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251)

왜요? 내가 출궁하는 사람처럼 보이세요?

청초각 앞에 마차가 멈추어 섰다.

경정은 당소소와 함께 밖에 나와 환관들이 짐을 수레에 싣는 것을 구경했다.

소이자가 경정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마마님. 짐을 모두 수레에 실었습니다.”

“잘했다. 무겁고 가지고 가기 힘든 물건은 처분하여 은자로 바꿨겠지?”

“그럼요. 소인이 이미 다 처리했으니 심려하지 마시지요.”

경정은 그동안 받은 하사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서 출궁할 생각이었다.

‘황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반드시 다 가져가야 한다.’

소천이 다가와 당소소에게 말했다.

“재인 마마. 말린 약초도 수레에 다 실었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청초각의 약초밭은 어찌 된다고 하더냐?”

“약초밭이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내의원에서 잘 가꾸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참으로 다행이구나.”

시녀인 열음과 소천은 궁 밖으로 나갈 생각에 떨리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짐을 다 싣고 경정과 당소소가 가마에 오르려는데 멀리서 강소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소의의 옆에는 황후가 함께였다.

경정을 배웅하기 위해 황후가 직접 이곳에 온 것이다.

“백빈 마마. 기다리십시오.”

강소의는 경정을 발견하자마자 가마에서 내려 달려왔다.

“늦는 줄 알고 가마꾼을 재촉해서 왔습니다.”

강소의의 손에는 커다란 찬합이 들려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제가 만든 간식입니다.”

“간식이요?”

“서뢰가 태학에서 쫓겨나고 아버님이 기분이 좋으셔서 제 궁으로 여지(荔枝, 현재의 리치)를 보내셨습니다. 귀한 것이라 마마님께 드리려고 간식을 만들었지요.”

“그래요?”

“아버님이 이번 일로 주임교수로 승진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백빈 마마님의 덕분입니다.”

경정은 머리를 긁적이며 강소의가 주는 찬합을 받아 들었다.

황후도 가마에서 내려 경정에게 다가왔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경정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자 황후가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백빈이 간다니 무척이나 서운하구나.”

경정은 차마 양심에 찔려서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경정이 어색하게 웃는데 의외의 사람이 나타났다.

엄세록을 발견한 경정이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저 복장은 금의위의 복장이 아닌데?’

경정은 사복을 입고 등장한 엄세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가온 엄세록은 황후에게 먼저 예를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엄도통 왔는가. 녹가로 가는 길이 먼데 짐이 그것뿐인가?”

“예. 소신은 이것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엄세록이 허리에 찬 검을 들어 보이자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경정은 엄세록도 함께 녹가로 간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엄도통께서도 녹가로 가시는 겁니까?”

“폐하의 명을 받고 백빈 마마님을 호위하게 되었나이다. 소신이 마마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엄세록이 함께 간다는 말에 경정은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큰일 났다 싶었다.

‘혹시 폐하께서 스승님을 감시자로 딸려 보내시는 것인가?’

“마마. 오문(五門) 밖에서 녹씨 남매가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출발하시지요.”

“예. 엄도통.”

경정은 황후의 앞에 섰다.

‘황후 마마. 미천한 저를 그동안 분에 넘치게 예뻐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경정은 다시는 황후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황후 마마.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시어요.”

“백빈. 잘 다녀오게. 기다리고 있겠네.”

경정은 마음을 다해 황후에게 예를 올렸다.

그것이 그녀가 황후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

짐을 실은 커다란 수레를 이끌고 마차 두 대가 도성을 빠져나왔다.

마차 한 대에는 녹경과 녹빙이 타고 있었고 나머지 마차에는 경정과 당소소가 타고 있었다.

경정은 당소소를 보며 물었다.

“재인 마마께서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시고 싶으신가요?”

“저요?”

“돌아가고 싶으세요?”

“당연히 가야죠. 저는 마마님의 곁을 항상 따라다닐 것입니다.”

“저만 옆에 있으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경정은 당소소가 이렇게 말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경정은 녹가로 가자마자 강호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십 년만에 가족을 찾은 녹가가 다시 딸을 잃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됐다.

