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51)

내 아들의 여인이 마음에 든다.

회임한 화빈은 최근에 가리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죄다 먹어서 그런지 몸집이 꽤 커져 있었다.

경정은 그녀보다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화빈의 아래 깔린 후, 속으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 방금 뭐한 거지?’

경정은 당장 화빈을 멀리 치워버리고 싶었으나 차마 양심상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미친개라지만 회임한 여인을 밀쳐낼 수는 없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너무 사람이 좋아.’

경정이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쓰러진 화빈의 곁으로 궁녀들이 놀라 달려들었다.

“진상궁. 어서 화빈을 일으켜 세우게.”

“예. 태후 마마.”

태후도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경정은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치여 간신히 뒤로 물러섰다.

“아이고. 내 허리야.”

경정은 허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돌렸다.

뒤로 넘어진 화빈이 배를 부여잡고 걱정하고 있었다.

“어서 어의를 불러라. 어서 화빈의 아이를 살펴라.”

“예. 태후 마마.”

진상궁은 태후의 명에 따라 화빈을 침상으로 옮긴 뒤, 어의를 불렀다.

태후를 비롯한 궁중의 여인들이 화빈의 침상으로 몰려간 그때, 경정은 홀로 남아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화분혜(花粉鞋, 후궁들이 신는 굽이 높은 신발) 앞에 섰다.

1촌(寸, 약 3cm) 정도 되는 신발의 굽이 깨져 있었다.

화빈은 이것 때문에 몸이 뒤로 넘어간 것이었다.

경정은 그것을 보고 냉소했다.

경정은 화빈의 화분혜를 들고 태후 마마 앞에 섰다.

“무엇인가?”

“태후께서 살펴주셔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태후는 고개를 돌려 경정이 내민 굽이 깨진 화분혜를 바라봤다.

그것을 본 태후는 어찌 된 영문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여인들만 지내는 내명부는 겉으로는 웃음이 넘쳐나는 화목한 곳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 같은 여인이면서 어찌 회임한 화빈을 해치려고 드는 것인지.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태후는 진상궁에게 눈짓했다.

진상궁은 태후의 뜻을 알아듣고 화빈의 화분혜를 태후궁의 궁녀에게 챙기라 명했다.

“진상궁. 화빈이 어떠한가?”

“태후 마마. 심려치 마십시오. 화빈 마마가 쓰러지실 때 누군가 뒤를 받쳐줘서 크게 다치지 않으셨습니다. 어의가 와서 진맥해 보아야 알겠지만 괜찮을 것입니다.”

태후는 고개를 돌려 화빈을 위해 몸을 날린 후궁, 백소의를 바라봤다.

경정은 방금 태후에게 깨진 신발을 바치고 허리를 부여잡은 채 멀찌감치 서 있었다.

“진상궁. 저 아이가 백소의라 했던가?”

“예. 근래 황제께서 매일 찾으시는 그 백소의이옵니다.”

태후는 묘한 시선으로 경정을 바라봤다.

‘화빈이 회임하여 내명부 여인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을 터인데. 어찌 자신이 다칠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구했을꼬.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가 아니었단 말인가?’

태후가 경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영화궁에 어의가 도착했다.

화어의는 화빈의 미움을 받아 신형사에 들어가 고초를 겪고 있었고 대신 곽어의가 왔다.

그는 태의가 직접키운 제자로 경력은 화어의에 미치지 못하지만, 실력은 화어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소 안으로 달려온 곽어의는 태후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예를 올렸다.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어서 가서 화빈을 살펴라.”

곽어의는 침상에 누워있는 화빈에게 달려갔다.

맥을 짚기 전에 화빈의 얼굴을 먼저 확인한 곽어의는 안심했다.

화빈의 눈동자 색이나 표정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빈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찌 얻은 황손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화빈의 맥을 짚은 곽어의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안심하옵소서. 태기는 안정적입니다.”

“그것이 정말이냐? 하지만 내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어. 이것은 괜찮은 것인가?”

“놀라셔서 그런 것이옵니다. 뒤로 넘어지셨다는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천운이옵니다. 마마님.”

화빈은 기뻐하며 자신의 배를 부여잡았다.

진상궁도 태후를 보며 웃으며 예를 올렸다.

“태후 마마. 다행입니다. 화빈 마마께서 아무래도 건강한 황자 아기씨를 품으셨나 봅니다.”

