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의의 비밀이 밝혀지다.
장정만한 흑부(黑斧)를 등에 멘 털북숭이 사내를 떠올린 경정은 소름이 끼쳤다.
‘그놈은 녹림왕을 배신한 악부생(惡斧生)이 틀림없다. 어찌 저런 극악무도한 자가 영화산에 있단 말인가?’
경정과 섭이라는 소년은 지금 영화산 북쪽에 있는 장원에 갇혀 있다.
경정이 정자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비적 놈들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적이 아니었다.
녹림채의 정예부대답게 실력이 뛰어났다.
정자에 남아있던 금의위는 경정을 지키기 위해 비적들에게 맞섰으나 곧바로 제압당했다.
놈들이 벽력탄같은 흉흉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정은 섭을 데리고 도망칠 수 없어 결국 비적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경정은 끌려 오면서 당소소가 줬던 물건을 봇짐에서 꺼내 몰래 품속에 챙겼다.
아깝지만 배앓이 약 같은 것은 모두 버리고 가장 쓸모가 있을 독과 해독제 그리고 연근산 가루만 챙겼다.
경정과 섭을 영화산 북쪽의 장원에 데리고 간 비적들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장원에 만들어놓은 사설 감옥에 집어넣었다.
악부생이 왜 이곳 영화산에 있는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경정을 지키고 있던 비적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숨어 있어야 하는 거요?”
“녹림왕의 추격이 거세다. 우선은 숨을 수밖에.”
“비적질하려고 녹림도가 되었지. 도망을 다니려고 녹림도가 된 것이 아니외다.”
젊은 비적은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말했다.
옆에 앉은 늙은 비적이 젊은 놈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녹림도다. 관군에 쫓기든 녹림왕에게 쫓기든 그것이 그거지. 뭔 잔소리가 그리 많아? 그리고 부채주께서 네 놈의 말을 들으시면 네 목이 성할듯싶으냐?”
“부채주는 무슨! 이미 녹림 산채에서 쫓겨났는데 무슨 부채주라는 거요?”
“너는 그 방정맞은 입 때문에 한번은 경을 치를 거다.”
“어차피 내 목숨이니 상관 마시오. 그나저나 오늘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좀 살 것 같소.”
“그래서 한 놈도 살리지 않고 목을 벤 것이냐? 몇몇은 좀 살려뒀어야지.”
“형님도 보셨지 않소? 놈들의 무공이 심상치 않았소이다. 혹시 녹림왕이 보낸 간자일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딱 봐도 정파의 무공이 아니냐? 영화산에 고인(高人)이 산다고 하니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온 정파 나부랭이 놈들이겠지.”
“그럼, 저 여리여리하게 생긴 놈들은 왜 살려둔 것이오?”
두 비적 놈들이 고개를 돌려 경정과 섭을 쳐다봤다.
경정은 섭을 등 뒤로 보내고 그들을 노려봤다.
“어쭈. 쪼끄만 놈이 눈빛이 아주 사납구나. 손가락을 부러뜨려야 고개를 숙일 건가?”
방금 손이 근질근질하다고 했던 젊은 비적 놈이 칼을 들고 일어섰다.
‘오냐. 그래. 내 손가락이 부러지나? 아니면 네 손가락이 부러지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경정은 젊은 비적이 감옥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때를 기다렸다.
수십 명의 도적 떼라면 몰라도 눈앞의 두 명 정도는 거뜬히 해치울 수 있었다.
젊은 비적 놈이 감옥 열쇠에 손을 대는데 갑자기 그곳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경정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녹림왕의 책사인 황목 노인이구나.’
황목 노인은 녹림왕의 책사였으나 악부생과 함께 그를 배신하고 지금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경정이 무림맹원이 되던 해에야 도망자였던 악부생이 녹림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녹림왕은 몇 년 동안 악부생을 사로잡지 못해 결국 전국의 녹림도를 동원한 천라지망을 펼친 뒤에야 그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악부생의 몇 년 동안이나 녹림왕을 피해 도망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여기 있는 황목 노인 때문이었다.
‘비적 놈들 주제에. 책사까지 있다니. 우습구나.’
황목 노인이 들어오자 젊은 비적이 깜짝 놀라 감옥 문에서 손을 뗐다.
황목 노인은 그 모습을 보며 냉소했다.
“열어라.”
“예?”
“문을 열라 했다.”
조금 전까지 손가락을 부러뜨리네! 마네 했던 혈기 왕성한 젊은 비적은 머리가 하얗게 센 황목 노인을 두려워하며 문을 열었다.
경정은 어찌 된 상황인지 살피며 긴장했다.
