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을 뒤쫓다.
조용한 녹가 장원이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경정이 묵는 처소 바깥에는 풍죽오우와 엄세록 그리고 녹빙이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처소에서 당철한과 녹경이 함께 나왔다.
“당소가주님. 마마님은 괜찮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엄도통. 음식을 잘못 드시고 탈이 나신 것뿐이오.”
녹경은 걱정하는 녹빙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라버니. 아무래도 며칠간은 요양이 필요할 듯합니다. 언니가 물만 먹어도 그것을 다 뱉어내고 있어요.”
“알겠다. 짐은 다 싸놓았으니 마마님이 쾌차하시면 그때 떠나자꾸나.”
“예. 오라버니. 언니가 지금 약을 먹고 자고 있으니 우리는 자리를 피해줍시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녹씨 남매가 먼저 떠나고 풍죽오우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제갈원이 엄세록의 앞에 나서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엄도통. 오늘 밤에 벽맹주가 오면 우리는 무림맹을 도와 흑시를 토벌을 할 것이오. 와룡산이 이곳과 지척이니 걱정이 되는구려. 녹가 장원은 엄도통에게 맡기겠소. 부디 마마님을 살펴주시오.”
엄세록도 포권을 하며 답했다.
“그것은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제가 물샐틈없이 지키겠습니다.”
“고맙소.”
풍죽오우는 엄세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함께 떠났다.
경정의 처소 앞에 홀로 남은 엄세록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마마님이 아프시다고 전서를 보내면 폐하께서 걱정하실 텐데.’
고민하던 엄세록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난 죽어도 거짓말은 못 하겠다. 그냥 오늘은 전서를 보내지 말자.’
황궁에 전서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엄세록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경정의 처소를 바라봤다.
‘아프지 마십시오. 마마님.’
***
소이자가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 되었느냐? 소이자. 모두 돌아갔느냐?”
“엄도통만 남고 모두 가셨습니다.”
“그렇구나. 잘했다. 너는 내 방 앞을 꼭 지키고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마마님.”
경정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소이자를 보며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런데 소이자. 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이냐? 일부러 꾀병까지 냈는데?”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래?”
“마마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옳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옳은 일을 하시려고 그런 것이겠지요. 그러니 묻지 않겠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답하는 소이자를 보며 경정은 기분이 좋았다.
그때 침전의 문이 열리고 당소소와 열음 그리고 소천도 조심스레 다가왔다.
당소소의 손에는 지난번 영화산에 갔을 때 경정에게 줬던 것과 똑같은 봇짐이 들려 있었다.
“재인 마마. 그것은 설마······?”
“맞습니다. 마마님.”
경정은 봇짐을 받아 들고 그것을 펼쳤다.
지난번과 같이 약과 해독제, 연근산 등이 들어 있었다.
경정은 무거운 것은 죄다 버리고 해독제와 연근산만 챙겼다.
“이것만 챙겨가겠습니다. 마마님.”
“저희가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으십니다. 강호에서 알고 지냈던 지인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이 알면 걱정하실까 봐 이렇게 몰래 가는 것이고요.”
경정이 강호의 아는 지인이라고 말하자 소이자가 어깨를 움찔했다.
지난날 신형사에 갇혀 있을 때 환관 후보생을 함께 보낸 백경정이 소이자를 구하러 온 적이 있다.
백경정은 환관이 아닌 강호인이 되어 있었고 당시 승은 상궁이었던 백상궁과 친분이 있다고 말했다.
소이자는 경정이 말한 강호 지인이 자신의 친우인 강호인 백경정은 아닐까? 생각했다.
경정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을 믿어주는 청초각 식구들을 보며 감격했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녹가 장원을 빠져 나갈 것입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예. 마마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청초각 식구들을 침전에서 내보낸 경정은 하얀 무복으로 갈아입고 여인의 장삼을 걸쳤다.
장삼을 꽉 여미니 안에 입은 무복이 보이지 않았다.
경정은 왼쪽 발목에는 당소소가 준 해독제와 연근산을 챙기고 오른쪽 발목에는 얼굴을 가릴 면사를 챙겼다.
