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251)

출궁(出宮)이 결정되다.

빛바랜 자색(紫色) 천장.

오래된 나무 냄새.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경정의 눈이 순간 커졌다.

‘허! 이것은······?’

경정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침상 옆에서 탕약을 식히던 당소소가 경정이 일어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소의 마마님. 깨어나셨습니까?”

“이곳이 어디입니까? 저는 지금 누구인가요?”

경정이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당소소는 걱정이 앞섰다.

“왜 그러세요? 이곳은 청초각입니다.”

“아. 청초각이었군요.”

경정은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님. 제가 기억나십니까?”

“이제야 기억이 납니다. 재인 마마님이시죠?”

“제가 마마님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습니다.”

당소소는 경정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반나절이 넘게 누워계셨습니다. 지금은 인시(寅時, 새벽 3시)가 되었고요.”

“그렇게나 오랫동안 잤습니까?”

“태후께서 걱정하시어 태의 영감을 직접 보내시고 진상궁도 왔다 갔습니다.”

“태의 라고요? 혹시 마마님께서는 태의 영감을 만나보셨습니까?”

“아뇨. 저뿐만 아니라 처소의 궁녀들까지 모두 물리셔서 얼굴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경정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소의 마마. 조금 전까지 폐하께서 이곳을 지키다 가셨습니다.”

“폐하께서요?”

경정은 고정엽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것이 바로 병 주고 약 주는 것인가?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줄 알아?’

경정은 원생에서 황제 고정엽이 백경정 마마님을 승은 상궁으로 만들지만 않았어도 출궁하여 자수점을 열고 결국엔 가족을 되찾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백경정 마마님을 황궁에 가둔 황제가 더욱 싫어졌다.

‘어차피 나갈 거였다. 당장 짐 싸서 나가겠다.’

경정이 황궁에서 도망칠 결심을 굳히는데 당소소가 말했다.

“폐하께서 소의 마마님에 대한 정이 깊어 보이셨습니다.”

“예. 뭐, 그렇든 말든.”

경정은 대충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 진을 꼼짝도 하지 않고 마마님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렇겠죠.”

“예? 뭐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잊어버리십시오. 아직 정신을 덜 차려서 헛소리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정은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약을 드시지요. 제가 드시기 좋게 식혀 놓았습니다. 이것을 드시면 곧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재인 마마.”

당소소는 소이자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듣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녀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친척 집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랐기에 경정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 재인 마마. 대체 녹주가 누굽니까? 마마님은 아세요?”

물에 빠졌다가 지금 일어난 경정은 낮에 어화원에서 벌어진 일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이자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내막을 알아 왔습니다.”

당소소는 소이자가 황궁을 돌아다니며 알아 온 것을 경정에게 전했다.

“그럼, 제가 십 년 전에 실종된 녹주라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녹가에서 오신 분들이 이미 그들이 가져온 증좌를 태후 마마께 올렸다고 합니다.”

당소소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경정을 향해 예를 올렸다.

"소의 마마. 가족을 찾으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경정은 축하 인사를 받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드디어 황궁에서 나갈 때가 되었다. 백경정 마마님도 이곳에 남아 있기 싫어할 것이다.'

경정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당소소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

다음날, 청초각으로 풍죽오우와 녹씨 남매가 찾아왔다.

“언니!”

녹경은 한걸음에 다가와 경정의 손을 잡았다.

“언니. 보고 싶었어.”

“녹경 소저. 저는······.”

경정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오르자 녹빙이 동생을 자중시켰다.

“경아. 마마님은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셨다. 네가 그리 흥분하면 마마님이 놀라신다.”

녹경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경정을 바라봤다.

“언니.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그럼요. 기억날 리가 없죠. 저는 장강에 빠졌던 백경정 마마님이 아니라 그냥 백경정이니까요.’

경정이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자 녹경은 아쉬워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당철한이 다가와 녹경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경아. 걱정 붙들어 매라. 내가 마마님이 기억을 찾으실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철한 오라버니. 고마워요.”

벽서온도 말을 보탰다.

“대막(大漠)에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술법이 전해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무림맹에 그 자료가 남아 있을 테니 내가 확인 후, 녹가에 보내겠다.”

“서온 오라버니.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제갈원도 말을 보탰다.

“나도 제갈세가에 있는 서고를 뒤져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을 찾아보겠다.”

“제갈세가의 서고는 황궁 서고만큼이나 귀한 책이 많다는데. 정말 그래 주실 수 있나요?”

“나도 소의 마마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풍죽오우가 모두 돕고 싶다고 하자 녹경은 감동하여 눈물을 훔쳤다.

남궁후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몸으로 때울 것이니 언제든 나를 이용해주게. 하하하.”

경정은 의기투합하여 그녀의 사라진 기억을 되살려보려는 풍죽오우와 녹씨 남매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백경정 마마님의 기억. 영원히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기 부담스러웠던 경정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그것을 본 녹경이 놀라 물었다.

“언니. 괜찮아?”

“괜찮습니다. 녹경 소저.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니. 나한테는 말을 편하게 해도 돼.”

“제가 어찌 녹경 소저께 말을 놓겠습니까?”

녹경은 불편해하는 경정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

연회에서 벌어진 일로 황궁은 며칠째 들썩이고 있었다.

태후는 황제를 보자마자 경정의 일부터 먼저 물었다.

“소의는 어떠합니까? 이제 괜찮은 것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의와 사천당가 소가주가 성심성의껏 돌보고 있습니다.”

황후도 걱정하는 태후를 안심시켰다.

“태후 마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소의는 여전합니다. 소의를 핍박한 백씨 일가에 중벌는 내리지 말아 달라고 엄 도통을 통해 따로 부탁 했다고 합니다.”

