로 쓸어 없애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갈원. 뭔가 알아낸 것인가?”
“시도해볼 만한 일이 생겼네. 자네의 독문 무공인 창룡검(蒼龍劍)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당연하지.”
벽서온은 곧바로 그의 애검인 소록(小鹿)을 꺼내 들었다.
제갈원은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문의 꼭대기를 창룡검의 검기로 베어주게.”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져 있어 쉽지 않을걸세.”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다만 힘을 아끼지는 말아야 할 것이네.”
벽서온이 철문으로 다가가더니 이내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풍죽오우는 내공이 약한 무림맹원들을 뒤로 보내 직접 방패가 되기를 자청했다.
“너도 뒤로 가서 숨어라. 풍운검.”
당철한의 말에 고정엽이 발끈했다.
“내가 왜? 나도 앞에 가서 막을 것이다.”
“시끄럽다. 계속 그렇게 나대면 당장 그 가면부터 벗길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하고 뒤로 물러나라.”
고정엽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쉬며 뒤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지금 그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엄세록이 황제가 무림맹과 함께 와룡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알면 당장 그를 잡으러 올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바닥의 흙과 돌조각이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기운이 벽서온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인 그때, 벽서온의 검기가 천장을 갈랐다.
‘우르르. 쾅!’
동굴이 좌우로 흔들리며 검기의 파장이 허공을 갈랐다.
풍죽오우는 검을 휘둘러 검막(劍膜)을 만들어 앞에 흩뿌렸다.
벽서온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검기가 검막을 뚫고 나왔고 풍죽오우는 그나마 약해진 검기를 몸으로 막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고 점점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했다.
제갈원은 하늘을 날아 천장 위로 올라갔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철문을 그대로였으나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 기관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정엽이 예상한 대로 철문의 걸쇠를 작동시키는 기관이 천장에 박혀 있었다.
제갈원은 그의 백우선(白羽扇)에 내공을 실어 쏘아 보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걸쇠가 풀리고 육중한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린다. 와!”
무림맹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열리는 철문을 구경했다.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문이 열리자 제갈원은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풍죽오우도 따라 들어갔다.
철문을 지나자 넓은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공간임이 틀림없었다.
공동 안은 폭풍이 휘몰아친 듯 엉망진창이었다.
놈들이 이번에도 야반도주했음을 알게 된 무림맹원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벽서온! 이곳에 사람들이 있다.”
남궁후의 외침에 풍죽오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공동 한쪽에 만들어진 감옥에 무림맹원들로 보이는 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고문을 받았는지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당철한은 만년화단을 꺼내 무림맹원들의 입안에 하나씩 넣어줬다.
단약의 기운이 몸에 퍼지자 다 죽어가던 이들의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적성.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벽서온의 물음에 적성이라는 맹원이 입술을 뗐다.
“맹주님. 송구합니다. 놈들의 덫에 걸려 작전이 실패했습니다.”
“야제와 다른 일당들은 어디로 갔지?”
“낮부터 흑시를 정리하더니 밤이 되기 전에 떠나더이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가?”
“그들끼리는 서로 암어로 대화를 해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갈원이 밀치고 들어와 적성이라는 맹원에게 물었다.
“섭이는 어디에 있는가? 왜 섭이는 보이지 않지?”
섭이에 관해 묻자 적성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제갈원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말해주게. 섭이는 어디에 있는가?”
“악동이라 불리는 야제의 동복이 섭이와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도 흑시의 수하로 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야제가 총명한 섭이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뭐라?”
제갈원이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빛이 사납게 변해 있었다.
그때 공동을 살피던 청풍 단주 운평이 다가와 벽서온에게 고했다.
“놈들이 빠져나간 출구를 발견했습니다.”
“부단주는 다친 맹원들을 살피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예. 맹주님.”
제갈원은 운평의 말을 듣자마자 출구로 순식간에 몸을 날려 사라졌다.
이내 벽서온이 맹원들과 함께 출구로 달려 나갔고 풍죽오우도 걸음을 옮겼다.
“풍운검. 이만하면 됐으니 그대는 따라오지 말게.”
