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251)

황제의 특명을 받다.

선비는 진귀인의 궁 안에서 들려오는 엄세록의 서슬 퍼런 목소리를 듣고 몸이 휘청거렸다.

시녀들이 다가와 선비를 살피자 그녀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시녀들은 선비가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엄세록의 명에 따라 금의위가 경양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귀인의 궁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선비는 포승줄에 묶인 여아를 보며 몸을 떨었다.

그녀가 진귀인의 궁에 꼭꼭 숨겨둔 장부는 엄세록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엄세록이 여아를 끌고 나오고 얼마 후, 경정과 법사 송일이 뒤 따라 나왔다.

선비는 진귀인의 넋을 위로한다며 갑자기 나타난 경정을 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이 악귀 같은 것. 진귀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분명히 나를 노리고 온 것이야!’

경정은 선비가 노려보자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뒤로 물러났다.

엄세록이 이 모습을 보고 여아를 수하에게 맡기고 경정의 앞에 서서 선비의 분노에 찬 시선을 가렸다.

“마마님. 이곳은 죄인이 있는 곳이니 속히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엄도통.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경정이 울먹이자 엄세록은 화가 났다.

내명부 후궁들의 암투가 심한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횡령과 뇌물까지 주고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마님은 선한 분이시다. 이런 무간지옥 같은 곳과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어.’

엄세록은 처음으로 경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송범한. 그대가 소의 마마님을 모시고 가라. 죄인은 내가 맡겠다.”

“알겠네. 엄도통.”

엄세록의 금의위 동기인 송범한이 경정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마마님.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경정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따르겠습니다.”

경정은 금의위의 호위를 받으며 경양궁을 나섰다.

선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경양궁을 빠져나가는 경정을 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

태후궁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황제와 황후는 날아든 급보에 깜짝 놀랐다.

“그것이 정말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어찌 된 일인지 상세히 고하라.”

엄세록이 고정엽을 향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함께 듣고 있는 태후와 황후는 내막을 알고 대경실색했다.

“소의가 경양궁에 갔더란 말이냐?”

“예. 태후 마마. 진귀인 마마께서 독주를 마시고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보화전 법사 송일과 진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엄세록은 혹시나 경정이 죄인을 감쌌다는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서 그녀를 옹호했다.

진귀인에게 독주를 내린 것은 황제 폐하시니 경정의 이번 행동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소의 마마께서는 죄인을 위해 제(祭)를 올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일부러 보화전 법사 송일과 함께 온 것이라 하셨습니다. 불경을 외워 진귀인이 회개하고 윤회할 수 있도록 빌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태후는 걱정하는 엄세록을 보며 손을 들었다.

“내 어찌 소의를 오해하겠는가? 황후가 윤허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 엄도통은 걱정하지 말고 발칙한 선비의 죄를 더 고해보게.”

엄세록은 안심하고 경양궁에서 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했다.

“이것이 진귀인의 침전에서 발견한 장부이옵니다. 보시지요.”

엄세록은 여아가 몰래 빼내려고 했던 장부를 황제에게 건넸다.

황제가 장부를 펼치자 옆으로 다가온 황후가 함께 그것을 확인했다.

내명부의 자금이 어찌 빠져나갔는지 잘 알지 못하는 황제도 장부의 내용이 뜻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렸다.

황후는 그동안 다른 비빈들을 위해 그녀가 양보했던 예비금이 이렇게 관리들을 위한 뇌물로 쓰였다는 것에 크게 마음이 상했다.

황후는 두통이 도지는지 머리와 가슴을 잡았다.

“황후. 괜찮소?”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는 상관하지 마시고 이번 일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주시 옵소서.”

“이미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는 증좌가 나왔는데 어찌 발뺌할 수 있겠는가? 황후는 걱정하지 말게.”

고정엽이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에게 고했다.

“소자는 이번 일을 처리하러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후.”

“그러세요. 황제. 황후는 내가 살피겠습니다.”

고정엽과 엄세록이 나가자 태후는 황후를 살폈다.