“아직 낳지도 않았는데 어찌 사내인지 알겠나. 진상궁은 그만하게.”

“예. 태후 마마.”

태후는 자신이 찾아오자마자 화빈이 아이를 잃는다면 어찌 황제를 볼까 걱정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태후가 곽어의에게 명했다.

“곽어의는 화빈을 다 보았으면 이제 백소의를 살피시게.”

“소의 마마님도 다치셨습니까?”

곽어의가 놀라 경정을 바라봤다.

경정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자 놀라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허리를 살짝 삐끗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지엄하신 태후의 명을 받은 곽어의는 침통을 들고 경정에게 걸어왔다.

진상궁이 함께 가서 어찌 된 일인지 설명했다.

“화빈 마마께서 뒤로 넘어지셨는데 백소의 마마께서 몸으로 화빈 마마를 받아내셨네.”

“몸으로 받아내요?”

“화빈 마마의 아래 깔렸다는 말씀이네.”

“아. 그렇군요.”

곽어의는 그제야 화빈이 멀쩡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임신 초기는 지나서 태기가 안정적이지만 그래도 임산부가 넘어지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임산부가 뒤로 넘어졌는데 왜 이렇게 멀쩡한가 했더니 바로 백소의 때문이었다.

“손을 내밀어 주시지요. 소의 마마.”

경정은 보는 눈이 많았기에 더는 거부하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경정의 손목 위에 손수건을 올린 곽어의는 정성스럽게 그녀를 진맥했다.

감은 눈을 뜬 곽어의가 말했다.

“백소의 마마님도 놀라셨을 뿐 괜찮으십니다. 다만 허리를 다치신 것 같은데 맞는지요?”

경정은 놀라 잡고 있던 허리에서 손을 뗐다.

“제가 약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의원의 의녀도 보내드릴 테니 다친 허리에 찜질을 하셔야 합니다.”

“뭐.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내의원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냥 며칠 쉬면 낫습니다.”

경정은 괜찮다며 사양했다.

‘청초각에 사천 당가 출신의 의원이 있는데 내의원은 무슨.’

경정은 당소소에게 치료받을 생각으로 의원을 사양한 것인데 태후는 그것을 다르게 보고 있었다.

“진상궁. 백소의가 최근에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황제께서 매일같이 백소의만 찾으셔서 내명부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또한 품계도 단숨에 소의로 올라가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흠. 그 정도로 총애를 받으면 오만방자해졌을 만도 한데.”

태후는 위험을 무릅쓰고 화빈을 구하고 내의원이 약을 지어주겠다는데도 사양하는 경정을 보며 흥미를 느꼈다.

“진상궁. 우리는 이만 가세.”

“태후 마마. 이곳에 오셔서 화빈과 백소의 마마께 하문하실 일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되었네. 오늘 보니 백소의는 이미 화빈을 용서한 것 같네.”

“예. 소인이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당분간은 치료에 집중해야 하니 내가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맞다. 가자. 진상궁.”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경정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악!”

경정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곽어의는 그런 경정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화빈도 몸조리 잘하거라.”

“태후 마마. 이곳까지 찾아 주셨는데 험한 꼴을 보이게 되어 송구하옵니다.”

화빈은 태후가 이곳에 온 것이 그녀를 걱정해서 그런 거라 여기는지 태후를 바라보는 눈빛이 빛났다.

“가세. 진상궁.”

태후는 진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영화궁에서 나왔다.

태후가 사라지자 경정도 어색하게 웃으며 화빈에게 말했다.

“화빈 마마. 잘 쉬십시오. 신첩은 이만 가보겠나이다.”

화빈은 경정이 정말 미웠지만, 오늘만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정이 사라지자 영화궁이 조용해졌다.

화빈이 시녀, 운송을 불렀다.

“운송.”

“예. 마마님.”

“아까 내가 쓰러질 때 신고 있던 화분혜의 굽이 부러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 와라.”

“그것은 내무부에서 진상한 것이옵니다. 내무부에 가져 따질까요?”

“내무부가 어디 허투루 일할 곳이냐? 분명 나와 내 뱃속의 황손을 노리고 벌인 짓이 틀림없다. 반드시 찾아서 응징해야 할 것이다. 알았느냐?”

“마마님. 분부 받잡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분부하실 것이 있으신가요?”

“화어의를 불러와라.”

