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51)

황제의 여인이 되다.

빛바랜 자색(紫色) 천장.

오래된 나무 냄새.

경정은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자신은 방금 숨이 끊어졌는데 아직도 황궁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원한이 깊어 황궁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무서운 생각이 들자 경정은 몸을 떨었다.

‘황궁이라면 이제 치가 떨리는구나. 다음 생에는 돈에 팔려 환관이 되지도 않을 것이고, 황궁에 갇혀 억울한 죽음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협객이 되어 강호를 주유하고 살고 싶다. 강호인으로.’

경정은 어서 빨리 삼도천을 건너 윤회하기를 소원했다.

다음 생이란 것을 떠올리니 경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 가득 찼던 미소가 차갑게 식었다.

‘스승님······. 소이자······.’

경정은 함께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계략에 당해 죽은 것도 한스럽지만, 스승님과 친우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니 귀신이 되어 복수라도 하고 싶었다.

그때 경정의 귀에 삐거덕 소리가 들렸다.

경첩이 녹슬었는지 문소리가 귀신 소리처럼 기괴하게 들렸다.

경정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눈을 뜨는데 허연 무언가가 그의 얼굴로 떨어지고 있었다.

경정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공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동창에 발탁되어 무림맹에 파견까지 나간 그였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것이 그의 장기였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렸다.

경정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옷자락 속에 파묻혔다.

“이거 뭐야?”

경정은 자신을 덮친 옷을 치우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내 목소리가 왜 이러지?”

환관들의 목소리가 여성스럽다는 것은 편견이다.

물론 여성스러운 사람도 있을 테지만, 자궁 한 나이에 따라 남자다운 목소리를 가진 환관도 있다.

다른 소년들보다 늦게 거세한 경정도 중저음의 목소리를 지녀 여성스럽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경정의 목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예쁜 목소리를 가진 환관인 소이자보다 더 얇고 고왔다.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라고나 할까?

경정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내보려는데 옆에서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백상궁!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다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 겁니까?”

경정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돌렸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여인이 경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황궁에서 일하는 궁녀였다.

“백상궁.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요?”

“나 말입니까?”

“그럼 내가 백상궁한테 말하지. 귀신한테 말하는 거겠소?”

“아니······. 나는.”

경정은 자신이 귀신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백상궁이 상의감에서 옷을 찾아가지 않아서 상의감 궁녀가 나를 불렀단 말이오. 할 일이 태산인 내가 백상궁이 해야 할 일까지 떠맡아야겠소?”

“그런데 이보시오. 내가 왜 백상궁이요?”

경정은 자신을 백상궁이라 부르는 궁녀를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은 백 환관인데. 상궁이라니.

이것은 꿈이라 해도 지독한 악몽이다.

환관으로 죽은 것도 억울한데 궁인이 되는 꿈까지 꾸다니.

궁녀는 경정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백상궁. 지금 뭐 하는 거요? 일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거요? 나한테 그런 잔꾀는 통하지 않으니 집어치우시오.”

경정은 자신을 보며 싸늘하게 대하는 궁녀를 부여잡고 물었다.

“어차피 꿈인데 좀 살갑게 대해주시오. 그나저나 내 이름은 뭐요? 백상궁이라면 백가일 텐데.”

궁녀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경정을 보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지금 자신이 승은 상궁이라고 으스대는 거요? 본인의 처지를 잘 아셔야지. 폐하께서 술에 취해 단 한 번 찾으신 것뿐인데 말이오. 그런 주제에 아직 헛꿈을 꾸나 보오. 웃기지도 않는군.”

궁녀는 경정을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상의감에서 사흘 안에 바느질을 다 끝내야 한다고 했소. 다 끝내려면 잠잘 시간도 부족할 테니 나와는 노닥거릴 시간도 없겠지. 흥.”

궁녀는 마지막까지 경정을 비웃으며 사라졌다.

경정은 싸가지 없는 궁녀가 떠나자 주위를 둘러봤다.

환관이었던 그가 묵던 감란원과는 확실히 구조가 달랐다.