‘반드시 녹가의 도움을 받아 강호에 숨을 것이다. 뭐든 방법은 다 있기 마련이다.’

경정은 당장은 아무 생각 없이 녹가에서 편히 지낼 생각이었다.

방법은 천천히 생각하면 될 일.

경정은 마차에 난 작은 창을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마차는 어느덧 도성을 빠져나와 한적한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아. 강호 냄새. 그리웠다. 강호야.’

***

앞서가던 녹씨 남매가 탄 마차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후미에서 경정이 탄 마차를 살피던 엄세록은 녹씨 남매의 마차가 멈춰서자 앞으로 말을 몰았다.

“갈 길이 먼데 왜 멈추었는가?”

“엄도통. 저기 앞을 보십시오.”

엄세록이 앞을 확인하니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자들이 칼을 들고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엄세록은 갑자기 나타난 비적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가 계시는 도성이 지척인데 감히 비적들이 행패를 부려?’

엄세록이 비적들에게 쓴맛을 보여주려고 앞으로 나서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도통. 우리가 늦었네.”

“천하의 금의위가 고작 비적들을 베는데 검을 쓰실 요량인가?”

“계죽산은 예로부터 도성과 가까워 비적들이 없었는데 네 놈들이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엄세록은 갑자기 나타난 세 남자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풍죽오우였다.

제갈원, 당철한, 남궁후.

경정은 갑자기 마차가 멈추자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당소소는 무슨 일인지 몰라 걱정하며 물었다.

“백빈 마마. 왜 마차가 멈춘 것입니까?”

바깥을 확인한 경정은 평온한 얼굴로 창문을 닫고 당소소를 바라봤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어찌 신경을 안 씁니까? 혹시 마차가 진창에 빠진 것입니까?”

그때 바깥에서 도검이 부딪히는 살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소소는 깜짝 놀라 두 손을 꼭 쥐고 경정의 옆에 찰싹 붙었다.

“마마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대드는 소리입니다.”

경정은 갑자기 비적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 된통 걸렸구먼. 풍죽오우가 왔으니 볼 것도 없다. 잘가라 도적놈들아.’

***

두칠은 이곳 계죽산에 자리를 잡은 지 이제 한 달째 되는 비적이었다.

계죽산은 도성과 가까워서 비적이 출몰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편히 다녔는데 그 때문에 인근을 순찰하는 관병들이 적었다.

“크하하. 계죽산에 이리 큰 행렬이 지나가는 것은 처음 보는구나.”

두칠은 짐이 실린 수레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수레 뒤에 따라오는 마차는 장인이 만든 것 같아 보였다.

“두목님. 마차를 장식한 것을 보니 안에 여인이 타고 있는 듯합니다.”

수하의 말에 두칠이 눈을 번뜩였다.

“남자는 죄다 죽이고 여인만 살려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두칠의 명령에 비적들이 큰 소리로 복창했다.

비적들은 길이 좁아 뒤에 따르는 엄세록의 수하와 녹가에서 온 사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원이 주위를 확인하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 상대가 안 되는 자들이네. 마마께서 놀라시니 모든 인원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어찌 생각하시오? 엄도통?”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대로 두고 남궁후와 엄도통 그리고 당철한 세 사람이 단숨에 해치웁시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궁후와 당철한은 자신들에게 명을 내리는 제갈원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자네는 무엇을 하려고?”

“그대들도 알다시피 난 검에 재능이 없네. 여기 서서 혹시나 모를 비상 상황을 대비하고 있겠네.”

“비상 상황은 무슨. 저딴 비적 놈들은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다.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 자네와 엄도통은 끼어들지 말게.”

남궁후는 자신 있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칠은 홀로 걸어오는 남궁후를 보며 비웃었다.

“저 기생오라비처럼 꾸미고 있는 자는 대체 누구냐?”

“두목. 아무래도 두목님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고 쫄아서 협상하러 오는 것 같습니다.”

두칠은 부하의 입에 발린 소리에 기분이 좋은지 실실거리며 말했다.