“화어의는 지금 신형사에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신형사에서 죄인 하나 빼내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냐? 아무리 금족령을 받아 영화궁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다지만 내가 그 정도의 힘도 없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마님.”

“그럼, 당장 화어의를 내 눈앞에 불러와라. 그에게 할 말이 있다.”

“예. 마마님.”

운송이 밖으로 나가자 침상에 기대앉는 화빈은 손으로 배를 감싸고 두 눈을 부릅떴다.

“감히 나뿐만 아니라 황손까지 건드려? 제대로 본을 보여주겠다.”

화빈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

청초각에 돌아온 경정은 당소소에게 치료를 받았다.

시침을 끝낸 당소소가 경정을 보며 눈을 흘겼다.

당소소는 어젯밤 있었던 사통 사건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 경정이 몸을 날려 화빈을 구한 이야기까지 듣자 참을 수가 없었다.

“소의 마마님은 너무 착하십니다.”

“제가 착하다고요? 에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나 못됐는데요? 저는 한 대 맞으면 열대로 돌려주는 못된 놈입니다.”

“그렇게 계산이 밝아서 소의 마마님을 음해한 화빈을 구해주셨나요?”

“그거야 화빈 마마님을 구한 것이 아니라 그 뱃속의 아기씨를 구한 것이지요.”

당소소는 경정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었다.

자신은 이런 계략에 빠지면 꼼짝없이 걸려들어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그런데 경정은 그들의 계략을 의연하게 물리치고 이렇게 악인에게 온정까지 베풀다니.

생각할수록 경정이 대단하고 놀라웠다.

“아무튼 당분간은 청초각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부르셔서 건청궁에 가는 것 말고는 조용히 있겠습니다.”

경정은 당소소를 보며 웃었다.

그녀도 당분간은 할 일이 있었다.

‘암어를 풀 시간이 없다. 저녁에는 건청궁에 가서 폐하께 이야기를 해드려야 하고 낮에는 후궁들의 암투에 맞서 계략을 짜야 하고. 바쁘다. 바빠.’

***

일주일 뒤, 경인궁(景仁宮) 앞에 경정이 섰다.

그녀를 따라온 열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마님. 태후께서 왜 또 찾으신 걸까요?”

“글쎄다. 내 몸이 다 나았는지 확인해 보시려는 것일까?”

“그런 걸까요?”

경정이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일주일 동안 곽어의가 매일매일 청초각에 찾아와 경정을 살폈다.

경정은 당소소와 곽어의의 노력으로 삐끗했던 허리는 빠르게 나았다.

그리고 오늘.

태후궁의 진상궁을 따라 경인궁까지 오게 되었다.

‘뭐, 별다른 일이 있겠어?’

경정은 의연하게 태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태후궁은 태후의 청렴하고 곧은 성격처럼 화려하지 않고 단아했다.

처소에 들어서자 태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정은 태후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신첩 백소의.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그만 일어나라.”

“예. 태후 마마.”

경정은 고개를 숙이고 얌전하게 서 있었다.

태후는 그런 경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태후가 지난 며칠 동안 경정을 살펴본 결과, 그녀는 청초각에서 나오지 않고 매일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조용하게 지냈다.

매일 밤 건청궁에 들어 황제를 시침했지만, 총애를 얻었다고 오만방자하게 굴지도 않았다.

태후는 지난날, 영화궁에서 경정이 진심으로 화빈을 구하러 뛰어든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백소의는 고개를 들게.”

“예. 태후 마마.”

경정은 고개를 들어 태후를 쳐다봤다.

‘이분이 강건하셔야 내명부가 안정된다.’

경정은 태후의 죽음 이후, 내명부가 망가진 것을 알고 있기에 걱정이 앞섰다.

내명부에 계략과 음모가 판을 칠수록 그곳에서 일하는 궁녀와 환관들만 괴롭다.

‘태후 마마.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경정은 태후가 원생보다 오래 사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그때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어깨를 잡았다.

“태후 마마. 왜 그러십니까? 어깨가 아프십니까?”

“고질병이다. 백소의는 괘념치 말아라.”

경정은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태후의 앞으로 걸어갔다.

“백소의? 무얼 하려는 것인가?”

태후는 갑자기 지척에 다가온 경정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경정은 곧바로 태후의 등 뒤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진기(眞氣)를 담은 경정의 안마에 태후의 어깨를 짓눌렀던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자 태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허.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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