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51)

총애(寵愛)란 무엇인지 보여주마.

열음은 눈물 자국을 숨기려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경정을 맞이했다.

“마마님. 소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음······?”

“가시지요. 마마님.”

경정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단박에 알아채고 고개를 획 돌려 다른 후궁들의 시녀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황제 폐하께 예를 올리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희들이 감히 우리 열음을 핍박하며 위세를 부렸구나.’

황궁이란 곳은 신기하게도 애매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위계질서 운운하며 위세를 부리곤 한다.

황후 마마께서는 경정을 온정으로 대하시지만 한참 아래 품계인 화빈이 경정을 못살게 구는 것처럼 말이다.

경정이 열음을 괴롭힌 시녀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윗전으로서 벌을 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되면 황제의 총애를 믿고 설치는 꼴이 되고 만다.

'노비를 괴롭게 만드는 방법이 하나 더 있지. 바로 그 주인을 분노하게 하는것이다.'

경정은 황궁의 주인이자 모든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고정엽을 바라봤다.

‘내가 한번 총애란 것이 뭔지 제대로 보여줘?’

경정은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할 수 있는 상대가 지척에 있음을 깨닫고 환하게 웃으며 고정엽에게 다가갔다.

“폐하.”

종수궁을 나오자마자 황제를 피해 황급히 처소로 돌아가려 했던 경정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다가오자 고정엽은 당황했다.

평소 같으면 여인의 마음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을 것인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고정엽은 환하게 웃는 경정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침 종수궁을 나오던 비빈들은 황제의 이런 모습에 당황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열음을 핍박했던 후궁들의 시녀들도 황제와 경정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정엽은 경정을 보며 말했다.

“백소의는 지금 처소로 돌아가려는가?”

“아닙니다. 폐하. 신첩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 무엇을 하려고?”

“폐하와 함께 건청궁으로 가야지요.”

경정의 당돌한 언사에 뒤에 서 있던 비빈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오만방자하고 천박한 것을 보았는가?’라는 글자가 비빈들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고정엽도 황궁의 여인이 이렇게 대놓고 들이대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경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 폐하께서 저를 위해 어의를 불러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폐하께서 말씀을 어긴 것이 되지 않게 하려면 신첩이 건청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지요.”

딱딱 맞아떨어지는 경정의 말에 고정엽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내가 거짓말쟁이가 될까 봐 백소의가 염려하는 것이냐?”

조금 전까지 눈물을 훔치며 힘없는 주인을 어찌 모실까 걱정하던 열음은 깜짝 놀랐다.

황제는 그녀의 주인을 상궁이 아닌 소의(昭儀)로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챈 열음은 앞으로 다가와 경정을 향해 예를 올렸다.

“소의 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경정이 살갑게 굴어 기분이 좋던 고정엽은 웃으며 열음에게 예를 거두라 말했다.

“열음. 너도 일어나거라. 네 이름이 열음이 맞지?”

열음은 황제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찌 그렇게 놀라느냐? 내가 엊그제 청초각에 갔다가 너와 소천에게 상을 내리지 않았느냐?”

“폐하께서 미천한 노비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고정엽이 청초각 시녀의 이름을 알뿐만 아니라 상까지 내렸다는 말에 그녀를 핍박했던 시녀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경정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며 냉소했다.

‘역시 황궁 최고의 권력은 폐하시구나. 장인 태감이든 동창의 통령이든. 하나 쓸모없다. 폐하의 마음만 얻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고정엽은 열음에게 일어나라 명하고 소공공을 불렀다.

“소공공. 백소의에게 내 가마를 내어주게. 건청궁은 여기서 가까우니 나는 걸어가겠네.”

“폐하. 어찌 그런······.”

소공공은 어가를 후궁에게 양보하겠다는 황제를 보며 당황했다.

경정도 당황하여 고정엽을 쳐다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황제에게 아양을 떤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로 황제가 좋아할 줄은 그녀도 미처 몰랐다.

“소공공. 어서 명을 따라라. 그리고 건청궁으로 어의를 불러오고.”

소공공은 황제의 명이 진심임을 알아채고 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폐하.”

경정은 얼떨결에 황제의 어가에 올라탔다.

열음은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어가 아래에서 경정을 올려다보며 기뻐했다.

열음을 핍박했던 시녀들은 경정과 황제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분노에 떠는 주인들을 보며 몸을 떨었다.

