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에 나간 보상을 얻다.
경정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어제 술에 취해 정신을 놓고 검을 휘둘렀구나.’
경정은 제갈원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제갈 공자님. 혹시 저를 납치한 비적들은 깨어났습니까? 그들이 무명객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아뇨. 한 놈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아무래도 그들이 연근산을 너무 많이 들이마셔서 정신착란 상태에서 무명객을 상대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경정은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자신은 이제 황궁으로 돌아갈 테니 무림맹에서 그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강호 이야기는 잘 모르시겠죠?”
“예. 그렇지요. 저는 후궁이니까요.”
경정의 입에서 후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제갈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경정은 그제야 자신이 사내들과 너무 가까이서 말을 섞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정은 고개를 돌려 고정엽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고정엽은 구석에서 당철한, 남궁후와 함께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경정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닫았다.
경정은 고정엽을 보며 말했다.
“폐하. 신첩이 책 속에서만 보던 강호인을 실제로 만나 너무 들떠 있었나 봅니다. 폐하께 불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경정이 후궁,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말하니 풍죽오우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
고정엽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친우들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백소의는 고개를 들어라.”
“예. 폐하.”
“소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은 내가 했지.”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의는 내 곁으로 오라.”
“예. 그리하겠나이다.”
경정이 고정엽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자 풍죽오우는 모두 검을 빼 들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고정엽은 경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의. 이제 환궁해야 하네.”
“벌써요?”
“태후께서 이틀이라는 시간을 벌어다 주셨네. 이곳에서 도성까지 반나절은 가야 하니 지금 떠날 수밖에.”
“아. 그렇군요.”
경정은 암어(暗語)를 풀어줄 사람이 지척에 있는데 이곳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악부생. 이 나쁜 놈 같으니라고. 네놈만 아니었으면 제갈 책사님을 더 일찍 만나 암어에 관해 물어봤을 것이 아니냐! 이 나쁜 놈아.’
경정은 악부생의 목을 그녀의 손으로 베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하지만 고정엽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사심을 채우려고 황제를 잡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경정은 평생 황궁과 무림맹에서 명령을 받들던 자로 살아왔다.
경정은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주의였기에 황제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폐하. 신첩이 명을 따르겠나이다.”
고정엽은 단숨에 답하는 경정의 모습을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풍죽오우는 경정이 이렇게 빨리 떠날지 몰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고정엽과 경정이 나가고 경당 안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고요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제갈원이 녹경에게 물었다.
“경아. 소의 마마께서는 괜찮으신 것이냐? 어제 피를 많이 뒤집어쓰셨던데?”
“원이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다른 사람의 피였습니다. 다만 꽃같이 살아왔을 내명부의 후궁이 강호의 유혈이 낭자한 싸움에 끼었으니 정신적인 충격은 조금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제갈원은 경정이 걱정되어 눈빛이 어두워졌다.
당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내명부의 후궁은 무슨. 고정엽과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남궁후도 당철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네. 어제 소의께서 그 일로 정엽에게 주사를 부리지 않았는가? 왜 자기를 속였냐고 말일세.”
“이것은 소의 마마도 원해서 후궁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네. 고정엽 이 나쁜 놈이 억지로 후궁을 만든 것이겠지.”
당철한과 남궁후가 서로 떠드는데 녹경이 나섰다.
“이보세요. 오라버니들.”
녹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녹경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의 마마님이 녹주 언니를 닮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요? 대체 왜들 그러십니까?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소의 마마님은 내명부의 후궁이시고. 정엽 오라버니는 그런 소의 마마님을 끔찍이 아끼시죠.”
녹경이 말을 마치자 경당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의 말이 모두 옳았다.
두 남녀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지만 그래도 황제와 후궁의 사이가 아닌가?
그들이 끼어들 틈은 전혀 없었다.
그때 조용히 제갈원이 일어섰다.
제갈원은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벽서온이 놀라서 제갈원에게 물었다.
“원아. 뭘 하려고?”
“급한 일이 생겨서 하산하려고 한다.”
