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51)

회귀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경정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늘 하루 황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조사한 결과, 그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자신이 회귀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왕 과거로 돌려보내 주실 거라면 거세하기 이전의 당당한 남아였던 때로 보내주시지.

이렇게 여인으로!

그것도 사랑받지 못하는 황제의 후궁으로 깨어나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재수 없는 일이 다시 시작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은 하나야. 무공을 되찾아야 해. 무공을 되찾고 내 힘으로 황궁에서 도망치자.’

백상궁은 십 년 후에야 황제의 눈에 들게 되니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다.

황궁의 담이 높고 시위들이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다지만 어디든지 길은 있기 마련이다.

경정은 어찌하면 몰래 궁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 훤히 꿰고 있었다.

‘일 년 정도 수련하면 될까?’

경정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소이자도 데리고 나가려면 일 년 정도 수련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어. 삼 년은 혹독하게 수련해야 할 거다. 스승님도 보고 싶지만 조금만 참자. 황궁 안에서 만나는 건 위험부담이 커. 스승님은 황궁 밖에서 살고 계시니 탈출한 뒤 만나는 것이 옳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갑갑했던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생각을 정리한 경정이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의 여인이 자신을 보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궁녀 수약은 처음 보는 백상궁의 분위기에 겁을 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경정은 자신의 침상에 쌓여 있는 옷가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네 이름이 뭐냐?”

“뭐라는 거요?”

“너는 내 처소에 배정받은 궁녀가 아니냐?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경정이 다짜고짜 하대하니 수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경정의 분위기가 험악하여 차마 그것을 겉으로 내보일 수 없었다.

“내. 내 이름은···. 수약이오.”

“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나이는 스물이 넘어 보이는데. 조만간 출궁하겠구나.”

올해 열여덟이 된 수약은 스물이 넘어 보인다는 경정의 말에 발끈했다.

“난 아직 스물을 넘기지 않았소.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열여덟이란 말이오.”

“그래?”

경정은 울분을 토해내는 수약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백상궁이 이토록 어린 궁녀에게 휘둘려 고된 노동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자신은 상궁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허름하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데 수약이라는 어린 궁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질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 그동안 바느질을 하며 번 돈이 어디로 들어갔을지 불 보듯 뻔했다.

경정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 스물도 안 된 궁녀 따위가 감히 윗전을 이리 모셔?”

“지금 뭘 잘못 먹었소?”

“그 말투부터 고쳐야겠구나.”

“...”

“너는 이제부터 내 앞에서 ‘예’ 또는 ‘아니요’ 단 두 가지 말만 할 수 있다.”

어느덧 수약의 지척에 다가온 경정은 그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궁녀면 궁녀답게 굴어. 너처럼 윗전을 무시하고 이익만 챙기려는 자들은 절대 오래 가지 못한다.”

수약은 경정을 밀어내고 싶었으나 그녀의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수약이 대답하지 않자 경정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당장 저 옷을 가지고 여기서 나가라. 난 바빠서 바느질할 시간이 없거든. 그리고 나가면 아침이 오기 전까지 나를 방해하지 마. 알아들었어?”

겁먹은 수약은 입을 꾹 닫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경정은 수약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대답해. 어서.”

수약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예.”

경정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손을 내 저었다.

“나가봐라.”

수약은 떨리는 몸을 두 팔로 부여잡고 간신히 뒤돌아섰다.

“잠깐!”

경정이 나가려는 수약을 부르자 그녀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침상 위에 쌓여 있는 옷은 가져가야지?”

“아? 예.”

수약은 비틀거리며 침상으로 다가왔고 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 홀로 남은 경정은 창문을 열고 침상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늘부터 수련 시작이다. 기다려라. 강호야. 비록 여인의 몸이 되었지만 나는 황궁을 탈출하여 자유롭게 강호를 주유하며 살 것이다.”

***

궁녀 수약은 지금 경양궁 담벼락에서 진귀인의 시녀인 소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요 며칠 사이 미칠 것 같았다.

소신에게 은자를 바쳐야 하는데 돈이 나올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등신 같은 백상궁을 쥐어짜는 것은 더는 할 수 없었다.

백상궁에게 일을 시켜 은자를 버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를 윗전으로 모시느라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폐하께서 찾지 않는 승은 상궁 주제에. 어디 잘났다고 나를 부려 먹으려고 들어!”

분노하던 수약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백상궁의 흉흉한 기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상궁. 고것이 미친것이 아니야?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이 그렇게 달라진단 말이야?”

그때 담벼락 안쪽에서 진귀인의 궁녀, 소신이 등장했다.

소신은 수약을 보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일찍 왔구나. 생각보다 은자를 빨리 구한 모양이구나.”

은자 이야기가 나오자 수약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서렸다.

수약이 미적거리자 소신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자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냐? 그렇다면 왜 나를 찾아온 것이지?”

“마마님.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시어요. 제가 사정이 있어 은자를 가져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뭐라?”

소신은 은자가 없다는 수약을 보며 인상을 썼다.

“마마님. 제가 사정이 생겨 은자는 구하지 못했으나 진귀인 마마님께 충성을 바치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제 충심을 알아주시어요.”

소신은 사정하는 수약을 보며 냉정한 웃음을 흘렸다.

소신은 돈을 받고 수약을 경양궁에 들일뿐, 그녀를 진귀인의 곁에 둘 생각은 없었다.

돈 때문에 주인을 버리는 노비에게 어찌 충성심을 기대하는가?

저런 이는 한번 쓰고 버릴 패이지.