감란원도 집기라고는 낡은 탁자가 전부였는데 이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경정은 그제야 침상 옆에 놓인 거울을 발견했다.

여인들이 쓰는 온전한 거울이 아닌 깨진 조각이었다.

경정은 떨리는 손으로 깨진 거울을 들었다.

깨진 거울 안에는 얼굴이 유달리 하얀 귀엽게 생긴 여인이 보였다.

경정은 그 여인이 웬일인지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누구냐. 넌?”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던 경정은 화들짝 놀라서 거울을 놓치고 말았다.

깨진 거울은 바닥에 떨어져 희생이 불가할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경정은 믿을 수가 없었다.

거울 속의 여인은 죽기 전, 수레에서 봤던 그 여인이었다.

황제의 여인, 후궁 백경정.

***

궁녀 수약은 경양궁(景陽宮)의 돌담 아래에 섰다.

이내 경양궁에서 진귀인의 시녀인 소신이 나왔다.

수약과 소신의 나이는 엇비슷해 보였는데 모습은 천지 차이였다.

수약은 투박한 궁녀의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반해 소신은 여염집 아가씨처럼 곱게 꾸미고 있었다.

수약은 소신을 보자마자 굽신거리며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나를 보자고 했다고?”

소신은 거들먹거리며 수약의 인사를 받았다.

“지난번 소인이 청했던 일이 어찌 되었나?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경양궁에서 진귀인 마마님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었지?”

“예. 맞습니다.”

“그대는 지금 승은 상궁인 백상궁을 모시고 있지 않나?”

“그 여인은 지금까지도 황제 폐하를 모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둔한 자이옵니다. 어찌 그런 이를 주인으로 모실까요?”

수약은 주인의 욕을 하며 소신의 곁에 붙었다.

소신은 수약이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소매를 내밀었다.

수약의 손에서 은자 한 덩이가 나와 소신의 소매 속으로 쏙 하고 사라졌다.

소신은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입을 열었다.

“수약. 너는 일 처리가 빠르고 꽤 총명하니 마마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다.”

“정말로 그리 생각해 주시는 것입니까? 송구할 따름입니다.”

“화귀인 마마께서 회임하시어 진귀인 마마님의 심기가 불편하시다. 그러니 당장은 고할 수 없고. 이번 달 안에 기회를 봐서 너의 일을 고해보마. 우리는 그 전에 한 번 더 얼굴을 보자꾸나.”

소신이 다시 보자고 하자 수약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수약은 이내 얼굴을 바꾸고 간신처럼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어찌 명을 거절하겠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다시 보자꾸나.”

소신은 그 말을 끝으로 경양궁 안으로 쌩하니 들어갔다.

홀로 남은 수약은 소신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은자를 더 달라는 말이잖아. 큰일이네. 백상궁에게 뜯을 은자가 더는 없는데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수약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어쩔 수 없지. 상의감의 일감을 더 얻어와야겠어. 백상궁은 고생스럽겠지만 어쩌겠어? 언제까지 승은도 받지 못하는 백상궁의 곁에 붙어 있을 수 없는 노릇이잖아.”

결심을 굳힌 수약이 악독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

경정은 지금 감란원 앞에 서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온종일 황궁을 돌아본 후로 깨달았다.

경정은 과거로 회귀했다.

그것도 환관이 아닌 여자로.

무려 승은을 입은 황제의 여자로 말이다.

경정은 자신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죽기 전 수레에서 봤던 후궁 백경정에 몸에 빙의하여 회귀한 일이 놀라웠다.

믿기 힘들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감란원에서 나오는 환관들이 그 앞을 서성이는 경정을 힐끔 쳐다봤다.

이곳은 환관들이 기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인들은 근처에도 오지 않는다.

궁에서 환관과 궁녀가 은밀히 만나다 걸리면 목이 떨어질 죄이기 때문이다.

그때 딱 봐도 10대로 보이는 어린 환관이 감란원에서 나왔다.

경정은 몰래 그의 뒤를 쫓았다.

소년은 누군가 뒤따라오는 것도 모르고 총총걸음으로 어화원(御花園)으로 걸었다.

