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 마마 등장이오.
경양궁(景陽宮)의 진귀인에게 화빈의 소식이 들려왔다.
진귀인의 시녀 진양이 웃으며 말했다.
“마마님. 화빈이 꼼짝도 못 하고 상궁들의 손에 끌려 영화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흥. 꼴 좋구나. 감히 폐하의 사람을 이용해 후궁을 모략하다니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
진귀인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최측근인 금의위 엄세록을 건드린 화빈을 생각하며 조소했다.
“일을 꾸민 천한 것들은 어찌 되었느냐?”
“영화궁의 수령 태감인 서개와 청초각의 궁녀 춘벽은 금의위로 끌려갔습니다.”
“신형사가 아니라 금의위라고?”
“그렇습니다. 마마님. 금의위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지막지한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금의위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도통 엄세록을 모함하였으니 아마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화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신형사로 끌려갔다면 환관이나 시위를 매수하여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마마님. 천한 것들이 화빈을 위해 죄를 실토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청초각에 심은 오가려에게 연락이 왔는데 춘벽이란 궁녀에게 화빈에 대한 충성심은 없다고 한다. 영화궁의 수령 태감인 서개도 마찬가지겠지. 화빈은 이제 독에 갇힌 쥐가 되었구나.”
진귀인은 화빈의 몰락을 감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함께 입궁하여 품계도 나란히 올랐으나 화선의가 먼저 회임하였다.
황손을 잉태했다는 것은 후궁에게는 최고의 뒷배다.
당장 오늘 일만 하더라도 당장 냉궁(冷宮)으로 보내질 큰일을 저질렀으나 황손을 회임하여 영화궁에 갇히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는가?
“화빈에게 정식으로 금족령(禁足令)이 내려진 것이냐?”
“폐하께서 금족령이란 단어를 입 밖에 내시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자중하고 영화궁 안에 있으라 명하셨기에 금족령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백소의가 만만한 자가 아니로구나.”
진귀인은 화빈이 이리된 것에는 백소의의 계략이 한몫했다고 여겼다.
“화빈이 놓은 덫을 이용하여 반대로 화빈을 덫에 가두다니. 훌륭하구나. 절대로 만만히 볼 자가 아니야.”
“마마님. 이제 어찌하실 것입니까? 춘벽과 서개가 음모를 꾸민 일이 밝혀져도 화빈 마마께서는 무사하실 것입니다.”
“그렇겠지. 용종을 회임하고 있는 이상, 화빈에게 몰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아이를 잃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섬뜩한 진귀인의 말에 진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 손을 쓰시려고요?”
“그럴 수야 없지. 백소의를 없애기 위해 계략을 짠 화빈이 어찌 되었는지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 함부로 나설 수는 없다. 다만 우연을 이용할 수는 있겠지.”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마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소인이 아둔하여 잘 모르겠나이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진양이 가까이 다가서자 진귀인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귀인의 말을 들은 진양의 두 눈이 커졌다.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역시 마마님의 수는 소인이 따라가지 못하겠나이다.”
“날이 밝으면 당장 알아보거라.”
“알겠습니다. 마마님.”
“그럼, 너는 이만 나가보아라. 이제 침소에 들어야겠구나.”
진양이 나가자 진귀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진귀인은 오늘 밤은 오랜만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침소를 나가려던 진양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런데 마마님. 백소의는 어찌할까요? 청초각에 심은 간자가 있으니 이제 백소의를 무너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청초각은 그냥 놔둬라.”
“예?”
“청초각에 들어간 아이에게도 전해라. 그 안에서 섣불리 나서지 말고 자중하라고 말이다.”
진양은 진귀인의 명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알았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진귀인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백소의. 절대 만만히 볼 자가 아니다. 천한 것을 무너뜨리려면 천천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
황제 고정엽이 경정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와 함께 건청궁에 든 경정은 황제가 왜 저러나 싶었다.
“왜 그렇게 신첩을 빤히 쳐다보시는 겁니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오랜만이라 그런다.”
“고작 닷새 동안 못 본 것인데요?”
