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51)

내가 녹주라니.

‘내가 녹주라니? 대체 왜?’

경정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녹씨 남매를 보며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라서 맞잡은 녹경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고정엽도 이 상황이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풍죽오우를 보며 전음을 보냈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백소의가 녹주라니? 너희들은 뭔가 알고 있지?]

고정엽이 묻자 풍죽오우 네 명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고정엽. 대체 눈은 왜 달고 다니는 것이냐? 장식인 건가?]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로구나. 너는 짐작도 하지 못한 것이냐?]

[우리야 단 한 번 마마님을 본 것이니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넌 어떻게 지금까지 모를 수가 있지?]

[입 다물어. 변명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풍죽오우 네 명이 동시에 고정엽에게 쌍욕을 늘어왔다.

그들은 고작 반나절 만에 십 년은 늙어 보였다.

백씨 일가의 참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녹경은 경정이 녹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털어놓으며 도와달라 말했다.

풍죽오우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어이없어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진짜인 것 같았다.

그래서 당철한이 나서서 피검사를 해보자고 한 것이다.

고정엽을 향해 한바탕 욕을 한 풍죽오우는 고개를 돌려 경정을 바라봤다.

그들은 당황해하는 경정의 앞으로 걸어가 예를 올렸다.

“소의 마마. 가족을 찾으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소의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경정은 축하 인사를 하는 풍죽오우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내가 녹주인 건가? 아니지. 내가 아니라 백경정 마마님이 녹주인 거잖아.’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았고 주위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경정은 황급히 자리를 피해 황후에게 도망쳤다.

“황후 마마.”

“백소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는 경정의 떨리는 손을 꽉 잡아줬다.

고정엽은 아직도 경정이 녹주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녹빙 공자.”

고정엽이 녹빙을 부르자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황제의 앞에 섰다.

“녹빙 공자는 고하라. 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고정엽이 명하자 녹빙은 알고 있는 것을 죄다 털어놨다.

녹빙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고정엽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백소의가 정녕 녹주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경이에게 소의 마마님의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저희는 확신하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고정엽은 정신이 멍해졌다.

처음 신형사에서 경정의 얼굴을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그의 첫사랑인 녹주와 너무나도 닮았으니까.

단지 그것 때문에 경정을 옆에 둔 것은 아니었다.

차분한 녹주와 정반대의 활달한 성격을 지닌 경정에게 차츰 마음이 갔고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가 바로 녹주였다.

‘바보 같은 놈. 경이도 단박에 알아본 것을 몇 달을 함께 지낸 내가 알아보지 못하다니. 너는 욕을 먹어도 싸다.’

고정엽은 그리워하던 첫사랑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황후의 곁에 서 있는 경정은 갑자기 울분이 치솟았다.

'백경정 마마님이 녹경 소저의 언니였다니. 그럼, 마마님의 지난 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경정은 그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갑자기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했다.

경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제 고정엽에게 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황제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머리통만 봐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백소의. 축하한다. 진짜 가족을 찾은 것 같구나. 내가 녹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절대로 허튼소리를 할 사람들이 아니다.”

황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경정의 손을 토닥였다.

황후는 경정이 놀랐을까 봐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줬고 옆에 있던 선비는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선비는 백소의가 천한 백가의 자손이 아니라 대학사를 배출한 명문가의 여식이란 사실에 분노했다.

황제의 총애는 물론 녹가라는 배경까지 얻었으니 백소의가 등에 날개를 단 셈이었다.

백려연은 경정이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이란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말도 안 돼. 천한 것이 창기의 딸이 아니라 명문가의 여식이라고?’

함께 꿇려 있는 백차홍이 백려연에게 말했다.

“언니. 어쩌지? 백가는 이제 끝이야. 다 죽은 목숨이라고.”

백차홍은 앞으로의 일이 두려워 눈물을 쏟아냈으나 백려연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녀는 경정에 대한 지독한 악의로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황후는 경정이 어색해할까 봐 직접 그녀를 데리고 녹씨 남매에게 걸음을 옮겼다.

경정이 가까이 다가오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백려연의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마침 금의위가 백씨 자매의 팔을 놓았고 백려연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천한 것! 물에 빠져 다시는 나오지 마라!”

백려연은 알고 있었다.

장강에 빠졌던 경정이 물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경정이 물에 빠져 다시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기를 바랐다.

평소 같으면 장정(壯丁)이 와서 밀어도 끄떡도 하지 않았을 경정이었으나 머릿속이 복잡하니 백려연이 달려오는 것도 보지 못했다.

경정은 백려연에게 떠밀려 연못에 빠졌고 ‘첨벙’하는 소리가 어화원에 울려 퍼졌다.

물속에 들어간 경정은 갑자기 온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개헤엄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던 그였는데 물에 빠지자 마차 점혈을 당한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헤엄을 못 치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물에 뜰 텐데 두려움에 몸을 뒤흔드니 오히려 물속에 점점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왜 숨을 못 쉬는 건데? 백경정아. 자맥질이 네놈의 특기잖아. 개헤엄이든 뭐든 뭔가 해보란 말이다.’

마음과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자 경정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버둥거리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데 그녀가 눈을 뜰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승님! 저를 구하러 오시는군요.’

‘어라? 제갈 책사님까지? 항상 책만 보시는 줄 알았는데 이리 헤엄을 잘 치셨군요.’

‘당 소가주님. 저와 개울에서 멱을 감던 일이 기억나십니까?’

‘남궁 공자님은 소매가 너무 커서 헤엄치기 곤란하시군요. 그러게, 그 휘황찬란한 옷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소이자. 왜 너까지? 너는 헤엄을 못 치잖아. 누가 소이자 좀 구해줘요. 이러다 얘 죽겠어요.’