“소의는 착한 아이지요. 그래서 백씨 일가를 더 용서하기 힘든 것입니다.”

태후는 이번 일로 경정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졌다.

뭐든 부족한 것이 없는 백소의였으나 딱 한 가지 그녀의 미천한 출신이 흠이었는데 그녀가 명문세가 녹가의 여식인 것이 밝혀졌으니 이제는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황제는 백소의를 어찌하실 거요?”

태후가 묻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정엽이 얼굴을 들었다.

태후는 부쩍 수척해진 황제를 보며 매우 놀랐다.

“어찌 이리 몸이 상했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정엽이 아무것도 아니라 답했으나 그에게 근심거리가 있음을 태후는 바로 알아차렸다.

황후는 태후의 걱정을 덜기 위해 말을 보탰다.

“폐하께서 소의에 대한 걱정이 커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태후 마마.”

“황제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는 한 여인의 지아비이기도 하지만 일국의 황제입니다. 그러니 걱정도 정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세요.”

태후가 꾸짖자 고정엽은 그러겠다며 답했다.

“그런데 모후(母后).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고정엽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소의를 잠시 녹가에 보낼까 합니다.”

“뭐라고요? 소의를 녹가에 보내요?”

“예. 그렇습니다.”

고정엽의 말에 태후는 매우 놀랐다.

황제의 후궁이 궁 밖에 나가 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후궁이 궁밖에 살았던 것이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선선대 황제가 죽고 불가의 귀의한 태황태후(太皇太后, 선선대 황제의 부인)를 그녀의 질녀가 모셨는데, 사찰에 찾아왔던 선황제가 그녀를 보고 반해 후궁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

태황태후를 모시던 질녀는 후궁이 되어서도 사찰에서 살았고 태황태후가 영면(永眠)하시고 나서야 궁에 들어왔다.

사찰에서 선황제의 아들인 황자가 태어났고 그가 바로 지금의 황제인 고정엽이었다.

고정엽은 그래서 어린 시절을 강호에서 보낼 수 있었다.

“소의가 녹가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가족의 품으로 보내 기억을 되찾아 주려는 것입니까?”

“그러하옵니다.”

태후는 인자한 얼굴로 고정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대신 녹가로 보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태후가 승낙하자 고정엽은 그제야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말씀해 주시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의의 품계를 올리고 난 뒤에 녹가에 보내세요.”

고정엽과 황후가 놀라 태후를 바라봤다.

“소의는 특별한 경우이긴 하나, 그래도 출궁하는 것이니 사람들이 함부로 그것에 대해 떠들고 다닐 것입니다. 그러니 소의의 품계를 높여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고정엽과 황후는 태후의 깊은 뜻을 알아듣고 감격했다.

황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후 마마. 품계는 어찌할까요? 소의(昭儀) 다음이 귀인(貴人)이니 귀인으로 봉할까요?”

태후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빈(嬪)으로 하세요.”

귀인을 건너뛰고 단숨에 빈이라니.

고정엽과 황후는 태후의 파격적인 결정에 할 말을 잃었다.

“소의가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름은 바꾸지 말고 녹가의 성만 찾아주도록 합시다.”

“그럼, 녹주가 아닌 녹경정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대신 백소의가 갑자기 성이 바뀌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봉호(封號, 왕이 봉하여 내려 준 호)를 내려줍시다.”

고정엽은 태후의 뜻을 알아듣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백소의의 본래 성인 백(白)으로 봉호를 내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소의가 눈처럼 흰 피부와 백옥같은 마음씨를 지녔으니 백이란 봉호가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백빈(白嬪)이라.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태후 마마.”

인자하게 웃던 황후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냈다.

“황후.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오?”

고정엽이 의아해하며 묻자 황후가 답했다.

“폐하. 그리고 태후 마마.”

황후는 망설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몸이 약해 내명부의 큰 살림을 혼자 꾸려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비가 옆에서 황후를 돕고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선비가 오랫동안 저를 도왔지요. 그러니 이제 손을 떼게 하고 다른 이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말에 태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말이 내명부의 일을 돕는 것이지.

사실 그것은 내명부를 관리하는 특권을 손에 넣는 것이니 이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황후는 지난번 황궁 연회에서 본 선비의 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선비가 겉으로만 예의를 차릴 뿐 속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번 연회에서 그녀의 민낯을 본 것 같아 꺼려졌다.

“황후는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하십니까?”

황후는 본래 경정을 추천하고 싶었다.

그러나 경정이 출궁하여 녹가로 간다니 다른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소의. 강하연이 어떨까? 합니다. 강소의의 아비가 태학(太學)의 산학교수이고 강소의도 셈을 잘한다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소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가 좋지 않군요.”

“저도 태후 마마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소의는 곧 녹가로 갈 테니 큰 짐을 지울 수는 없지요. 또한 강소의라면 내명부 내에 파벌도 없고, 그 아비도 성품이 괜찮으니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고정엽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시고 강소의에게 일을 맡기시되 백소의가 옆에서 돕도록 하면 어떨까요?”

고정엽이 절충안을 내놓자 황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는 좋은 생각이라 사료되옵니다.”

태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 소의에게 내명부의 일을 도우라 명하는 것은 찬성이네. 하지만 그 일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소의가 잘 따라갈 수 있겠는가?”

태후가 걱정하자 고정엽이 환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것은 걱정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태후 마마. 지금은 단지 기억을 못 할 뿐. 소의의 진짜 모습은 녹주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지난날 예원(禮園)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녹주였습니다. 천하귀재(天下鬼才)라 불리는 제갈원도 녹주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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