그들의 주인이 심기가 불편하니 궁으로 돌아가면 고생깨나 할 것이었다.

후궁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의 이 사달이 모두 그녀들이 부리는 노비의 하찮은 괴롭힘에서 비롯된 것을.

***

영화궁(永和宮)에서는 아침부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을 바닥에 던진 화빈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운송이 다가와 화빈을 말렸다.

“마마. 그토록 바라던 빈이 되셨습니다. 어찌 이리 화를 내십니까?”

“그럼, 나보고 웃으라는 것이냐?”

그때 화빈을 모시는 수령 태감인 서개가 다가와 말을 전했다.

“마마님. 고정하시지요.”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어찌 고정하겠어? 그 천한 것이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몰라도 폐하께서 푹 빠지셨다. 나는 오늘 안중에도 없으셨어.”

“마마님. 다행히 내의원에 마마님의 사람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서태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서개는 화빈을 모시는 수령 태감으로 지난날 소이자를 내치고 소태자 이강을 영화궁에 들였던 자다.

이강이 계략을 꾸며 소이자를 내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음흉하고 일 꾸미기 좋아하는 서개는 순하디순한 소이자는 부리기가 쉽지 않다고 여겨 자신의 수족으로 쓸 새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계략을 꾸미는 이강이 그의 눈에 들어왔고 서개는 이강의 계략을 모르는 척 받고는 그를 수하로 삼은 것이었다.

그래놓고 이강이 박하잎 사건으로 위기에 처하자 나 몰라라 하며 단숨에 내친 것도 그였다.

서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화빈에게 말했다.

“마침 태의께서 사가에 일이 있어 장기 휴직 중입니다. 지금 내의원에서 태의 대리를 보고 있는 어의 화준성이 마마님의 먼 친척이니 좋은 일이지요.”

“그렇구나. 내가 그 생각을 하지 못했어. 그를 만나 보았느냐?”

“어의 화씨의 말에 따르면 오전에 건청궁에 들어 백소의를 진맥했다 하옵니다.”

“그 천한 것에게 큰 병이 있을 리가 없다. 폐하의 동정을 얻으려는 꾀병일 테지.”

“영명하십니다. 마마님. 백소의가 너무나도 건강해서 화어의도 깜짝 놀랐다고 하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마마님. 지난 신형사 화재로 백소의가 놀라 심통(心痛)이 생겼다고 화어의에게 약을 지어달라 했다고 합니다.”

“고얀 것 같으니. 몸이 건강하니 마음의 병이라 속이는구나.”

“마마님. 백소의의 병이 꾀병이라 해도 폐하께서는 이를 모르고 계시지요.”

“내 당장 그것이 꾀병을 부려 폐하의 총애를 얻으려고 했다고 고해야겠구나.”

화빈이 당장 건청궁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서개가 말렸다.

“마마님. 말 그대로 심병이라 그것이 꾀병인지 아닌지 밝혀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럼, 어찌하자는 것이냐? 이대로 천한 것이 폐하의 어심을 어지럽히는 것을 두고 보자는 것이야?”

서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마님. 자고로 마음의 병을 얻어 정신을 놓게 된 후궁이 한둘이 아니지요.”

서개의 말에 화빈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화빈은 주위를 물리게 하고 서개에게 가까이 오라 명했다.

서개는 화빈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화어의에게 일렀습니다. 약을 써서 병을 키우고 당분간 백소의가 폐하의 시침을 들 수 없게 하라 명했습니다.”

“단지 그것뿐인가?”

냉혹한 화빈의 눈빛을 본 서개가 웃으며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화어의가 처방한 약을 장복하면 한 달 안에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소인을 믿고 한 달만 기다려주시옵소서. 백소의는 폐하의 시침도 들지 못하고 미쳐버릴 테니 총애도 이대로 끝날 것이옵니다.”

화빈은 그제야 안도하며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서태감. 내가 이래서 너를 아끼는 것이다.”

“소인은 마마의 충복이오니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네가 영화궁에 환관을 잘못 들였던 일은 그만 용서해 주겠다. 녹봉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줄 터이니 앞으로도 성심성의껏 나를 모셔라. 내가 황자라도 생산하는 날이면 섭섭하지 않게 대하겠다.”

“마마의 인자함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

화어의에게 진맥을 받은 경정은 그의 처방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 심통(心痛)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오?”

