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명부는 오늘도 시끄럽다.
해가 산으로 넘어가려는데 마차가 멈춰 섰다.
경정은 놀라서 창문을 열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밖을 확인하니 도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경정은 기다리고 있는 금의위의 병사들을 확인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경정이 마차에서 내리자 풍죽오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경정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마차가 많이 흔들렸을 것인데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벽서온의 다정한 말에 경정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편하게 왔습니다. 벽서온 맹주님.”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소의 마마.”
‘맹주님 밑에서 자그마치 칠 년을 일했습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벽서온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당철한이 수줍어하는 벽서온을 밀치고 들어오더니 소매 안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 경정에게 내밀었다.
“제가 만든 약인데 멀미에도 효과가 좋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경정은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만든 멀미약을 보자마자 황후 마마가 떠올랐다.
‘무려 사천당가 소가주이신 철한 형님이 만드신 약이다. 분명히 효험이 있겠지? 가져가서 황후 마마께 점수나 따야겠다.’
경정은 웃으며 당철한이 내미는 약병을 받아 소매 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당철한 소가주님.”
“맞습니다. 저는 사천당가의 소가주인 당철한이니 기억해 주십시오.”
당철한 역시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 몰랐다.
마차에서 나온 제갈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친우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앞으로 나섰다.
“소의 마마께서는 괜찮으시니 걱정 하지 말게.”
제갈원의 한마디에 모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를 노려봤다.
남궁후가 이를 보며 참지 못하고 달려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소의 마마. 듣자 하니 오늘 도성에서 연등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같이 가서 연등축제를 구경하시겠습니까?”
“연등축제라고요?”
“모르셨습니까? 일 년마다 여는 큰 축제인걸요.”
“몰랐습니다. 그리고 연등축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도 없습니다.”
어릴 때는 축제를 즐길 형편이 안되었고 커서는 황궁에 들어와 살아남기 바빴으니 연등축제 같은 것을 볼 시간이 없었다.
경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풍죽오우 네 사람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의 마마님. 저 당철한이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도성 안에 남궁세가가 운영하는 다루가 있으니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곳보다는 무림맹 지부로 가는 것은 어떠합니까? 안전하게 소의 마마님을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 세가의 본가가 바로 도성 안에 있습니다. 가문의 누각에서 보면 연등축제를 편히 앉아서 구경할 수 있으니 저희 본가로 가시지요.”
경정은 미쳐 날뛰는 풍죽오우를 보며 당황했다.
원생에서 모두 그녀가 잘 알고 지낸 자들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풍죽오우의 행동이 수상했다.
‘내가 모르는 젊은 시절의 모습인가? 참으로 어색하네.’
경정은 풍죽오우를 뒤로하고 고정엽을 바라봤다.
고정엽이 말에서 내리더니 거침없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노한 것 같은 고정엽의 모습을 본 경정은 그제야 자신이 풍죽오우와 너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다.
경정은 화사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괘씸한 풍죽오우를 혼내주러 가던 고정엽은 경정의 맑은 미소를 보며 걸음을 멈췄다.
경정은 어찌하면 황제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눈이 커졌다.
‘아! 맞다. 그걸 까먹고 있었다.’
경정은 마차로 걸어가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고정엽은 경정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폐하. 지난밤에 제가 취해서 폐하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갔나이다.”
경정은 두 손으로 고정엽의 요대를 들고 그것을 고정엽에게 건넸다.
사내의 요대를 들고 서 있는 여인이라.
그것을 본 풍죽오우 네 명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백소의. 혹시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가?”
경정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답했다.
“사실은 신첩이 너무 취해서 그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폐하의 요대가 제 손안에 들려있는 것을 보면 필시 제가 폐하께 주사를 부린 것이겠지요?”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고정엽은 경정이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니 무척 기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정의 속마음은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까 봐 걱정됐다.
“폐하.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강호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두 분 마마님께 누가 되지 않으려면 빨리 환궁해야 하옵니다.”
