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
“잠깐! 멈추어라.”
궁녀를 끌고 가려던 환관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길을 비켰다.
윤영은 황제가 다가오는데도 떨리는 기색 없이 당당했다.
경정은 당찬 윤영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윤영아. 잘한다. 바로 그거야.’
경정은 소이자의 주선으로 상의감 궁녀인 윤영을 알게 됐다.
윤영은 후궁이 된 경정을 진심으로 축하해줬으며 백씨 자매가 황궁 연회에 참석한다는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오늘 이 자리도 윤영이 직접 오겠다고 해서 소이자를 시켜 근처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윤영은 백씨 자매가 허튼짓하면 자신이 폐하께 직접 고할 거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
‘백경정 마마님이 좋은 친구분을 두셨어.’
경정이 감탄하고 있는데 고정엽이 진지한 얼굴로 윤영에게 물었다.
“네가 백소의가 잘 안다고 말하였느냐?”
“폐하. 백씨 일가가 행한 잔인무도한 짓을 소인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궁녀 윤영의 고백에 백려연과 백차홍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폐하. 어찌 천한 궁녀의 말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제발 소인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고정엽이 싸늘한 눈빛으로 백려연을 꾸짖었다.
“백가 여인은 자중하라.”
“...폐하?”
고정엽이 그녀를 백가 여인이라 부르자 백려연은 몸이 떨렸다.
“백가 여인은 들어라. 그대가 동생이라 말하는 백소의도 궁녀였다. 알겠느냐? 어찌 궁녀를 천하다 업신여기는가?”
고정엽의 말투에서 냉기가 흘렀고 백려연은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고정엽은 윤영을 일어서게 하고 물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라. 하나도 빠짐없이 고해야 할 것이다.”
“폐하. 소인도 그러려고 올라온 것입니다.”
윤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백씨 자매를 보며 냉소했다.
백씨 자매가 어떻게 경정을 괴롭혀 왔는지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윤영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백소의 마마님은 절대 백가의 여식이 아닙니다. 저들은 사가에서 마마님께 시녀보다 못한 대우를 했고 급기야 궁녀로 팔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윤영의 말에 사람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매를 궁녀로 팔아넘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인과 백소의 마마님은 함께 궁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궁녀들을 데려온 이가 최가라는 사람입니다. 그자는 궁핍한 백성들에게 돈을 주고 궁에서 허드렛일할 궁녀를 사 오지요. 소인의 가족도 돈을 받고 저를 최가에 넘겼고 백소의 마마님도 같은 신세로 알고 있습니다. 최가가 아직도 궁에 궁녀를 대고 있으니 조사해 보시면 바로 아실 것입니다.”
윤영의 말에 사방이 일순 고요해졌다.
폐하의 총비가 본디 궁녀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듯 팔려서 궁에 들어왔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고정엽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폐하. 소의 마마께서는 착하고 성품이 어질어 자신을 거둬준 백씨 일가를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씨 일가는 소의 마마님을 궁녀로 팔아버린 것도 모자라 후궁이 되신 마마님의 덕을 보려고 일부러 황궁 연회에 참석한 것이옵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악독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여 소인이 참지 못하고 폐하의 앞에 선 것입니다. 우리 착한 소의 마마는 절대 그 일을 고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윤영이 백씨 일가의 죄를 낱낱이 고하자 사람들은 분노했다.
고정엽도 분노를 삭이며 윤영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제 내가 알았으니 절대 이 일을 좌시하지 않겠다. 여봐라.”
고정엽이 손을 들자 대기하고 있던 엄세록이 금의위와 함께 답했다.
“예. 폐하.”
검을 찬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백씨 자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당장 백씨 자매를 가두고 이 일을 조사토록 하라.”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금의위가 다가와 백려연과 백차홍을 사로잡았다.
일이 틀어지자 선비는 초조했다.
처음으로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섰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백경정. 저 천한 것이 꾸민 일이 분명하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백소의는 백가의 사생아가 분명하다. 감히 궁녀를 매수하여 거짓을 고하게 해?’
평정심을 잃은 선비는 자세히 따져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서서 고했다.
“폐하. 백씨 자매가 죄를 짓기는 하였으나 어찌 궁녀의 말만 믿고 조사를 명하시는 것이옵니까?”
고정엽은 자꾸 나서서 딴지를 거는 선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도 평소와 다른 선비의 행동이 수상하다 여겼다.
“폐하. 궁에는 대대로 친자를 검사하는 방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매도 피를 나눈 사이이니 이 방법이 통하겠지요. 이참에 그것을 해보시면 어떠하십니까?”
선비의 말에 백려연과 백차홍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살길이 생겼다며 황제를 향해 읍소했다.
“소인들은 백소의 마마님과 피를 나눈 자매가 맞습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경정은 갑자기 튀어나온 피검사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친자 검사를 하면 내가 백씨라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잖아. 선비. 이 악랄한 사람이!!’
경정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나서는데 갑자기 뜻밖의 사람들이 정자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풍죽오우와 녹씨 남매였다.
당철한이 고정엽의 앞에 나서서 고했다.
“폐하. 저는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철한이옵니다. 피검사를 하실 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경정은 그녀를 도우려고 나선 당철한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이봐요. 당 소가주님.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경정이 안 된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여인이 다가왔다.
그는 영화산에서 만난 녹경이었다.
녹경은 웬일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백소의 마마님. 피검사를 하시죠. 제가 돕겠습니다.”
녹경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는 녹경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미남자가 함께였다.
“녹경 소저. 왜 이러십니까?”
“피검사를 해야 확실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경정은 불안한 눈빛으로 녹경의 손길을 피했다.
‘금의위가 조사를 하면 백가가 백경정 마마님께 행한 짓이 드러날 것인데 갑자기 피검사라니.’