화어의는 눈을 내리깔고 진중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소의 마마. 그것은 심병의 일종으로 흥분하면 가슴이 죄어 오며 고통을 유발하게 됩니다. 위험한 병이지요.”

경정은 화어의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뭔 소리래? 내 병은 시침을 피하고자 일부러 꾸며낸 것인데 무슨 위험한 병이라는 거야?’

경정의 옆에서 지켜보던 당소소의 표정도 심각했다.

그녀는 경정이 소의로 품계가 올랐다는 소식보다 그녀가 어의에게 진맥을 받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래서 화어의가 청초각에 결과를 말해주러 오기 전에 그녀가 직접 경정의 맥을 짚어 확인했다.

하지만 경정은 일반인보다 심장 박동이 빠른 것 말고는 앓고 있는 병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무서울 정도였다.

당소소는 화어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 사람은 돌팔이가 분명했다.

“소의 마마. 말씀드렸다시피 이 병은 흥분하면 간헐적으로 심통이 생기는 병이라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 시침은 피해야 합니다.”

화어의는 말을 마치고 경정의 눈치를 살폈다.

경정의 화어의의 입에서 시침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하. 그러니까 나를 시침을 못 들게 하려는 수작이었구나. 이제야 알겠다.’

경정은 속으로는 뛸 뜻이 기뻤으나 그것을 숨기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어의. 정녕 방도가 없겠소? 이제야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대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요?”

“소의 마마. 길게 보셔야지요. 한 달만 참고 치료하시면 됩니다. 몸이 낫고 나면 언제든 시침하실 수 있을 테니 염려 마시지요.”

“정말 한 달 만이요? 혹시 일 년은 안 되나요?”

“예?”

“아니 그러니까. 한 달을 치료해도 안 나으면 약을 더 먹어야 하겠지요?”

“그 말씀이셨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달이면 낫게 되어 있습니다.”

경정은 장담하는 화어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 약을 한 달 내내 먹으면 그 전에 죽을 거라는 말이군. 알아들었어.’

경정은 눈물도 나지 않는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화어의에게 말했다.

“알았네. 화어의. 약을 두고 가시게.”

“매일 하루 두 번입니다. 잊지 말고 약을 달여 드셔야 합니다. 마마님. 저는 일주일 뒤에 다시 새 약을 들고 청초각을 찾아오겠습니다.”

“내 하루빨리 병이 나아 폐하를 모셔야 하니 화어의의 말에 따르겠네.”

화어의가 나가자마자 당소소는 그가 두고 간 약첩을 펼쳤다.

그 안에 든 약재를 확인한 당소소가 놀라 외쳤다.

“이런 못된 놈!”

당소소가 이런 험한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청초각 식구들은 깜짝 놀랐다.

당소소는 화어의가 가져온 일주일 치 약재를 오물통에 처박아 버렸다.

열음과 소천 그리고 소이자가 깜짝 놀라 오물통으로 달려갔다.

그때 경정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말렸다.

“재인 마마. 약에 문제가 있습니까?”

당소소는 분을 참지 못하고 답했다.

“이 약을 장복하면 광증에 걸리게 됩니다. 감히 폐하의 총애를 받는 후궁에게 이런 악독한 짓을 하다니요. 당장 폐하께 알리세요. 소의 마마.”

“그렇군요. 약을 먹으면 미쳐버린다는 말씀이시군요.”

경정은 화어의가 화빈의 사가(私家)에서 내의원에 심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원생에서 화귀비가 후궁 백경정을 독살할 때 사용한 극독도 화어의가 가져다줬을 터.

경정은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쳐 죽일 놈들. 황궁의 여인들을 해치는 수법이 보통이 아니구나.’

경정이 저들을 어찌 단죄할지 고민하는데 환관이 청초각에 도착했다.

그는 소공공의 제자인 소빈자였다.

“마마님. 폐하께서 가마를 보내셨습니다. 건청궁으로 가시지요.”

“소빈자. 혹시 폐하께서 화어의의 말을 못 들으신 것인가? 나는 당분간 시침을 들 수 없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나를 부르셨어?”

“예. 마마.”

어차피 시침을 피할 핑계가 생겼기에 경정은 주저하지 않았다.

당당히 일어선 경정이 소빈자를 향해 말했다.

“폐하께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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