“모든 준비는 마쳤는데 우습군. 정작 중요한 검이 없어.”
경정은 방안 가득한 여인의 장신구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목검을 가져갈 수는 없고. 놈들에게 빼앗아서 쓰는 방법밖에 없다. 돌아오면 허리에 감아 숨길 수 있는 연검(軟劍)을 구해야겠다. 생각해보니까 무정검의 검초가 연검과 상성이 좋을 것 같구나.”
웃음을 흘린 경정은 보석함에서 끝이 가장 뾰족한 비녀를 찾아 머리에 꽂았다.
***
오후 늦게 녹가 장원에 도착한 벽서온은 경정이 아프다는 말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마님이 아프시다고?”
“그냥 앉게. 벽맹주. 마마님은 음식을 잘못 드셔서 탈이 나신 것이네.”
“대체 무엇을 드렸기에 마마께서 탈이 나셨어?”
벽서온은 속이 상한지 얼굴을 구겼다.
벽서온을 따라온 무림맹 청풍 단주 운평은 처음 보는 맹주의 얼굴에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제갈원은 벽서온이 가져온 흑시의 정보를 살펴보며 그의 손에 들린 백우선을 매만졌다.
“흑시의 주인이 야제(夜帝)란 말인가? 설마 지난날 무림의 오대악적(五代惡敵)으로 이름을 날린 흑천야제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흑천야제는 물론 오대악적이 모두 검선(劍仙)께서 붙잡혀 무림맹 지하 감옥에서 죽었네.”
“그렇다면 흑천야제의 계승자인가?”
“흑천야제는 밤의 제왕이라 불렸으나 사람을 팔고 사는 흉악무도한 짓은 벌이지 않았네. 아마도 흑천야제가 이끌던 흑도에서 파면당한 자일걸세.”
“원책사도 그렇게 보고 있네.”
“무림맹 책사는 어찌하여 흑천야제의 이름을 빌린 저급한 놈을 단번에 잡지 못한 것인가?”
제갈원은 원생에서 그가 스승으로 부른 무림맹 책사 원승균을 대놓고 욕했다.
가만히 자료를 보고 있던 당철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야제가 데리고 다니는 수하가 뱀을 부릴 줄 안다고?”
“그렇네. 그자가 피리를 불면 뱀이 떼로 몰려나오는데 그것 때문에 무림맹이 청야산에서 야제와 잔당을 놓친 것이네.”
“맹독을 품은 독사를 부릴 수 있다면 일이 커지겠군. 내가 당장 해독제를 준비하겠네.”
당철한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자료를 보던 남궁후도 의문점이 생기는지 벽서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서온아. 야제라는 자가 눈이 큰 동복(童僕, 사내아이 종)을 데리고 다닌다고 쓰여 있는데 말이다. 혹시 흑시에서 팔던 소년을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우리도 그런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니라고?”
“무림맹의 첫 번째 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 동복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자세히 말해봐라.”
벽서온이 이유를 말하려는데 갑자기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풍죽오우는 긴장한 채 탁자 위에 올려놓은 흑시에 대한 자료를 치웠다.
그때 문이 열리고 박달나무 가면을 얼굴에 쓴 사내가 등장했다.
사내는 자신을 막는 청풍 단주 운평의 팔을 치우며 말했다.
“벽서온. 무림맹원들이 나를 못 알아보는데? 내가 아무리 강호 활동이 줄어들었다지만 이 정도로 나를 아무도 몰라보는 것이야?”
“너··· 너는······?”
풍죽오우는 난데없이 녹가 장원을 방문한 사내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풍죽오우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풍운검(風雲劍)이었다.
터벅터벅 걸어들어와 자리에 앉은 풍운검은 풍죽오우를 보며 말했다.
“차를 내오지 않을 것이냐? 천진에서 이곳까지 한 시진(時辰, 두 시간) 만에 오느라 목이 타는구나.”
“풍운검.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남궁후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풍운검은 박달나무로 만든 가면을 벗고는 제갈원이 마시던 차를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가면을 벗은 풍운검 고정엽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홍아(紅兒, 녹주의 아명)는 잘 있어?”