간당간당하던 경정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대로 숨이 막혀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누군가 물속에서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경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서 눈을 떴다.

그의 팔을 잡은 이는 바로 일국의 황제이자 그가 지금 가장 미워하는 고정엽이었다.

***

황후는 초조하게 연못을 바라보고 있다.

경정이 연못에 빠지자 정자 위에 있던 사내들이 일시에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가장 빠른 사람은 바로 황제 고정엽이었다.

황제를 시작으로 거의 동시에 풍죽오우, 엄세록 급기야 소이자까지 뛰어드는 모습에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어서 폐하와 백소의를 구해라. 어서!”

금의위는 물속에 들어간 사람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황후는 매서운 눈으로 백소의를 연못에 밀어 넣은 백려연을 바라봤다.

인자하고 품위 있는 황후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여봐라. 이 악랄한 것들을 당장 이곳에서 치워라.”

“예. 황후 마마.”

백려연과 백차홍은 입이 틀어막힌 채로 정자 밖으로 끌려 나갔다.

황후는 이제 선비를 노려봤다.

선비는 평소 몸이 좋지 않은 황후를 대신해 내명부의 일을 도운 충직한 후궁이었으나 오늘은 웬일이지 다른 사람 같았다.

선비는 황후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백소의를 구하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연못에 뛰어든 황제가 머릿속에 가득 차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때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다.

선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확인했다.

고정엽이 실신한 경정을 데리고 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소의? 내 말이 들리는가? 소의?”

고정엽은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다시 만난 녹주인가?

십 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그녀가 아닌가?

고정엽은 이대로 경정을 놓칠 수 없었다.

당철한이 넋이 나간 고정엽을 밀치며 말했다.

“비켜라. 내가 마마님께 숨을 불어 넣겠다.”

고정엽은 매서운 눈으로 다가오는 당철한의 손을 뿌리치더니 숨을 들여 마시고 그대로 경정의 입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댔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 일국의 황제 폐하가 후궁을 살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입술을 꽉 깨문 당철한이 비켜서자 제갈원과 벽서온의 눈짓을 했다.

[나서지 마라. 우리가 나서면 소의 마마님께 득 될 것이 없다.]

[소의 마마님은 무슨. 녹주다. 우리와 함께 영화산에서 공부했던 녹주라고.]

당철한이 울분을 토해냈다.

[뭐가 됐든 지금은 내명부의 후궁 마마님이시다. 그러니 책잡힐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오늘 똑똑히 보았지? 황궁에 소의 마마님께 위해를 가하려는 이가 있는 것 같다.]

제갈원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망할 놈의 고정엽 같으니. 괜히 황제가 돼서 녹주를 힘들게 해?]

고정엽이 경정의 입에 몇 번이나 숨을 불어넣자 마침내 그녀는 물을 토해냈다.

“칵. 칵.”

경정이 물을 토해내며 기침을 하자 고정엽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 도통. 용포를 가져와라.”

“예. 폐하.”

고정엽은 경정의 옷이 젖은 것을 확인하고 품에 안아 사람들의 시선을 가렸다.

연회에 참석한 귀빈들은 방금 있었던 백가의 추태와 소의 마마의 가족 찾기는 모두 잊고 후궁을 향한 지극한 황제의 사랑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용포를 가져왔나이다.”

“내게 다오.”

고정엽은 용포로 경정의 몸을 가리고 그대로 안아 들었다.

경정은 정신이 드는지 황제에게 물었다.

“제가 죽었습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렇군요. 제가 또 살았군요.”

경정은 물을 너무 마셔서 정신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도 못 알아보고 정신없이 주절거렸다.

“참으로 질긴 목숨입니다. 그릇을 씹어먹어도 죽지 않아요.”

“힘들면 말하지 마라.”

“이왕 죽을 거 강호에서 죽을래요. 강호인이 되어 자유롭게 살다가··· 죽을······.”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리던 경정은 이내 눈을 감았다.

고정엽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정을 보며 생각했다.

‘다시는 너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도 없으니 내 곁에 꼭 붙어 있어라.’

***

화가로 돌아가는 가마 안에서 화예희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시녀인 경총이 주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가씨. 궁에 가신 김에 화빈 마마님을 뵙고 오는 편이 좋았을까요?”

“되었다. 내가 곧 황궁에 들어갈 것인데 오늘 본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하지만 두 분은 자매시니 만나서 그간 못한 담소라도 나누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단호한 화예희의 대답에 경총은 입을 닫았다.

경총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내명부의 후궁이 되시면 백소의가 가장 큰 위협이 될 듯합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미천한 소인이 무얼 알겠습니까만, 오늘 어화원에서 폐하와 백소의를 보니 두 분의 정이 아주 깊어 보였습니다.”

“나도 그리 보이더구나.”

화예희는 말하는 내내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찌 그리 평온하신 것입니까? 백소의가 명문 세가인 녹가를 배경으로 얻었으니 곧 황후 마마를 능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오늘 일로 확실해졌다. 내 상대는 백소의가 아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죠?”

화예희는 오늘 백소의를 생각하는 황제의 절절한 사랑을 몸소 느끼고 계획을 바꿨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황제 폐하의 일순 위는 백소의일 것이다. 그러니 힘들게 그녀와 겨룰 필요는 없겠지.”

“그럼, 폐하의 총애를 포기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소의를 적으로 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녀를 내 편으로 삼아 이용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방법이니라.”

경총은 주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더 캐묻지 않았다.

그녀의 주인은 화가의 누구보다 총명했다.

“아가씨. 어서 화가로 돌아가시죠.”

“그래. 피곤하구나. 가마꾼을 재촉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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