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51)

화빈, 총애를 잃다.

경정은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고 그 앞으로 황후와 선비가 걸어 나왔다.

춘벽은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후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고정엽에게 다가가 고했다.

“폐하. 신첩과 선비는 이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온 것입니다. 다른 일로 청초각을 찾았다가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이죠.”

“다른 일이라 했소? 대체 오늘 황궁에 왜 이리 일이 많은 것이오? 마치 내가 오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외다.”

고정엽은 말을 하며 화빈을 슬쩍 쳐다봤다.

오늘 황제가 회궁하기를 기다려 일을 꾸민 화빈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황후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폐하. 내명부의 작은 일은 신첩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내명부 안의 작은 일이 아닌 듯합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신첩은 청초각의 노비인 춘벽이 사사로이 다른 궁의 내관과 만나 사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방금 사통(私通)이라 하였소? 오늘 아주 사통 소리를 원 없이 듣는구려.”

“폐하. 이것이 바로 그 증좌이옵니다. 춘벽과 사사로이 내통한 환관이 주고받은 밀서이옵니다.”

황후는 손수건을 들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황제에게 보였다.

춘벽은 밀서라는 말에 대경실색했다.

춘벽은 여앵의 부탁으로 내무부에 보냈던 서신이 생각났다.

춘벽이 달려와 읍소했다.

“황후 마마. 오해이십니다. 그것은 내관과 주고받은 밀서가 아니옵고 내무부에 물건을 언제까지 보내라 쓴 것이옵니다. 서신을 찬찬히 살펴주시어요. 소인은 절대 거짓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밀서 이야기는 정말로 억울했다.

춘벽은 언제까지 물건을 보내 달라는 편지가 이렇게 내관과 사통한 증좌로 쓰이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황후가 내민 증좌를 보는 황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춘벽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황후가 건넨 손수건 안에는 타다 만 서신이 들어 있었다.

거의 다 타고 일부만 남아 있는데 군데군데 보이는 단어들이 심상치 않았다.

[청초각의 춘벽···.

술시(戌時, 오후 일곱 시)에 창천각에서···.

드디어 일을··· 치르···.

서개 영감을···.

준비를 단단히 하시고···.]

이것은 궁녀와 내관이 사사로이 정을 통한 연서로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바로 이 시각에 창천각 앞에서 백소의와 엄세록의 사통했다는 누명을 썼으니 필시 무시무시한 계략의 일부일 터였다.

고정엽은 타다만 종이의 마지막에 드러난 서개라는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화빈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고정엽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슬쩍 손수건 안에 든 것을 본 경정은 감탄했다.

‘춘벽이 쓴 편지에 살을 붙인 뒤 일부러 태운 것인가? 역시 풋내기 화빈보다는 선비가 더 위험한 인물이었군. 역시 내명부의 암투는 대단해. 이 살얼음판에서 나 같은 인재가 아니면 어찌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춘벽은 분노하는 고정엽을 보며 피가 식는 것 같았다.

화빈도 상황이 수상하게 돌아가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폐하. 궁에 오시자마자 쉬지도 못하셨습니다. 이곳은 황후 마마께 맡기시고 그만 궁으로 돌아가 쉬시지요. 괜찮으시다면 신첩이 영화궁으로 모시겠나이다.”

화빈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고정엽은 화빈의 손을 뿌리치고 노기 띤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화빈. 영화궁의 수령 태감이 서개가 아닌가?”

“그것은 왜 물으시는 것이옵니까?”

“말해 보라. 화빈.”

“맞습니다. 폐하.”

화빈은 황제의 눈빛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황제는 화빈을 뒤로 하고 소공공에게 명했다.

“영화궁의 수령 태감인 서개를 불러라.”

“예. 폐하.”

소공공이 소빈자에게 영화궁의 수령 태감을 끌고 오라 명했고 시위들이 함께 출동했다.

화빈이 놀라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서태감을 왜 찾으시는 것입니까?”

황제는 화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빈은 일이 틀어진 것은 물론 그녀가 이번 일을 사주한 것까지 밝혀질까 봐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황후는 춘벽과 화빈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황제에게 다가가 고했다.