***
소이자는 갑자기 찾아와 경정을 보겠다고 하는 가면을 쓴 사내를 보며 의심이 들었다.
“마마님은 지금 약을 드시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고정엽은 경정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이곳으로 달려온 것인데 얼굴도 보지 못 하게 하니 화가 났다.
“지인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냥 얼굴만 보고 가겠다.”
“절대 아니 됩니다. 마마께서 음식을 잘못 드셔서 지금 얼굴에 열꽃이 잔뜩 오르셨습니다. 보기 흉하다고 열꽃이 사라질 때까지 절대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은 마마님의 명을 따르는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소이자는 자신이 막는 사람이 황제인 줄도 모르고 경정의 명에 따라 문전박대를 했다.
고정엽은 힘들게 찾아왔는데 경정을 못 보고 간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엄세록이 고정엽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폐하. 여긴 왜 오셨습니까?”
“하성군을 맡고 계신 양왕께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왔다가 들린 것이다.”
“하성군이라면 천진에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여기까지 반나절이나 걸릴 텐데 어찌 이런 일을 벌이신 것입니까?”
“주위를 물리고 경공으로 내달려서 한 시진 만에 오긴 했다.”
“갈 때는 어찌하시려고요?”
“역참에서 말을 빌려서 타고 가야지.”
“아이고. 이런.”
엄세록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당장 돌아가십시오. 폐하. 궁에서 이 일을 알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날이 밝으면 백빈의 얼굴을 보고 떠날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당당하게 말하는 고정엽을 보며 엄세록은 어이가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와룡산 중턱의 정자에 앉은 경정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모습을 감상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대체 놈들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여자로 안 보여? 응? 그런 거야?’
경정은 놈들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앞섰다.
‘저자에 소문이 날 정도니, 와룡산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 것은 아닐까?’
청야산에서 와룡산으로 왔으니 또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초조했던 경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자를 이리저리 배회하는데 멀리 회강이 보였다.
와룡산을 끼고 흐르는 회강에 커다란 누각선(樓閣船)이 떠 있었다.
누각을 층층이 쌓아 올린 화려한 배를 본 경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의 크기를 보아하니 회강을 지나 장강으로 가는 길이겠구나. 삼층 누각이면 신분이 높은 자이거나 돈이 많은 자가 탔다는 것인데······.’
경정은 갑자기 저 누각선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보자. 분명 뭔가 있다.’
경정이 와룡산 아래로 뛰는 동안 산의 반대편에서는 풍죽오우와 무림맹원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벽서온은 그들을 따라 함께 온 고정엽을 보며 속삭였다.
“자네는 왜 따라왔나? 그만 내려가 보게.”
“이왕 왔으니 나도 돕겠네.”
“자네가 지금 누구인지 잊었는가?”
“잊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게. 위험할 것 같으면 네놈들은 죄다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어이구. 저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고정엽은 오랜만에 풍운검이 되어 가슴이 뛰고 있었다.
***
선착장 근처에 도착한 경정은 누각선에 짐을 싣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인부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주위에 수상한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뭔데 짐이 저렇게 많은 것이지?’
선착장 주위를 찬찬히 살피는데 구석에서 어린 소년들이 노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소년들이 선착장 한가운데 모여 있었는데 한가운데에 소년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와 여인들이 잡혀간다는데 어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저기서 놀고 있는 것이냐.’
경정은 소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들에게 걷던 경정의 눈이 커졌다.
‘어라? 저 꼬맹이는?’
경정은 다시 자세를 낮추고 대장으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눈동자 색이 묘하게 일반인들과 달랐다.
황색 눈을 한 소년.
‘서역에서 온 아이로구나. 색이 깊지 않은 것을 보면 혼혈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저 소년의 눈 색을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어디였지?’
경정은 황목(黃目)을 지닌 소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경정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놀란 경정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기억났다. 영화산에서 만난 황목 노인이다.’
경정은 평범하게 생긴 소년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이제 알겠다. 저 꼬맹이가 흑시의 잔당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