경정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어화원으로 가는 소년을 보며 다행이다 싶었다.

소년이 죽림을 지나고 있을 때 경정이 소년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소년은 경정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마마를 뵙습니다.”

다른 환관들은 경정의 옷차림을 보고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갔는데 소년은 아직 이곳에 물들지 않아 그를 마마라 부르며 예를 올렸다.

경정은 소년을 보며 물었다.

“물을 것이 있습니다.”

“소인에게 말씀이십니까?”

소년은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소년이라면 아는 것을 다 말해줄 것이었다.

경정은 자신이 사람을 잘 골랐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아십니까?”

소년은 그런 것을 왜 물어보냐는 듯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지금은 명선제 2년입니다. 정말로 그것을 모르셔서 물으시는 겁니까?”

명선제 2년.

그렇다면 자신이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다.

경정은 심호흡하며 소년에게 물었다.

“올봄에 내서당에서 새로운 환관이 들어왔지요?”

소년은 눈앞의 여인이 이상한 것을 묻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봄에는 신입 환관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도 작년 겨울에 입궁하였는걸요.”

“그래요?”

경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명선제 2년 봄에 입궁했다.

그런데 올봄에 입궁한 환관이 아무도 없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고민하던 경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환관 나리.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마마님.”

“말단 환관 중에 소이자라는 환관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경정은 소년이 소이자를 안다고 하자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소이자는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있습니까?”

“소이자는 회임하신 화귀인 마마님의 처소에서 일하다 잘못을 저질러 지금은 신형사(?刑司)에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경정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화원의 죽림에 경정의 비명이 퍼져나갔다.

경정은 재빨리 입을 닫고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은 여름이고 볕이 가장 뜨거운 오후라서 어화원을 거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소이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소인도 잘 모르겠고 소이자 대신에 지금은 소태자가 화귀인 마마의 처소에 들어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경정은 단박에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소태자. 이강. 이 개새끼가. 화귀인이 회임하니 덕을 보려고 그곳에서 일하는 소이자를 쳐내고 자리를 차지했구나.’

경정은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소년 환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제가 궁에 익숙지 않아 물어볼 사람이 없어 고생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났군요.”

“그런데 마마님. 소이자의 일은 어찌 물어보시는 겁니까?”

소년은 그제야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지 경정에게 물었다.

“먼 친척의 아드님이 환관으로 입궁했다기에 궁금하여 물은 것입니다.”

“그러시군요. 더 하문하실 것이 없으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소년이 떠나자 경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강. 이 새끼를 어떻게 족치지?”

***

늦은 시각, 백상궁이 기거하는 낡은 처소의 문이 열렸다.

경정은 처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수약과 눈이 마주쳤다.

수약은 경정을 보자마자 달려와 따져 물었다.

“옷가지가 그대로인데 어찌 된 것이오? 대체 무얼 하다가 지금 오냔 말이오?”

가뜩이나 소이자의 일로 심기가 불편한 경정은 고개를 들어 수약을 바라봤다.

아무리 황제가 찾지 않는 이름뿐인 승은 상궁이라지만 고작 궁녀가 상궁에게 이리 대들어?

침상 위에는 아침에 수약이 가져온 옷보다 배는 많아 보이는 옷이 쌓여 있었다.

“상의감에서 바느질할 옷이 더 있다고 해서 가져왔소. 다음 주까지는 죄다 처리해서 보내야 하니 어서 일하시오.”

경정은 수약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저걸 다 바느질 하려면 일주일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바늘만 잡고 있어야 할 거다.

경정은 수약을 무시하고 침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백상궁.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요?”

“그래. 무시하는 거다.”

“아직도 본인이 폐하의 총애를 얻을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소? 백상궁의 처지가 어떠한지 내가 똑똑히 알려주겠소.”

경정에게 달려들던 수약이 그 자리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백. 백상궁······?”

수약은 오늘따라 백상궁이 낯설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백상궁은 유약하고 소심하여 좌지우지하기 편했던 등신이 아니었다.

경정은 번뜩이는 안광을 내뿜으며 수약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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