“하산? 어디로 가려고? 무슨 급한 일인데 그래?”
제갈원은 말없이 경당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남은 풍죽오우 세 명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도 가봐야겠구나.”
“경아. 스승님을 네가 잘 모셔야 한다. 다음에 또 들르마.”
“나도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구나.”
녹경은 제갈원을 따라 발에 땀이 날 정도로 달려가는 풍죽오우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녹주 언니. 오라버니들은 여전히 언니를 잊지 못했나 보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녹경은 웃다가 어느새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나도 언니의 죽음에 대해 다시 알아보아야 겠다.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아.”
***
영화산 아래로 내려온 경정은 엄세록이 구해온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말을 타고 가고 싶었으나 고정엽이 절대 안 된다며 마차를 고집했다.
경정도 어제의 일로 심력을 쓴 터라 차라리 마차 안에서 쉬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세록이 구해온 마차는 경정이 푹 쉴 수 있을 정도로 큰 마차였다.
경정은 자신을 위하는 스승님의 배려에 감사했다.
경정은 마차에 올라 기대앉아 쓴웃음을 흘렸다.
“제갈 책사님을 만났는데 암어에 관해 물어보지도 못하고. 이번 강호행은 망했다. 망했어.”
경정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고정엽과 제갈원이 아는 사이이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고정엽은 다시는 경정을 데리고 풍죽오우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경정이 생각에 빠져있는데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경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에 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눈에 익은 네 사람이 고정엽과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벽서온. 자네는 왜 여기에 있나? 무림맹이 있는 무안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고정엽이 놀란 눈으로 벽서온에게 물었다.
벽서온은 청풍 단주, 운평에게 명을 내렸다.
“운평. 먼저 무림맹으로 돌아가라. 나는 개인적으로 할 일이 생겨 휴가를 앞당겨 써야겠다.”
“예. 맹주님. 명 받들겠습니다. 그동안 휴가도 없이 일하셨으니 장로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마차 안의 경정은 화들짝 놀랐다.
‘맹주께서 휴가를 쓰신다고? 함께 일했던 칠 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으며 일만 매진하던 분이셨는데?’
고정엽도 놀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벽서온. 자네의 개인적인 일이 설마 나를 따라오는 건가?”
“자네를 따라온 금의위가 어제 악부생에 의해 다 죽지 않았나? 당연히 호위할 사람이 필요할 터. 내가 해주겠네.”
“내가 무림 맹주인 자네의 호위를 받는다고?”
“자네는 지엄하신 황제이니 내가 호위를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관무불가침은 어쩌고?”
“뭐든 예외는 있는 법이네.”
“그런데 자네 말이네.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맹주로 있다 보니 말이 늘더군. 꼬장꼬장한 무림맹 장로들을 상대하려면 말이야.”
벽서온은 고정엽의 안색이 어찌 변하든 상관하지 않고 그의 말을 가마 옆으로 대령하고 섰다.
당철한과 남궁후는 원래도 자유롭게 강호를 돌아다니는 자들이니 왜 따라오냐는 고정엽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때 경정이 탄 가마 문이 열리더니 제갈원이 들어왔다.
고정엽은 허락도 없이 가마를 탄 제갈원을 보며 소리쳤다.
“이보게. 제갈원! 뭐 하는 건가?”
“고정엽 미안하다. 하지만 자네도 잘 알고 있듯이 내가 말을 타지 못한다. 그러니 마차를 탈 수밖에.”
“아예 타지 않는 수도 있네.”
“아니 되네. 나도 북경에 가야 하니 신세 좀 지겠다.”
제갈원은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조용히 마차의 문을 닫았다.
제갈원을 보며 벽서온, 당철한 그리고 남궁후는 말을 타고 온 것을 후회했다.
백소의의 옆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했는데······.
저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했는데······.
고정엽은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반평생을 함께 지낸 친우가 아니라 원수 같은 놈들이었다.
그때 마차 안에서 경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어서 길을 재촉하시지요. 저녁 전에는 궁에 도착해야 합니다.”