“백소의는 연등축제가 보고 싶지 않소?”
경정은 품 안에 지닌 암어 풀이 집을 떠올리며 웃었다.
“아니요. 당장 궁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고정엽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정이 자신을 궁에 데리고 가달라고 말하자 꽁꽁 얼어 있던 고정엽이 심장이 녹기 시작했다.
고정엽은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분들이 폐하와 신첩을 이곳까지 호위해 주셨는데 마지막 인사는 드려도 되겠지요?”
“그래. 나와 함께 가자꾸나”
고정엽은 일부러 경정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옆에 섰다.
경정은 고정엽의 손길이 불편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풍죽오우에게 인사를 했다.
풍죽오우는 경정과 고정엽의 정이 넘치는 대화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벽서온 맹주님.”
경정이 벽서온을 부르자 그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맹주께서는 청야산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청야산이라고요? 예. 알다마다요. 그런데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어제 갇혀 있다가 들은 것인데 청야산에서 사람을 팔고 사는 흑시(黑市)가 열린다고 합니다. 무림맹에서 한번 알아봐 주시어요. 강호의 일이라서 관군들이 처리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소의 마마.”
벽서온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경정의 명을 따르고 있었다.
경정은 이제는 고개를 돌려 당철한을 바라봤다.
“당철한 소가주님.”
“예. 소의 마마님.”
“사천당가 가주님은 잘 계십니까?”
“제 아버님을 아십니까?”
“과거에 인연이 있어. 한번 뵌 적이 있지요. 당 가주께서는 무탈하시죠?”
“그럼요. 잘 계시다마다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경정은 언젠가 당소소를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벽과 만나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철한과 인연이 생겼으니 당벽을 만나는 일은 수월할 것이었다.
경정은 마지막으로 제갈원을 보며 예를 올렸다.
“오늘 함께 문제를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말로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분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경정은 풍죽오우에게 인사를 마치고 고정엽의 곁으로 가서 찰싹 붙었다.
“폐하. 어서 궁에 돌아가요.”
고정엽은 환하게 웃는 경정을 보며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고정엽이 경정에게 손을 내밀자 경정은 그의 손을 잡았다.
고정엽은 그녀를 안아 들어 말에 먼저 태우고 자신도 말에 올랐다.
고정엽과 경정이 함께 말을 타고 사라지자 풍죽오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당철한이 입을 열었다.
“나만 그리 생각하는가? 소의 마마께서는 녹주와 얼굴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닮은 것 같네. 어찌 이런 일이 있지?”
벽서온과 제갈원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눈빛이 공허해 보였다.
남궁후만이 입술을 깨물며 안달복달했다.
“소의 마마께서는 왜 나한테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거야? 대체 왜?”
남궁후는 경정의 마지막 인사를 못 받은 것이 서운한지 울상이 되었다.
***
청초각의 후원에 경정과 고정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정은 고정엽이 이곳까지 따라오리라 생각지 못했는지 어서 돌아가라 말했다.
“어서 건청궁으로 돌아가십시오. 폐하께서 암행을 나가셨다는 사실이 퍼지면 좋을 것이 없습니다.”
“백소의.”
고정엽이 다가와 경정의 손을 잡았다.
경정은 오늘따라 황제가 왜 이러나 싶었다.
“내가 미안하다. 백소의.”
“폐하가 미안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악부생이라는 비적 놈이 문제였지요.”
“어제 백소의가 술에 취해 내게 한 말을 다 기억하고 있다. 정말 미안하구나.”
“어머! 역시 제가 폐하께 주사를 부린 것이 맞죠?”
경정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탓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주사를 부린 거길래 폐하께서 이토록 놀라신 것이야?’
경정은 자신이 술에 취해 뭐라고 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답답했다.
“되었다. 백소의.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경정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고정엽은 그런 경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라. 황명이다.”
“쳇. 폐하께서는 꼭 할 말이 없으시면 황명 핑계를 대시더군요.”