“태의를 들라 했으니 황후는 조금만 참게.”

“태후 마마. 제 두통은 고질병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지요. 그나저나 오늘 소의가 선한 마음으로 경양궁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선비의 죄를 밝혀내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그렇네. 황후. 인제 보니 소의를 녹가로 보내기 전에 내명부 일을 배우게 한 것이 신의 한 수였네.”

“이 모든 것은 태후 마마의 복이십니다.”

“그대의 복이기도 하네.”

황후를 챙긴 태후는 진상궁을 불렀다.

“진상궁. 청초각에 하사품을 내려라.”

“무엇을 내릴까요? 태후 마마?”

“남해에서 진상한 산호와 비단 오십 필. 세공하지 않은 진주 스무 알을 보내거라.”

화통한 태후의 결정에 진상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당장 거행하겠나이다.”

***

종수궁 서재에서는 오늘도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의 마마님. 조금만 쉬다 하면 안 될까요?”

강소의가 힘들다며 경정의 팔을 붙잡았다.

통통해서 찐빵 같았던 볼살은 온데간데없고 홀쭉한 얼굴의 강소의가 경정의 앞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 저의 책봉식이고 모레면 출궁합니다. 제가 가기 전에 장부 보는 법을 완벽히 익히셔야죠.”

“그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힘듭니다.”

“제가 그래서 장부를 보기 쉽게 정리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보기 쉽습니까?”

“그렇지요. 마마께서 장부를 싹 뜯어고치셨죠.”

강소의는 고작 보름 만에 내명부 장부를 환골탈태시킨 경정이 대단하다 싶었다.

경정은 장부를 궁의 이름순으로 정리했고 궁으로 보낼 녹봉 계산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계산식까지 만들었다.

“보십시오. 여기에 후궁 마마님의 품계를 먼저 대입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궁에서 일하는 궁녀와 환관의 수를 대입하는 것이지요. 모든 수의 대입이 끝나고 나면 그때 식을 계산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어때요? 참 쉽죠?”

강소의는 ‘참 쉽죠?’라고 말하는 경정의 표정이 참으로 얄미워 보였다.

“하나도 안 쉽습니다.”

경정은 무섭기만 한 선생님이 아니었다.

채찍과 당근을 함께 쓸 줄 아는 융통성이 있는 선생님이었다.

경정은 오늘 태후 마마께 받은 진주 중에서 하나를 꺼내 왔다.

함을 열어 그 안에 든 진주를 강소의에게 보이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소의 마마.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뭐긴요. 강소의께서 잘 따라오시면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이지요.”

“예?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강소의는 엄지손톱만 한 진주를 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오늘만 고생합시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저라고 출궁 이틀 전까지 이렇게 고생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강소의는 번쩍거리는 진주를 보며 의지를 다졌다.

“누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믿습니다. 그러니 저만 따라오세요.”

강소의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마마께서 태학 교수가 되시면 분명 인기 폭발일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

경양궁에 갇힌 선비는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녀인 여아는 신형사로 끌려간 지 오래였고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선비는 금줄이 쳐진 진귀인의 궁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날 진귀인의 궁에 쳐진 금줄을 보며 비웃었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경양궁 전체에 금줄이 쳐지고 금의위가 지키고 서 있었다.

“내가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선비는 황후의 오른팔로 승승장구하던 자신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황손만 회임하면 뇌물을 준 관리들을 이용해 자신의 아이를 태자로 바꾸고 황후를 밀어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 모든 것은 백소의. 그 악독한 것 때문이다.”

선비는 줄곧 백소의를 천한 것이라 불렀으나 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선비가 자랑하던 그녀의 이씨 가문보다 녹가의 위세가 더욱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때 멀리서 축포(祝砲) 소리가 들려왔다.

후궁의 책봉식을 알리는 축포였다.

“악독한 것이 이제 녹가의 성을 받고 더 승승장구하겠구나.”

선비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재기할 방법은 없었다.

