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251)

백소의, 소원을 말해봐.

태후의 어깨를 짓눌렀던 고통이 경정의 손길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후는 놀란 눈으로 경정을 쳐다봤다.

“태후 마마. 이곳은 견정혈(肩井穴)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뭉친 혈 자리를 풀어주지 않고 그냥 놔두시면 나중에 기운이 크게 상하십니다.”

“그래?”

“예.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곧은 척추와 어깨가 지지하고 있어서지요. 그러니 아픈 곳이 있다면 바로바로 풀어줘야 합니다. 뼈대가 상하면 건강한 사람도 쉽게 몸이 축나고 말지요.”

지금 경정이 주절거리는 것은 진짜였다.

그가 환관으로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신분이 높은 태감들에게 잘 보이려고 안마를 배운 적이 있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면서 인간의 혈 자리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지금은 단순한 안마의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태후는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백소의의 이름이 무엇이라 했지?”

태후가 이름을 묻자 경정이 앞으로 달려가 다시 예를 올리며 답했다.

“신첩은 백가 경정(倞挺)이라 하옵니다.”

“굳셀 ‘경’, 빼어날 ‘정’이라. 황제가 최근 들어 너를 총애하고 있다고 들었다.”

“총애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황궁의 다른 꽃 같은 여인들만 보시다가 소인처럼 미천한 여인을 보니 흥미로 가끔 찾으시는 것뿐입니다.”

경정이 자신을 낮추며 말하자 태후는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태후 마마. 제가 다시 어깨를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경정은 다시 태후의 등 뒤로 가서 진기를 실어 가며 그녀의 어깨를 만졌다.

태후는 겉으로는 점잔을 빼며 그만하라 하고 싶은데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좋구나.”

“아프시면 아프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소인이 잘 조절해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태후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보며 진상궁도 기뻐했다.

태후는 열심히 안마하는 경정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이 아이는 전혀 사심이 없는 것일까? 내명부의 여인들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에는 모두 칼을 숨기고 있다. 제아무리 순진한 여인이라 하더라도 궁에 들어와 살다 보면 모두 겉과 속이 다르게 변하고 만다.’

태후는 경정을 진심으로 믿어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경정에게 어깨를 맡기고 있던 태후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백소의. 너는 창천각에서 있었던 일을 어찌 생각하느냐?”

갑작스러운 태후의 질문에 경정은 다시 그녀의 앞에 가서 꿇었다.

“모든 것은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노비 춘벽과 영화궁의 수령 태감이 짜고 너와 엄세록 도통을 음해했다. 너는 이 일로 화빈을 의심하지 않느냐?”

“소인이 어찌 화빈 마마께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흠. 그래?”

태후는 경정이 춘벽과 서개가 꾸민 계략을 완벽히 돌려줬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경정은 태후 마마께 점수를 따둬야 앞으로의 궁 생활이 편할 것임을 알고 있기에 태후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골라 했다.

“모든 것은 미천한 소인이 가당치도 않게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어서 그런 것일 테지요. 그러니 모두 소인의 잘못이 맞습니다.”

경정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태후는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다.

“백소의는 참으로 착하고 어진 성품의 아이로구나.”

“과찬이십니다. 태후 마마.”

경정은 그녀를 자애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태후를 보며 생각했다.

‘되었다. 내명부의 가장 윗전인 태후 마마의 마음에 들었다.’

안마를 끝내자 태후가 경정을 가까이 오라 불렀다.

“네가 기특해서 주는 선물이다. 받아라.”

태후는 손에 차고 있는 새빨간 홍옥으로 만든 팔찌를 빼서 경정에게 건넸다.

경정은 저 홍옥 팔찌를 알고 있었다.

태후가 살아생전 가장 아끼던 팔찌였다.

“태후 마마. 신첩이 감히 어찌 이것을 받겠습니까?”

“받아라.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태후는 주저하는 경정의 손에 직접 홍옥 팔찌를 끼워줬다.