“처음에는 궁녀와 환관이 창천각에서 밀회를 즐기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오늘 일을 떠올려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 부디 이 일을 조사하시어 더러운 수작이 없었는지 밝혀주시옵소서. 그래야 백소의의 결백이 밝혀질 것이옵고 다시는 내명부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평소에는 차분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황후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지 칼을 빼 들기로 한 것 같았다.

춘벽과 영화궁의 수령 태감이 단독으로 이 일을 꾸몄을 리가 없었다.

일개 궁녀와 태감이 어찌 황제의 후궁과 금의위 도통을 음해하는 일을 꾸민다는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화빈에게 쏟아졌다.

화빈은 백소의를 음해한 일이 밝혀질까 두려웠다.

그때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잡고 화빈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 신첩의 배가···. 배가···.”

화빈이 고통을 호소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고정엽은 놀란 눈으로 화빈에게 달려갔다.

“괜찮소? 화빈?”

“폐하. 신첩은 아둔하여 지금 벌어진 일이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르지만, 신첩은 처음 듣는 일이옵니다.”

“알겠으니 그만하시오. 당장 어의를 불러 화빈이 괜찮은지부터 확인합시다.”

“폐하. 신첩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명명백백하게 일을 밝혀주시옵소서.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화빈은 배를 움켜쥐고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황후도 걱정스러운지 화빈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경정과 선비만이 싸늘한 시선으로 화빈의 연기를 지켜 보고 있었다.

경정은 황손을 인질로 연기를 펼치는 화빈을 보며 혀를 찼다.

‘화선의. 그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또 황손을 핑계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드는구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할 수 없을 것이오. 내가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거든.’

청초각이 육궁과 떨어져 있으니 지금 당장 어의를 불러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었다.

고정엽은 수령 태감인 서개와 춘벽을 직접 대질시키려 했으나 화빈이 아프다고 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황후는 시녀에게 화빈을 살피라 명하고 황제에게 간언했다.

“폐하. 화빈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화빈은 신첩이 살필 것이니 오늘은 그만하시지요.”

“어쩔 수 없지.”

고정엽은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밝히고 싶었으나 화빈이 걱정되는 마음도 들어, 이대로 끝내기로 했다.

황후가 선비를 불렀다.

“선비. 나를 도와 화빈을 종수궁으로 옮기고 어의에게 치료를 받게 하세.”

“예. 황후 마마.”

선비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화빈이 미운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화빈은 그제야 살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배 속의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해. 춘벽과 서개는 신형사로 끌려갈 테니 사람을 시켜 처리하면 된다. 두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면 누가 나를 배후로 지목하겠는가?’

화빈은 오늘 일의 원흉인 경정을 노려봤다.

경정은 조금 전 금의위와 사통했다는 모함을 받은 후궁이 아닌 듯 평온해 보였다.

경정은 화빈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은 후, 고정엽의 앞으로 걸어갔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소의. 말해보아라.”

“저기 내의원의 화어의가 오고 있는데 당장 화빈 마마가 괜찮으신지 진맥해 보면 어떨까요?”

“화어의가 와 있다고?”

고정엽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어의는 이곳에서 황제를 만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며 예를 올렸다.

“폐하. 소인은 내의원의 화준성 이옵니다.”

화어의는 화빈의 사주를 받아 경정에게 광인(狂人)이 되는 약을 먹이고 있다.

오늘이 백소의를 진맥하는 날이라 이곳에 들른 것인데 막상 청초각에 가보니 백소의는 없었고, 그녀의 시녀인 열음을 따라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경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화어의에게 외쳤다.

“화어의. 급합니다. 어서 화빈 마마를 진맥해 주십시오. 지금 태기가 불안정하여 화빈께서 고통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화빈 마마께서요?”

화어의는 놀라서 화빈을 바라봤다.

화빈은 갑자기 나타난 화어의를 보고 심경이 복잡했다.

자신은 이제 황후와 함께 이곳을 떠나면 되는 일인데 마치 짠 것처럼 화어의가 등장하다니.

화어의는 화가(化家)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화빈 뱃속의 황손을 살펴야 했다.