“그 닷새 동안 내가 한숨도 못 잤다면?”
“예?”
경정이 놀라 황제의 용안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눈꺼풀 아래가 어두컴컴하고 피부가 꺼칠한 것이 아주 피곤해 보였다.
“어찌 그리 잠을 잘 못 주무시는 것입니까? 태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답니까?”
“태의는 지금 휴가 중이다.”
“폐하께서 이렇게 불면증으로 고생 중이신데 당장 돌아오라고 하십시오.”
“괜찮다. 나는 네가 있으니 걱정 없다.”
경정은 순간 움찔했다.
고정엽이 경정의 손을 잡은 것이다.
경정이 놀라 손을 잡아 빼려고 하는데 고정엽은 되려 그녀를 잡아끌었다.
경정의 몸이 순식간에 고정엽의 가슴에 폭하니 안겼다.
경정은 화들짝 놀라서 황제를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백소의······?”
고정엽이 놀란 눈으로 경정을 바라봤다.
경정은 자신이 황제 앞에서 불경죄를 저질렀음을 알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경정은 곧바로 황제 앞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폐하. 신첩이 너무 놀라서 그만 폐하를 밀쳐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백소의. 너는 말이다.”
경정은 황제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
“지난번 신형사 화재 때도 그랬지만, 너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참 센 거 같다.”
고정엽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도 강호에서는 풍운검(風雲劍)이라 불리며 일류 고수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어찌 여인인 경정 한 명을 안고 있지도 못한단 말인가?
경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신첩이 어릴 때부터 약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무슨 약을 먹었길래 힘이 그렇게 세단 말이냐?”
‘고진단(固眞丹)이라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경정은 차마 고진단을 매일 먹는다는 말은 못 하고 말을 돌렸다.
“폐하. 신첩이 창천각에서 쓸만한 책을 몇 권 골라왔습니다. 폐하께 들려드리면 좋아하실 만한 것으로요.”
창천각이라는 말에 고정엽의 얼굴이 밝아졌다.
“무림 비사는 찾아보았느냐?”
“예. 무림 비사가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이더군요. 심지어 작가도 모두 다른 것 같았습니다.”
경정은 지난날 무림맹에서 무림 비사를 읽고 그것의 사실 여부를 가려 무림맹 판 ‘무림 비사’로 탄생시킨 경험이 있다.
“네가 잘 골라서 내게 들려다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경정은 고정엽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그런데 폐하. 서고에 모아놓은 수많은 강호 서적들은 다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직접 수집하신 것이옵니까?”
“그렇지 않다. 전전대부터 모은 것이라는데 나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수집한 책인지는 알지 못한다.”
암어(暗語)로 쓰인 책의 출처는 아마도 알기 힘들 것이었다.
경정은 예상하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백소의. 이만 침상으로 올라오라. 와서 내게 이야기를 들려줘.”
고정엽이 바닥에 무릎 꿇은 경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정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정엽의 손을 잡았다.
건청궁(乾淸宮) 침전에 불이 꺼진 것은 반시진(半時辰,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
경인궁(景仁宮)의 태후가 어젯밤에 창천각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있다.
“······ 일이 이렇게 되어 화빈은 지금 영화궁에 연금 중이라고 합니다. 태후 마마.”
“일을 꾸민 춘벽과 서태감은 자백하였느냐?”
“예. 새벽녘에 모든 일을 다 고했다고 합니다.”
“고작 하룻밤도 버티지 못하고 죄를 실토했다는 것이냐? 화빈은 어찌 그런 노비를 데리고 있었을꼬.”
“다른 곳도 아니고 금의위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하룻밤을 버틴 것도 대단한 것이지요.”
태후는 화빈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후궁을 음해한 일을 듣고 바로 수긍했다.
하지만 그래도 황손을 회임한 후궁이었다.
“화빈이 황제를 너무 몰랐군. 가장 총애하는 사람을 건드렸으니 황제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네.”