경정은 자신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팔찌를 보며 생각했다.

‘너무 아양을 떨었나? 태후께서 나를 너무 총애 하시는데?’

태후는 당황해하는 경정의 표정 또한 마음에 들었다.

‘아주 괜찮은 아이군. 마음에 들어.’

***

진귀인은 화빈과 백소의의 소식을 듣고서 심기가 불편했다.

시녀 진양이 진귀인을 보며 말했다.

“화빈의 배 속 아이는 무사하지만 아직 금족령은 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화빈의 계략임이 드러났으니 필시 폐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옵니다.”

“이미 끝났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마님.”

“내가 괜히 급하게 손을 댔구나. 화빈의 아이도 처리하지 못하고 괜히 면죄부를 쥐여준 꼴이 되었다.”

진귀인은 화빈의 신발을 건드린 일이 수포가 되자 아쉬워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후가 목격했으니 분명 그것이 그냥 사고가 아님을 알아챘을 터.

“화분혜의 굽을 부러뜨린 시녀는 처리하였느냐?”

“일이 터지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가 죽였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그 일과 마마님을 엮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럼, 되었다.”

진양은 괜히 경정에게 욕을 하며 분을 풀었다.

“이것은 모두 백소의 그 천한 것 때문입니다. 하필 왜 그곳에 있었으며 뭐하러 몸을 날려 화빈을 구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놔뒀다면 화빈은 넘어져서 아이를 잃고 백소의도 자신을 음해한 화빈에게 복수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진귀인도 그것이 제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소의가 화빈을 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녀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주인을 섬기는 노비로 평생을 살아왔으니 저도 모르게 움직인 것이겠지. 되었다. 머리가 아프니 그 이야기는 그만해라.”

“예. 마마님.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 일을 어찌 헤쳐가야 할지 고민했다.

***

경정이 화빈을 구한 사실이 황궁 전체에 퍼졌다.

모두가 화빈에게 모함을 받은 백소의가 위험을 무릅쓰고 화빈을 구한 것이 대단하다 칭송했다.

궁녀와 환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궁에 출입하는 문무백관들까지도 백소의라는 후궁을 알게 될 정도였다.

경인궁(景仁宮)에 황제 고정엽이 들어왔다.

고정엽은 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모후(母后). 백소의를 따로 부르셨다지요?”

“그것 때문에 눈썹이 휘날리도록 태후궁으로 달려온 것입니까? 황제?”

“아닙니다. 모후께 문안 인사를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십시오. 얼굴에 다 쓰여 있습니다.”

“역시 모후를 속일 수가 없네요.”

고정엽은 태후 앞에서 바보처럼 웃었다.

태후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황제가 백소의란 아이를 왜 그리 총애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더이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고정엽은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태후가 백소의를 따로 태후궁에 불렀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창천각에서 그 사달이 나고 화빈에게 금족령이 떨어진 것은 알고 보면 갑자기 총애를 얻은 백소의 때문이 아닌가?

“백소의는 궁중의 여인처럼 영악하게 굴지 않더군요.”

“맞습니다. 소자도 백소의의 그런 깨끗하고 꾸밈없는 마음씨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처럼 너무 백소의 한 사람만 총애하지 마세요.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모후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고정엽은 다시 태후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 나는 백소의의 일은 더는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다 해결이 되었는데 왜 그리 쳐다보는 것입니까? 다른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정엽은 태후에게 서신을 건넸다.

태후는 서신에 찍힌 낙관을 보고 흠칫 놀랐다.

“서훈 선생께 온 서신입니까?”

“그렇습니다. 모후.”

고정엽은 어린 시절, 명망 있는 유학(儒學)자이자 대학사까지 지낸 서훈 선생의 아래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스승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생명이 위태롭지는 않으나 제자를 그리워하고 계셔서 스승님의 아드님께서 참지 못하고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당시 함께 공부했던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인가요?”