황목 노인은 네 명의 비적 놈들과 함께 들어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손에 커다란 대접이 들려 있었다.
접시에 가득 담긴 붉은 피를 본 경정은 속이 울렁거렸다.
“그 더러운 피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경정이 쏘아붙이자 황목 노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사로잡힌 주제에 말이 많구나. 이것들을 잡아라.”
“예. 어르신.”
비적들이 들어오더니 경정과 섭이의 양팔을 붙잡고 무릎 꿇렸다.
경정은 황목 노인이 피를 가지고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해 답답했다.
‘녹림왕을 피해 혈교에 투신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왜 저러는 것이야?’
황목 노인은 우선 섭이의 팔을 걷어붙이더니 접시 위의 붉은 피, 한방울을 소년의 손목에 떨어뜨렸다.
붉은 피가 안쪽 팔에 떨어져 그대로 몽우리가 졌다.
그것을 본 황목 노인이 기뻐했다.
“동정(童貞)을 지니고 있구나.”
“어르신. 동정이면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이 소년은 얼굴도 수려하고 나이까지 어리니 노리는 놈들이 많을 것이다.”
황목 노인은 섭이를 뒤로하고 경정의 앞에 섰다.
경정은 그제야 자신들을 해치지 않고 잡아 온 비적들의 의도를 알고 몸서리쳤다.
경정은 앵무새 피를 이용해 후궁들이 잠자리 경험이 있는지를 확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였던 그가 이것을 경험하게 될지 몰랐기에 경정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우리를 청루에 팔려는 거냐?”
“이놈은 말이 많구나. 대체 죄인을 어찌 다스린 것이냐?”
“어르신. 송구합니다.”
경정의 팔을 잡고 있던 비적이 우악스러운 손을 들어 경정의 뺨을 내리쳤다.
경정은 너무 아파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황목 노인이 손짓하자 비적 놈이 경정의 팔을 걷어붙였다.
눈처럼 새하얀 경정의 팔이 드러나자 황목 노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속살이 깨끗하구나. 동정을 지니고만 있다면 필시 원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경정은 속으로 뜨끔했다.
‘나는 폐하와 동침한 몸이다. 분명 동정이 아닐 텐데.’
그 순간, 경정의 팔 안쪽에 붉은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차가운 핏물이 닿자 경정은 몸서리쳤다.
경정은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놈도 동정이구나. 하하하.”
황목 노인의 말에 경정은 놀라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정말로 앵무새 피가 떨어지지 않고 팔뚝 안쪽에 뭉쳐져 있었다.
경정은 놀란 눈으로 황목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소. 다시 한번 해보시오.”
황목 노인은 경정의 말이 황당하다고 여겼는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보시오? 내가 동정일 리가 없는데? 그거 앵무새 피가 맞긴 하오?”
경정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궁 백경정은 승은 상궁이 되어 궁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십 년을 버텼다.
승은을 입지 않았다면 진작에 나이가 차서 출궁했을 텐데 뭣도 아닌 승은 상궁이란 품계를 달고 지옥 같은 황궁에서 무려 십 년을 보낸 것이다.
말년이 행복했으면 말을 안 한다.
총애를 얻었다고 그녀의 궁 생활이 행복했을까?
백치라 불린 그녀였다.
아마도 내명부의 계략과 암투에 당하며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경정은 갑자기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제 일도 아닌데 자신이 당한 것처럼 화가 났다.
황목 노인은 경정의 위태로운 분위기를 보지 못하고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저것들을 깨끗이 씻겨 오늘 밤에 청야산 흑시로 데리고 간다. 흑시를 운영하는 흑도방의 방주가 어린 사내를 좋아하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사내를 좋아한다고요?”
젊은 비적이 놀라서 되물었다.
황목 노인은 어리숙한 젊은 비적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네놈이 잘 모르는구나. 사내에게만 몸이 반응하는 남자들도 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젊은 비적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스로 거세하고 황궁에 들어간 환관 놈들을 생각해보아라. 그들도 모두 황궁 안에서 사내를 품고 산다고 들었다. 변태성욕자들이지.”
“고자 놈들이야 그럴 수 있지요. 없는 놈들이니 얼마나 비뚤어졌겠습니까?”
“그만해라.”
저질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황목 노인은 순간 멈칫했다.
그들의 등 뒤로 섬찟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정은 가뜩이나 심경이 복잡한데 환관에 대한 욕까지 듣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뭐라고? 환관이 뭐 어쨌다고?”
경정은 그녀의 두 팔을 잡고 있던 비적들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경정의 힘에 떨어져 나간 비적들이 놀라 고개를 드는데 경정이 달려와 그들의 발등을 밟았다.