“남궁후. 내가 없었으면 아직도 철문을 부수지 못해 밖에서 쩔쩔매고 있었을걸세. 나도 도울 테니 말리지 말아.”
고정엽은 친우들이 자신을 말릴까 걱정하며 제일 먼저 출구로 달려 나갔다.
당철한과 남궁후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구. 저 화상.”
***
누각선에 몰래 들어온 경정은 흑의인의 눈을 피해 갑판 아래 선실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선실은 총 삼층으로 되어 있었고 제일 먼저 도착한 삼층을 살피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정은 몸을 숨기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다가온 흑의인들이 이상한 말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짐은 다 날랐겠지?]
[짐이 별로 없다. 청야산에서 도망 나올 때 무거운 짐은 죄다 버리고 왔거든.]
[청야산을 생각하니 또 화가 나는구나. 그때 물건을 죄다 버리고 오느라 주인님의 심기가 불편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물건부터 먼저 옮기지 않았는가? 이 층 선실에 잘 가둬 놓았으니 염려 말게. 그나저나 그것은 챙겼나?]
[뭘 말하는 건가?]
[그거 말이야. 주인님이 애지중지하시는 죽장함(竹張函, 대나무로 만들어진 수납함) 말이네.]
[걱정하지 말게 저기 주인님이 묵으시는 선실에 잘 가져다 두었네. 그런데 대체 무엇이길래 주인께서 그리 아끼시는 것일까?]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그저 명을 따를 뿐이지.]
[대나무로 만든 작은 함인데 안에 별게 들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아. 지난번에 주인님을 암살하러 온 살수가 그것을 가져가려다가 함에서 튀어나온 암기에 죽지 않았는가? 겉에 있는 대나무는 안에 든 기관을 숨기려고 만든 가짜네.]
[그렇구먼. 무서운 것이었군. 나는 그 함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 않아야겠어.]
[그나저나 백사(白蛇)와 악동(惡童)께서 서로 사이가 나쁘니 큰일이다. 누각선이 좁으니 한번은 싸움이 날 듯싶은데 말이야.]
[주인님도 백사와 악동 영감이 싸우는 것을 보기를 즐기시니 어쩔 수 없지. 다만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니까 조심할 수밖에.]
[두 분이 또 싸우신다면 당장 자리를 피해야 할걸세. 옆에 있다가 괜히 검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수가 있다고. 크큭.]
흑의인은 한참을 떠들더니 이내 갑판 위로 올라갔다.
경정은 이 층에 갇혀 있다는 물건이 사람임을 깨달았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다니. 나쁜 놈들이네.’
경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흑의인들이 말한 이 층 선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찌 저들의 말을 알고 있는 거지? 저들은 방금 암어로 말하지 않았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경정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렇구나. 이것은 무림맹에서 배웠던 암어다.’
경정이 무림맹원이었을 때 흑도의 무리가 사용하던 암어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방금 흑의인들이 말한 암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그때는 내가 흑도도 아닌데 이런 걸 왜 배우나 싶었는데. 봐봐. 배우면 다 쓸데가 있잖아.’
그때 갑자기 ‘덜컹’하며 배가 좌우로 크게 움직였다.
‘큰일이다. 누각선이 움직인다.’
경정은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선실 안을 눈으로 살폈다.
흑의인 세 명이 어떤 방 앞에 서서 지키고 있었다.
‘저기에 사람들이 갇혀 있구나.’
경정은 흑의인을 제압하고 놈들에게 검을 빼앗을 생각에 몸을 숙였다.
움직일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안에서 소년 두 명이 튀어나왔다.
소년들은 자세를 낮추고 옷으로 만든 줄을 팽팽히 잡아당겨 흑의인의 발목을 지나갔다.
노닥거리고 있던 흑의인들은 갑작스러운 아이들의 공격에 당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아이와 여인들이 몰려나와 흑의인들을 밟기 시작했다.
그들이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되기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흑의인의 입을 막는 일이었다.
손에 든 만두를 흑의인에 입에 밀어 넣고 쑤셔 넣는 모습이 참으로 과감했다.
경정은 아이와 여인들을 진두지휘하여 흑의인을 해치우는 이를 보며 감탄했다.
앞장서서 흑의인을 해치우던 소년은 다름 아닌 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