“예. 소자는 물론 함께 공부한 동무들도 지금 영화산으로 가는 중일 겁니다.”

태후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고정엽이 이토록 바르고 어질게 자란 것은 모두 서훈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산이면 도성과 지척이니 이틀이면 되겠습니까?”

태후의 말에 고정엽의 눈이 커졌다.

“예. 이틀이면 영화산에 올라 스승님을 뵙고 올 수 있습니다.”

“황제가 없는 동안 황궁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황제는 걱정하지 말고 선생께 다녀오십시오.”

“소자 어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는 무슨요. 어서 짐을 꾸려서 오늘 저녁에 떠나십시오. 금의위도 꼭 데리고 가십시오. 영화산이면 큰 위험은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정엽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태후궁 밖으로 나왔다.

소공공이 고정엽에게 물었다.

“폐하. 지금 당장 건청궁으로 드시겠습니까?”

고정엽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답했다.

“청초각으로 먼저 가자꾸나.”

***

경정은 지금 암어(暗語) 풀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경정이 서재에서 암어와 씨름하고 있는데 열음이 웃으며 들어왔다.

“마마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폐하가 오셨다고?”

경정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는데 어찌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신 것이지?”

경정은 보고 있던 책을 서랍 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처소에는 이미 고정엽이 들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신첩이 폐하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경정이 무릎을 굽히고 사죄하자 고정엽이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기별도 없이 온 것은 나다. 내 옆으로 와 보아라. 백소의.”

“예. 폐하.”

경정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한 채 고정엽의 옆에 가서 앉았다.

“나는 일이 있어서 이틀간 황궁을 비워야 한다. 그래서 오늘 저녁 수라를 너와 들지 못할 것 같구나.”

경정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황제가 궁 밖으로 나가는 일은 꽤 큰일로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다.

최근에도 변방의 군 시찰과 태관묘에 다녀왔으니 당분간은 황궁에 머물러야 할 터였다.

‘어디를 가시는 것이지?’

경정은 궁금했지만, 꾹 참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정엽은 경정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떠나기 전에 백소의에게 상을 내리고 싶다.”

“상이라고요? 왜요?”

“내가 주고 싶으니까.”

경정은 지금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어찌 암어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신첩은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촉금 비단은 어떠하냐?”

“괜찮습니다. 폐하. 촉금 비단은 많이 진상되지 않으니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 그리고 다른 윗전들께 가야 합니다.”

“그럼, 산호로 팔찌를 만들어줄까?”

“태후께서 주신 홍옥 팔찌가 있는데 어찌 다른 것을 탐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고정엽은 모두 사양하는 백소의를 보며 그녀의 마음씨가 참으로 곱다 여겼다.

그때 소공공이 들어 고정엽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전했다.

“폐하. 엄 도통께서는 준비를 마치셨다고 합니다. 최정예 호위 열 명을 대령했다 하니 함께 영화산으로 떠나면 됩니다.”

“그래. 알았다.”

소공공의 말을 들은 경정의 눈이 커졌다.

‘영화산? 혹시 서훈 선생께서 계시는 그 영화산을 말하는 것인가?’

경정은 원생에서 고정엽이 서훈 선생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엄세록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혹시 서훈 선생을 보러 영화산에 가시는 것인가? 잠깐만! 제갈 책사님도 서훈 선생의 제자셨잖아. 지금 시기면 아직 무림맹에 들어가지 않고 영화산에 계실 텐데?’

경정은 원생에서 암어를 해독한 장본인인 무림맹 책사, 제갈원을 떠올리고 깜짝 놀랐다.

“백소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냐?”

“폐하. 신첩에게 상을 내려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래. 그랬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있습니다. 폐하.”

암어를 풀지 못해 괴로워하는 경정에게 무림맹 책사 제갈원은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까짓것 안돼도 한번 시도는 해보자.’

호흡을 고른 경정이 고정엽에게 고했다.

“폐하. 신첩은 강호에 나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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