“아악!”
앓는 소리를 내며 비적들이 나뒹굴자 경정은 손날로 아파하는 비적들의 목울대를 쳤다.
“크헉!”
목울대가 터진 비적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경정은 재빨리 섭이를 잡은 비적 두 명도 같은 방법으로 해치워버렸다.
순식간에 감옥 안에 네 명의 장정들이 목에서 피를 토한 채 쓰러졌다.
“저. 저놈을 잡아라.”
황목 노인은 도망치려고 문으로 달려갔다.
경정은 엎어져 있는 비적의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노인에게 내던졌다.
“캭!”
황목 노인은 등에 비수를 맞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문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감옥을 지키고 있던 비적 두 명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에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경정은 전광석화처럼 감옥 밖으로 튀어나왔고 황목 노인의 등을 찌른 비수로 서 있는 늙은 비적의 발목을 갈랐다.
“으악!”
피가 분수처럼 치솟으며 늙은 비적의 몸이 고꾸라졌다.
경정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늙은 비적의 목을 그대로 베어 넘겼다.
젊은 비적이 홀로 남자 두려움에 떨었다.
경정은 재빨리 놈의 목울대를 쳤다.
손에 사정을 두었기에 다른 이들처럼 피를 토하며 쓰러지지는 않았다.
“우···. 우···.”
“왜 이래? 말할 수 있잖아.”
“살······. 살려주십시오.”
젊은 비적은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경정에게 사정했다.
“우선 손가락 하나만 부러뜨리고 시작하자. 큰 소리 내지 마라. 소리 지르면 두 개를 부러뜨릴 거야.”
“흡···.”
젊은 비적은 입을 꽉 다물었다.
피를 뒤집어쓴 경정의 모습은 마치 악신(惡神)과도 같았다.
***
정자에 도착한 풍죽오우는 주변에 쓰러져 있는 금의위를 보며 깜짝 놀랐다.
고정엽은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영화산은 예로부터 비적은커녕 심마니도 찾아오지 않는 명산이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백소의를 데려온 것이건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때 무림맹원과 엄세록이 함께 풍죽오우의 앞으로 달려왔다.
“폐하.”
“맹주님.”
엄세록과 무림맹원은 각자의 상사인 고정엽과 벽서온에게 상황을 고했다.
“영화산 북쪽의 녹가 장원을 비적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장원 주변에 맹원들이 매복하고 있습니다. 명을 내려 주시면 바로 치겠습니다.”
벽서온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가자. 내가 직접 진두지휘 하겠다.”
“예. 맹주님.”
벽서온이 나서는데 고정엽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가세.”
고정엽이 나서자 풍죽오우와 엄세록이 함께 말리고 나섰다.
“그대는 일국의 황제가 아닌가? 이런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그대는 엄세록 도통과 함께 자리를 피해 있게.”
“안돼. 그럴 수 없어.”
고정엽의 눈에 비적에게 사로잡혀 떨고 있을 가녀린 경정의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반드시 나도 따라갈 걸세. 말리지 말아.”
고정엽은 친구들의 팔을 뿌리치고 앞장서서 걸었다.
“이봐. 고정엽!”
풍죽오우는 어쩔 수 없이 고정엽의 뒤를 따랐다.
***
감옥 안에 젊은 비적이 엎어져 있었다.
그는 양 손가락이 부러졌고 고통을 이기지못해 실신한 상태였다.
경정은 젊은 비적을 고문해서 놈들의 정보와 장원의 구조를 파악했다.
“섭이라고 했지?”
“예.”
소년은 경정이 감옥 안에서 한 일을 모두 보았기에 꽤 놀란 눈치였다.
“우린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나를 잘 따라와야 한다.”
“비적이 총 서른 네 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일곱 명이 쓰러져 있으니 스물 일곱 명이 남았지요. 혼자서 어찌 해치우시려고요?”
“역시 총명한 꼬마구나. 걱정하지 마라. 다, 수가 있다.”
경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소년의 소매를 잡아 뜯었다.
소년이 흠칫 놀라 움찔했다.
경정은 자신의 소매도 잡아 뜯고는 비적들이 마시던 술을 뿌려 소매를 적셨다.
“이것으로 코와 입을 가려라.”
“혹시 독을 쓰시려는 겁니까?”
“독은 아니고 근육을 마비시키는 연근산이라는 것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마시고 우리 다리까지 풀리면 도망을 못 가지 않겠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예.”
소년은 술을 적신 천을 입과 코에 틀어막았다.
“잘했다. 내 등 뒤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경정은 소년을 자신의 등 뒤로 보내고 연근산 가루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