순간 소신의 눈이 번뜩였다.

소신은 사정을 봐달라며 읍소하는 수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녕 진귀인 마마님의 노비가 되고 싶은 것이냐?”

“그럼요. 마마님. 저는 귀인 마마님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너의 충심이 갸륵하구나. 그럼, 너의 사정을 봐주겠다.”

“정말이십니까?”

수약은 소신의 말을 듣고 띌 듯이 기뻐했다.

소신은 수약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소신의 말을 들은 수약은 두 눈이 똥그래졌다.

“어때? 이 일을 처리 할 수 있겠느냐?”

“소인이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어차피 화를 입을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백상궁이 아니더냐? 이 일만 잘 처리하면 진귀인 마마께서 너를 경양궁에게 들이심은 물론이고 큰 상까지 내리실 것이다.”

수약은 잠시 고민하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내 그녀의 눈빛에 악독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백상궁. 주제도 모르고 마마님 행세를 했으니 어디 한번 당해보시오.’

수약은 환하게 웃으며 소신에게 답했다.

“마마님. 제가 한번 해보겠나이다.”

소신은 일을 맡기로 한 수약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너만 믿겠다.”

***

경정이 백상궁의 몸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경정은 그동안 심법을 운용하며 무인으로서의 기틀을 닦았다.

백상궁은 그동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살았는지 맑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맥 안에 쌓인 더러운 노폐물도 없었고 이대로 정진하면 조만간 정순한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내공이 아니라 외공이었다.

백상궁은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완의국(浣衣局, 황궁의 옷을 세탁하는 곳)을 거쳐 상의감(尙衣監, 옷을 만드는 곳)까지 다니며 일해 근력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여인이라 무공을 익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내공은 비급이나 기연을 얻으면 금방이라도 경지에 오를 수 있었지만, 외공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경정은 황궁 안에서 여인의 몸으로 어찌 훈련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난제로구나. 목검이라도 휘두를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할 터인데. 대체 어디서 훈련을 한단 말이냐?”

경정은 정 안 되면 구보라도 할 생각이었다.

열심히 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훈련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궁 안에서는 함부로 뛸 수도 없었다.

“난감하네. 어찌하지?”

경정이 고민하고 있는데 처소 바깥에서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이 황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들어와라.”

이내 문이 열리고 수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을 기만하고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수약은 경정을 두려워하여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경정은 이 모습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도 인자한 주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아직 식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왔지?”

“마마님.”

경정을 피해 다녔던 수약이 오늘은 웬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말해 보아라.”

“마마님. 날이 좋은데 어화원에 산책하러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갑자기 산책하러 가자고?”

“예.”

경정은 얌전히 서 있는 수약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나와 가고 싶은 것이냐? 내가 네 옆에 서서 꽃을 보길 원해?”

수약은 두려움에 떨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를 두려워하면서 함께 어화원에 가자고 꼬드겨?’

경정은 수약이 뭔가 노리는 것이 있다고 여겼다.

황궁 생활 4년에 무림맹 생활 6년을 겪은 경정이다.

내명부의 암투만큼 치열한 것이 환관들의 암투이고, 여인들의 계략만큼이나 너저분한 것이 협을 부르짖는 정파 놈들의 계략이다.

경정은 수약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한번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날이 좋으니 어디 한번 어화원에 산책이나 가보자. 앞장서라.”

수약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웃으며 답했다.

“예. 마마님.”

***

여름날의 어화원은 오전 나절에만 가볼 만했고 볕이 내리쬐는 오후부터는 인적이 뚝 끊긴다.

경정이 수약과 함께 어화원에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침 산책을 하는 비빈들로 가득했다.

마침 산책을 끝내고 궁으로 돌아가는 진귀인 일행이 경정의 앞에 섰다.

황궁의 법도를 잘 아는 경정은 옆으로 물러서서 진귀인에게 예를 올렸다.

진귀인은 품계가 낮은 상궁은 관심이 없는지 가마 위에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화귀인이 회임하여 진귀인이 심기가 불편하겠구나.’

궁의 돌아가는 사정이 눈에 훤한 경정은 진귀인의 표정을 보며 상황을 유추했다.

그때 경정의 눈에 진귀인의 측근 시녀인 소신과 눈을 마주치는 수약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라? 지금 눈을 마주친 게냐?’

경정은 소신과 수약이 서로 교분을 나눈 친우라서 눈길을 주고받은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것은 준비한 계략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을 하는 눈빛이었다.

경정은 수약이 대체 진귀인의 사람과 무슨 음모를 꾸민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며 어화원을 걸었다.

그때 수약이 생각에 빠진 경정을 불렀다.

“마마님. 이쪽으로 가시지요. 저기가 꽃을 감상하기 더 좋은 길입니다.”

“그래?”

“예. 마마님.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때 수약이 가리키는 길 너머로 화려한 가마가 보였다.

경정은 가마에 탄 후궁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화귀인 일행이구나.’

경정은 그제야 수약이 꾸민 계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이용하여 회임한 화귀인을 위험에 빠트리려는 것이겠군.’

경정은 눈에 뻔히 보이는 수약의 계략에 당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경정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화귀인의 가마 옆에서 간신처럼 웃는 환관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박혔다.

그는 소태자, 이강이였다.

수약은 멈춰선 경정을 보며 말했다.

“마마님. 어서 이쪽으로 가시지요.”

분노로 입술을 꽉 깨문 경정은 마음을 다스리며 답했다.

“그래. 가자. 나도 저 길로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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