오늘 경정의 책봉식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냉궁으로 내쳐져 어떤 처결이 내려질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화려한 대례복을 입은 경정이 황제와 황후 앞에 섰다.

얼마 전에 열린 책봉식에서 경정은 고정엽이 하사한 대례복을 입었는데 오늘은 황후가 하사한 대례복을 입었다.

내명부 후궁이 된 지 단 석 달 만에 대례복이 두 벌이나 생긴 것이다.

‘이러다 태후 마마께서 하사하신 대례복까지 입게 생겼군.’

홀로 생각에 빠져 있던 경정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만! 그것은 다시 궁에 돌아온다는 말이잖아. 절대 아니 된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는 궁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때 책봉식이 끝나고 황후가 경정을 불렀다.

“백빈은 고개를 들라.”

경정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공손하게 고개를 들었다.

“황후 마마.”

“그대는 이제 빈이 되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의 은덕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종수궁에 모인 후궁들은 모두 빈이 된 경정을 탐탁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한 사람.

강소의만이 빈이 된 경정을 보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경정이 준 진주가 장식으로 꽂혀 있었다.

“역시 우리 백빈 마마께서는 선녀 같으시네요.”

강소의가 경정을 칭송하자 채소의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강소의는 이제 백빈 마마의 편이 다 되었네요.”

“채소의는 백빈 마마님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지요? 우리 마마께서 얼마나 똑똑하시고 성품은 또 얼마나 어진지 아십니까? 선비의 죄가 까발려진 것도 모두 우리 백빈 마마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후궁들은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귀는 쫑긋 열고 강소의와 채소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강소의의 경정을 향한 찬양은 끝이 날 줄 몰랐다.

***

그날 밤, 건청궁.

고정엽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엄세록이 고정엽에게 다가가 말했다.

“다시 불면증이 도지신 것 같습니다. 제가 백빈 마마님을 모셔 올까요?”

고정엽은 손을 들어 엄세록을 말렸다.

“되었다. 하지 마라.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사람인데 쉬어야지.”

엄세록은 얼굴이 까칠해진 황제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경정이 내명부 장부를 새로 고쳐 쓴다는 핑계로 강소의와 밤낮으로 붙어 다녀서 고정엽은 경정을 볼 수 없었다.

고정엽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엄도통. 자네는 내가 황궁에 들어온 날 이후로 계속 나를 따라다녔지?”

“예. 그러하옵니다.”

“그대가 있기에 나도 마음 편히 암행을 나갈 수 있었네. 내가 그대를 믿고 있다는 것을 잘 알겠지?”

“폐하의 하해(河海)와 같은 신임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정엽은 진지한 눈빛으로 엄세록을 쳐다봤다.

엄세록은 황제가 자신을 왜 이토록 진지하게 쳐다보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긴 숨을 토해낸 고정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엄도통 자네도 함께 출궁하게.”

“예?”

“내가 백빈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니 엄도통이 나 대신 그녀를 지켜주란 말일세.”

“하지만 풍죽오우 분들께서 이미 녹가로 떠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풍죽오우 분들이 지키고 계실 텐데 어느 누가 마마님께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풍죽오우의 이름이 나오자 고정엽이 눈을 번뜩였다.

“그래서 자네를 보내는 것일세. 두 눈 크게 뜨고 지키게. 알아들었나?”

엄세록은 고정엽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황제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소신이 마마님을 지킬 것입니다.”

엄세록은 황제에게 인사를 고하고 건청궁 밖으로 나갔다.

엄세록을 배웅하던 소공공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엄도통. 오늘은 잘 알아들으신 것이 맞습니까?”

“그럼요. 제가 폐하를 대신해 각종 위협으로부터 마마님을 지킬 것입니다. 저는 마마님을 지킬 테니 소공공께서는 제가 없는 동안 폐하를 지켜주십시오.”

엄세록은 소공공에게 황제를 부탁하고 건청궁을 떠났다.

엄세록의 뒷모습을 보는 소공공이 탄식하며 말했다.

“또 못 알아들으셨군. 큰일이야. 이 정도면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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