경정이 고정엽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그래도 함께 가족으로 산 세월이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피검사까지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소의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폐하.”
고정엽은 끝까지 자매들을 감싸는 경정이 안쓰러웠다.
백려연과 백차홍은 피검사를 못하게 하는 경정을 보며 치를 떨었다.
급기야 그들은 고정엽의 앞에 넙죽 엎드리며 읍소했다.
“폐하. 제발 피검사를 받게 해주십시오. 소의 마마님은 확실한 백가가 맞습니다.”
백려연과 백차홍은 피검사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죽자 살자 달려들었다.
고정엽에게 읍소한 백려연은 이제는 경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님을 궁녀로 판 것은 오해이옵니다. 그때 마마께서 기억을 잃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밖에 나갔다가 인신매매범들에게 붙잡혀 궁녀로 팔려 가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경정은 그녀의 발아래에서 처절하게 읍소하는 백려연을 바라봤다.
자존심 강하던 백려연은 온데간데없고 그녀는 지금 살기 위해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모두 버린 상태였다.
“언니의 말대로 내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모릅니다.”
“맞습니다. 소의 마마님은 잘 모르시지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피검사를 해야 합니다.”
경정과 백려연이 대치하고 있는데 녹경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당 소가주께서 마침 준비를 모두 마치셨습니다. 어서 피검사를 해보시지요.”
고개를 돌려보니 옥으로 만든 탁자 위에 깨끗한 물이 담긴 종지가 놓여 있었다.
“녹경 소저. 저는 피검사보다는 금의위에 맡겨서 일을 처리하는 편이 옳다고······.”
경정은 갑자기 그녀의 목 뒤가 따끔했다.
그녀가 놀라 고개를 돌리는데 목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녹빙 공자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혈도를 짚은 것이다.
연달아 아혈까지 점혈 당한 경정은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녹경 소저······?’
녹경은 주저하지 않고 경정의 손가락에 침을 찔러 넣었다.
깨끗한 물이 위로 경정이 새빨간 피가 떨어졌다.
당철한은 꿇어앉아 있는 백려연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녀의 손가락에도 침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두 개의 종지에 백려연의 핏방울을 받아냈다.
하나는 경정의 피가 떨어진 곳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녀의 친동생인 백차홍의 피가 떨어진 종지였다.
경정은 몸이 굳은 채 종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제발 부탁이다. 피야 섞이지 마라.’
경정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지척에서 황후와 함께 이를 지켜보는 선비도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백소의가 대역무도한 집안의 자손임은 만천하에 드러내야 했다.
그때 소공공이 종지의 피를 보며 소리쳤다.
“폐하. 이것을 보시지요.”
고정엽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소공공은 피검사를 한 종지를 가져와 고정엽에게 바쳤다.
“어찌 되었는가?”
“폐하. 보십시오. 백씨 자매의 것은 피가 섞였으나 소의 마마님의 것은 피가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백소의의 말이 맞았어.”
고정엽은 그제야 안심하고 결과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영롱한 핏방울이 서로 섞이지 않고 물속에 떠 있는 모습을 본 고정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로써 백소의와 죄를 지은 백씨 일가가 서로 상관없는 사이임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백려연과 백차홍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건 아니라고! 경정! 이 천한 것! 네가 술수를 부린 것이지? 우리를 죽이려고 일부러 황궁에 부른 것이냐?”
백차홍은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하며 몸을 떨었으나 백려연은 미친 사람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엄세록의 명을 받은 금의위가 다가와 백씨 자매의 양팔을 잡고 바닥에 꿇어 앉혔다.
경정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말에 안도하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저 악독한 자매들과 백경정 마마님이 자매일 리가 없지. 하하하. 괜히 쫄았어.’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못하던 경정은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점혈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따끔했다.
경정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녹경이 그녀의 손에 다시 침을 찔러넣고 있었다.
‘녹경 소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다 끝났다고요. 저는 백가의 여식이 아닙니다.’
녹경은 깨끗한 물에 경정의 피를 떨어뜨리더니 이제는 자신의 손가락에도 똑같이 침을 찔러 넣었다.
경정은 대경실색하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녹경의 옆으로 그녀의 오라비인 녹빙도 다가와 함께 뚫어지게 핏방울이 떨어진 물을 확인했다.
이내 그들의 눈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녹경은 시뻘게진 눈으로 경정을 와락 끌어 앉았다.
경정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녹경은 경정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녹주 언니!”
‘이봐요. 녹경 소저. 미쳤습니까? 전 백경정입니다.’
경정이 속으로 외쳤으나 아무도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하였다.
“언니를 찾았어. 드디어 녹주 언니를 찾았다고.”
‘언니라고? 제가요?’
경정은 녹경에 품에 안긴 채 눈을 똥그랗게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경정의 목덜미가 다시 따끔했다.
녹빙이 그녀의 혈도를 풀어준 것이다.
경정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녹경은 자신을 피하는 경정의 팔을 부여잡고 놔주지 않았다.
“녹주 언니.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절대로 언니 옆을 떠나지 않을 거야.”
녹경의 말에 일대가 일순 고요해졌다.
후궁 백경정이 백씨의 여식이 아닌 주워온 아이라는 사실을 알겠는데.
대체 녹주는 누구인가?
경정이 녹경을 향해 물었다.
“녹경 소저.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대체 녹주가 누굽니까?”
녹경은 방금 두 사람의 피검사를 한 종지를 경정에게 보이며 말했다.
“녹주는 십 년 전 실종된 제 언니입니다. 바로 소의 마마님이시지요. 이것을 보세요. 우리 두 사람의 피가 섞였습니다. 마마님은 제 언니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