“태후 마마. 황제께서 가장 총애하는 사람이라 하심은? 백소의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진상궁은 이번에 소의가 된 백경정이라는 여인을 떠올렸다.
그러나 태후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백소의라니. 가당치도 않다. 나는 엄세록을 말한 것이다.”
“금의위의 엄세록 도통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제일 총애하는 사람은 후궁이 아니라 바로 엄 도통이다. 그런 자를 후궁과 사통했다는 죄를 물어 음해하였으니 황제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태후는 고민하더니 진상궁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영화궁에 가야겠구나. 진상궁. 너는 백소의라는 자를 영화궁으로 불러와라.”
“백소의까지 불러 어찌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화빈이 아무리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해도 황손을 뱃속에 품고 있다. 황제는 지금 엄세록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울 것이니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
갑자기 태후의 명을 받은 경정은 영화궁 앞에 섰다.
경정을 따라온 열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마님. 태후께서 어제의 일로 질책하시려는 것이 아닐까요? 소인은 두렵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나는 죄가 없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경정은 태후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폐하께서 화빈에게 엄벌을 내릴까 봐 일부러 먼저 손을 쓰시려는 거구나. 나와 화빈 사이를 중재하려는 것이겠지. 역시 태후 마마님다운 일 처리로구나.’
경정은 그간 태후가 어찌 내명부를 다스려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황후는 몸이 아파 잘 나서지 않았고 이렇듯 중요한 일이 생기면 태후가 나서서 내명부를 통솔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원생에서 귀비가 되었던 화선의가 날뛰기 시작한 것이 태후 마마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
경정은 화선의가 태후의 비호로 살아날 것을 알고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사람이었기에 아이를 품은 여인을 해친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영화궁에 들어서자 화빈이 마중 나와 있었다.
화빈은 경정을 보자마자 분노하여 치를 떨었다.
‘그만 좀 째려봐라. 계략을 꾸며 나를 죽이고자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경정은 화빈이 째려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 섰다.
화빈은 옆자리에 선 여인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회임하여 꽃길이 펼쳐져 있던 그녀의 앞에 나타나 총애를 가로채 간 천한 것.
“백소의. 언제까지 폐하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길게 일 년 보고 있습니다. 화빈 마마.”
‘일 년 뒤에는 황궁에서 도망칠 거거든요.’
어차피 후궁으로 사는 것도 딱 일 년이다.
일 년 후면 무공을 되찾아 이 지긋지긋한 황궁에서 탈출할 거니까.
‘내명부의 암투와 계략에 맞장구쳐주는 것도 지금뿐이란 말이니 새겨들으시오. 아시겠소? 화빈?’
경정이 화빈의 분노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그때, 진상궁이 태후를 모시고 영화궁에 들어섰다.
“태후 마마 듭시오.”
태후의 등장에 화빈은 얼굴을 바꾸고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신첩 화빈,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신첩 백소의,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화빈과 경정이 태후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태후는 들어오면서 백소의의 얼굴을 확인했다.
화려한 화빈에 비해 백소의는 순하게 생겨서 당최 계략을 꾸밀 상이 아니었다.
‘백소의라 하였던가? 순박해 보이지만 가면을 쓰는 데 능숙한 것일 수도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겠지.’
태후가 그만 일어나라 손을 들자 화빈과 경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일어서던 화빈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 어머!”
화빈은 살짝 부푼 배를 붙잡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시녀인 진양이 놀라서 화빈의 팔을 붙잡으려는데 놓치고 말았다.
‘이건 또 뭐야?’
찰나의 순간, 경정은 이것이 화빈의 또 다른 수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여인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경정은 재빨리 화빈을 붙잡으러 달려 나갔다.
그러나 환관이었을 때의 몸가짐이 몸에 밴 것인지 차마 화빈의 손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찌 감히 환관 따위가 후궁의 손을 잡는다는 말인가?
전광석화처럼 달려 나간 경정은 화빈을 붙잡지 못하는 대신 바닥에 떨어지는 화빈의 등을 받치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경정은 졸지에 화빈을 뒤에서 껴안은 채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어라? 이게 더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