화어의가 한걸음에 화빈 앞으로 다가왔다.

“마마. 소인이 마마를 봐 드리겠습니다.”

“흠···. 화어의.”

화빈은 어찌할 줄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진맥을 받으면 자신이 멀쩡하다는 사실이 들통나고 말 것이었다.

“마마. 어서 소인에게 팔을 내어주십시오.”

화어의는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평소보다 과하게 행동했다.

화빈은 지금 당장 화어의의 뺨을 때리고 싶었으나 지엄하신 황제가 지켜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손목을 내밀었다.

화어의는 조심스레 화빈을 진맥하기 시작했다.

경정이 화어의의 옆에 찰싹 붙어 흥을 불어넣었다.

“화어의께서는 출중하시니, 분명히 화빈 마마를 살펴주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화어의?”

“당연하지요. 소인에게 맡겨만 주십시오.”

화빈은 들뜬 화어의를 노려보며 무언의 압박을 보냈지만, 화어의는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화빈의 다급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

“어떻습니까? 화어의? 화빈 마마는 괜찮으신가요? 화빈께서는 황손을 회임하고 계십니다. 절대 큰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화어의께서도 잘 아시죠?”

고정엽도 옆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화어의. 말해보아라. 화빈은 어떠한가?”

고정엽이 묻자 화어의는 화들짝 놀라 화빈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폐하. 화빈 마마님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마마께서는 아주 건강하시고 태기도 전혀 문제가 없사옵니다.”

화어의가 화빈과 배 속의 아이가 문제없다고 고하자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화빈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 배를 잡고 있었는데 황제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가증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폐하. 신첩은 정말로 배가 아픕니다. 화어의 어찌하여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어서 다시 진맥하라.”

화어의는 분노하는 화빈을 보며 자신이 잘못 진맥한 것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정엽은 모두 조용히 하라며 손을 들었다.

“화빈.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번 일은 금의위가 철저히 조사할 것이네. 그러니 그만 자중하고 영화궁으로 돌아가게.”

화빈은 싸늘하게 식은 고정엽의 눈빛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황제의 눈빛은 처음 받아보기에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폐하! 어찌 신첩에게 이리 대하시는 것입니까? 신첩은 황손을 회임하였습니다. 저를 가장 아끼고 보살펴 주셔야지요.”

고정엽은 배가 아픈 것은 꾀병이었다는 듯 미쳐 날뛰는 화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는 황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화빈이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구려. 황후가 화빈을 데리고 돌아가시게.”

“예. 그리하겠나이다.”

황후의 명을 받은 황후궁의 상궁들이 화빈의 주위로 몰려왔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화빈 마마.”

“이거 놓아라. 감히 황손을 회임한 내게 손을 대는 것이냐?”

“화빈 마마. 소인들은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의 명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화빈은 처음에는 반항했으나 황후의 측근 시녀인 안상궁과 도태감 소공공이 나서자 발작을 멈추었다.

화빈은 이러다간 황제의 총애가 땅에 떨어질까 두려워 힘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조금 전까지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던 일은 모두 연극이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이었다.

경정은 그녀를 증오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화빈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화빈은 이번 일로 폐하의 총애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당분간은 영화궁 밖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다.’

경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갑자기 그날 수레에서 봤던 후궁 백경정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개를 내려보니 화빈이 억지로 가마에 태워지고 있었다.

경정은 끌려가는 화빈을 보며 예를 올렸다.

“화빈 마마. 조심히 가십시오.”

화빈을 보낸 경정의 앞으로 고정엽이 다가왔다.

“백소의.”

경정은 맑은 눈으로 고정엽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밤이 늦었습니다. 황후 마마님과 함께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그럴 수는 없지. 나를 따라 건청궁으로 가자.”

“폐하께서는 방금 돌아오셨습니다.”

“나도 안다. 가자. 백소의.”

고정엽이 경정의 손을 잡아끌었다.

경정은 황후와 선비에게 예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고정엽의 손에 이끌려 창천각을 떠났다.

선비는 오늘 일로 화빈의 기세를 꺾어놨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겨도 이긴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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