“협상은 무슨. 저자의 목을 잘라 나 두칠이 어떤 사람인지 놈들에게 보이겠다. 비켜라.”

두칠이 거들먹거리며 앞으로 나서자 남궁후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풍류 공자 같은 평소 모습과 달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변한 남궁후가 두칠을 향해 미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

두칠은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당도한 남궁후를 보며 대경실색했다.

그가 미처 검을 뽑을 새도 없이 남궁후에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두칠은 눈앞의 사내가 언제 발검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목을 만졌다.

뜨거운 액체가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 크흡.”

두칠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을 부여잡고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남궁후는 두칠의 허리춤에 걸린 여인의 노리개를 보자마자 비적 놈의 취향을 알아차렸다.

노리개가 한두 개가 아닌 것을 보아하니 분명 비적질로 여인을 취하고 전리품으로 그것을 자랑하느라 허리춤에 차고 다닌 것일 터였다.

남궁후는 그것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고 단숨에 두칠의 목을 가른 것이다.

“역시 유성검(流星劍)이로구나.”

당철한은 남궁후의 발검술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것이 그 유명한 남궁세가의 유성검법이군요.”

유성검을 처음 보는 엄세록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졸지에 두목을 잃은 비적들은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검을 들고 일제히 달려왔다.

쪽수로는 아직 그들이 우세하다 여긴 것이다.

남궁후는 두칠의 피가 묻은 검을 바닥에 한 번 털어내고는 그대로 허공으로 도약했다.

눈앞의 목표물이 사라지자 비적들은 갈피를 못 잡고 서로 부딪히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때 허공에 떴던 남궁후가 비적들의 한복판에 떨어져 내렸다.

남궁후는 비적 한 놈의 얼굴을 밟으며 공중에서 떨어졌고 남궁후의 발아래 깔린 비적은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때부터 남궁후의 일방적인 칼춤이 시작되었다.

남궁후는 두칠과 달리 손에 사정을 둬서 비적들의 손과 다리만 검으로 베어 넘겼다.

도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비적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마차 안의 경정은 얼굴을 바깥으로 쭉 내밀고 이 모습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역시 남궁 공자시다. 평소에는 실없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남궁세가의 둘째 공자신데 절대 만만한 분이 아니지.’

경정이 두려움에 몸을 떠는 당소소를 달래고 있는데 마차 밖에서 엄세록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님. 잠깐 소란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엄도통.”

“상황을 정리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궁 공자께서 비적들을 살려놓으셨던데 저들은 어찌하실 것인가요?”

“마마께서도 보셨군요.”

엄세록은 경정이 이 무서운 광경을 목격했으니 매우 놀랐을 거라며 걱정이 앞섰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근처 관아에서 볼 수 있도록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조만간 관군들이 올 테니 살아남은 비적들을 포박하여 관아에 압송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엄도통. 수고해주시지요.”

보고를 마치고 뒤돌던 엄세록은 갑자기 황궁에 남아있는 황제 폐하가 떠올랐다.

‘매일 매일 보고를 올리라 하셨는데 이 일도 빠짐없이 자세히 전해야겠지?’

엄세록은 객잔에 도착하면 당장 황궁에 전서구(傳書鳩, 비둘기를 이용하는 통신 방법)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

황제 고정엽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새 뒤척이느라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소공공이 침소로 들어와 고정엽에게 예를 올렸다.

“기침하셨는지요.”

소공공은 눈 아래가 까매진 황제의 얼굴을 살피고 얼굴을 굳혔다.

‘또 잠을 못 주무셨구나. 큰일이다. 그나마 백빈 마마께서 계실 때는 잠을 잘 주무셨는데. 하루빨리 마마께서 돌아오셔야 할 것이다.’

소공공은 고정엽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새벽에 도착한 전서이옵니다.”

“전서?”

정신이 멍한 고정엽은 잠시 소공공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전서라고? 엄도통이 보낸 것이냐?”

“예. 폐하.”

고정엽은 옷을 제대로 여미지 않고 달려와 소공공의 손에서 전서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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