“소의 괜찮겠소? 차라리 나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것은 어떻소?”
고정엽이 경정에게 함께 말을 타고 가자고 하자 풍죽오우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를 쳐다봤다.
경정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수는 없지요. 엄 도통께서 힘들게 구해오신 마차인데 신첩은 이것을 타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제갈 공자께서는 폐하의 친우시니 제가 함께 모시고 가겠습니다.”
경정은 말을 마치고 창문을 확 닫았다.
고정엽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가자.”
“예. 폐하.”
마차 안의 경정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갈원이 함께 마차를 타고 있다니 이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제갈원은 떨리는 손을 꼭 쥐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가 출발하고 얼마가 지났을까?
경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갈 공자님.”
제갈원이 깜짝 놀라며 눈을 똥그랗게 떴다.
막상 마차에는 올라탔는데 차마 경정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서훈 선생님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출중하시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경정이 칭찬하자 제갈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하귀재(天下鬼才)라 불리신다지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찌 그런.”
경정은 원생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겸손한 제갈원을 보며 웃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제갈원이 환장하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
경정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제갈원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가는 길이 멀어 적적할 텐데 말입니다. 제가 문제 하나를 내어드릴 테니 풀어보시겠습니까?”
***
무림 맹주 벽서온.
사천당가 소가주 당철한.
제갈가의 자랑이자 천재라 불리는 제갈원.
남궁세가의 둘째 공자 남궁후.
그리고 일국의 군주이자 지엄하신 황제 폐하인 고정엽과 그의 후궁인 백경정.
이 말도 안 되는 신기한 조합을 바라보는 이는 바로 엄세록이었다.
엄세록은 행렬의 가장 뒤에서 말을 몰며 고정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고정엽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내내 가마만 쳐다보고 있었다.
벽서온과 당철한 그리고 남궁후 역시 가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엄세록은 당최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왜 저러시는 거지? 도저히 모르겠네. 어제 소의 마마께서 큰일을 당할 뻔하셔서 죄책감이 들어 그러시는 것인가?’
엄세록의 눈치로는 아마 백 년이 지나도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한편, 가마 안에 들어있는 경정은 제갈원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대단하십니다. 어찌 이것을 단박에 알아내신 것입니까? 역시 천하귀재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으십니다.”
가마 안에는 경정이 방금 지필묵으로 쓴 암어가 쓰인 종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종이는 총 열두 장.
경정이 일부러 열쇠 글자가 숨겨져 있는 앞줄만 각각의 종이에 풀어 써 놓은 것이었다.
무공 비급을 숨기기 위해 앞줄만 달달 외워 온 것인데 제갈원은 천하귀재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것을 단박에 풀어 버렸다.
“이것은 십이지(十二支)를 이용한 암어입니다.”
“십이지라고요?”
“자세히 보시지요. 우리가 쓰는 글자가 아닌 것 같지만 십이지의 시작인 자(子)와 축(丑)을 합친 글자입니다.”
제갈원은 경정에게 어찌 암어를 해독하는지 상세히 설명해줬다.
경정은 그제야 지난날 풍죽오우와의 술자리에서 제갈원이 했던 말이 모두 떠올랐다.
‘그래. 이거였어! 이제야 기억이 났다.’
경정은 제갈원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자신의 앞에 놓았다.
“공자님의 설명을 들으니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풀어서 보라는 말씀이시지요?”
경정은 제갈원이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다른 종이에 쓰인 암어의 열쇠 자를 빠르게 유추해냈다.
제갈원은 하나를 가르치니 열을 알아듣는 경정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녹주와 얼굴만 닮은 줄 알았더니 총명한 것까지 빼닮았구나. 이렇게 똑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찌 둘이 있을 수가 있지?’
경정은 제갈원이 자신을 눈이 빠지도록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암어 풀이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되었다. 이제 궁으로 돌아가면 신비에 싸인 무공 비급이 내 손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으하하.’
경정은 너무나도 기뻐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