“그래. 내 장기다.”
경정은 고정엽이 농을 하자 그제야 웃었다.
“폐하. 조심히 가시어요. 내일 건청궁에 신첩이 찾아가겠습니다.”
경정은 고정엽을 보내고 청초각 안으로 들어왔다.
***
당소소는 청초각에 만들어놓은 약방 안에서 단약을 만들고 있었다.
경정이 들어오자 당소소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소의 마마님?”
경정은 당소소를 보자 긴장이 확 풀렸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당재인 마마님.”
경정은 아무 의자나 앉아서 긴 숨을 토해냈다.
“소의 마마님. 왜 그리 힘들어하십니까? 혹시 강호에 나갔던 일이 잘못되었나요?”
“아뇨. 잘못되긴요. 아주 아주 좋았습니다.”
경정의 이번 강호행은 운수대통이라 불릴 만했다.
그녀의 목적대로 제갈원을 만나 암어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 자를 푸는 방법을 얻지 않았는가?
또한 풍죽오우와 친분을 쌓았기에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아! 맞다. 악부생이 알려준 보물도 있었지.’
경정은 악부생이 녹림왕의 보물을 훔쳐서 감춰둔 곳까지 알게 되었다.
경정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와서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인 마마.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그간 황궁에는 별일 없었죠?”
“이틀입니다. 이틀간 무슨 일이 있으려고요.”
경정은 당철한이 준 약이 떠올라 소매 안에서 흰 약병을 꺼내 당소소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약으로 유명한 강호 문파의 소가주께서 제게 주신 약입니다. 멀미에 효과가 있다고 하니 한번 보실래요?”
당소소가 경정이 건넨 약병을 확인했다.
“와. 뭐가 들었길래 이런 향이 나는 걸까요? 한번 확인해 볼까요?”
당소소는 서랍을 열고 약병에 넣어 확인할 침을 꺼냈다.
서랍을 닫으려던 당소소가 멈칫하더니 그 안에서 약방문을 꺼냈다.
“어? 이것은 무엇이지? 내가 쓴 약방문이 아닌데?”
“뭔데 그리 놀라십니까?”
경정이 놀라 당소소의 곁으로 다가왔다.
약방문을 읽던 당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약이길래 파초(芭椒)를 이리 많이 넣는 걸까요?”
“파초가 무엇입니까?”
“이뇨제와 해열제 기능을 하는 약초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약방문의 파초는 과하게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아니 되는데······.”
“왜요? 그렇게 먹으면 탈이 납니까?”
“파초는 아주 잘 써야 합니다. 찬 성질의 약이라서 회임한 사람이 복용하면 아이를 잃을 수도 있어요.”
“뭐라고요?”
경정은 당소소의 손에서 약방문을 빼앗았다.
당소소는 모르는 약방문이라고 하는데 글씨체가 당소소의 것과 닮아 있었다.
“정말 재인 마마께서는 모르는 약방문이라는 거지요?”
“그럼요. 제가 쓴 약방문이라면 이런 약을 만들지 않겠지요.”
경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경정은 차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재인 마마님.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간 있었던 일이요?”
“예. 제가 궁금해서요.”
당소소는 경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정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당소소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경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의 마마님. 왜 그러세요?”
“좀 피곤해서요.”
“그러시겠지요. 어서 가서 주무세요. 내일 아침 일찍 황후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셔야 하잖아요.”
처소로 돌아온 경정은 주위에 아무도 없자 눈빛이 돌변했다.
‘감히 내가 자리를 비운 이틀 동안 일을 꾸며? 이것은 필시 나와 화빈을 노린 계략이다. 화빈에게 파초를 먹여 유산시키고 그것을 청초각에 뒤집어씌우려고 해?’
경정은 오늘 잠을 자지 않고 암어를 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암어를 풀 시간이 없었다.
‘후궁들의 암투에 응하느라 무공을 익힐 시간이 없다. 이게 말이 돼?’
경정은 결심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리라.
다시는 더러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