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은 강호에서 살겠다.
입안에 사기그릇 조각을 감춘 경정이 이강을 노려봤다.
이강은 경정이 내뿜는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단전을 폐했다고 하지 않았나? 왜 저렇게 흉악한 기운을 쏟아내는 것이냐?”
이강의 불호령에 시위들이 경정의 몸을 확인했다.
“단전은 깨졌습니다. 저자의 몸 안에는 한 톨의 내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팔과 다리의 경맥도 끊어놓아 다시는 검을 잡지도 일어서지도 못할 겁니다. 안심하시지요. 이 공공.”
이강은 폐인이 된 주제에 독기가 가득한 경정을 냉소하며 응시했다.
“이 공공. 걱정되시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을 칠까요?”
시위의 물음에 이강이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알겠으니 너희는 나가 있어라.”
“죄인과 단둘이 계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무공은커녕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를 어찌 두려워할까?”
“장인 태감께서 저희에게 이 공공을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밀실 밖에 서서 기다려라. 내가 부르면 지체하지 말고 달려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강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이자를 바라봤다.
“환관 소이자는 법도를 어겼으니 법대로 처결해라.”
“예. 이 공공.”
시위들은 이강의 분부를 받고 소이자를 밀실 밖으로 끌어냈다.
“소이자!”
“경정. 살아남아야 해. 죽으면 안 돼.”
“소이자!”
경정이 애타게 소이자를 불렀으나 시위들은 소이자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그들이 나가자 밀실 안이 조용해졌다.
경정은 이강을 보며 꾸짖듯 말했다.
“소태자. 감히 네 놈이 황궁에서 일을 꾸며?”
“소태자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 지금 황궁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나에게 그저 소태자일 뿐이다. 동창 발탁 시험에서 내게 개처럼 발린 소태자 말이다.”
경정이 비웃자 이강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네 놈이 상황 파악이 덜된 모양이구나.”
“내가 어찌 모르겠어? 너는 서창의 엽 태감을 위해 일하는 것일 테지. 네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알고 있다. 나만 잡으면 될 일이지 왜 엄세록 수령님을 이 일에 끌어들였느냐?”
“이미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엽 태감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 주인이 원하시는 일인데 어찌 내가 거절하겠느냐?”
경정과 이강은 지난날 내서당(內書堂)에서 함께 지내며 환관 수업을 받던 동무였다.
이강은 일찌감치 황궁에 들어갔지만, 환관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경정은 몇 년이나 내서당에 있으며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간신히 입궁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경정이 금의위 도통 엄세록에게 발탁되어 동창에 들어간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강은 꿈에 그리던 동창 시험에서 그는 떨어지고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던 경정이 뽑혔을 때의 그 날이 떠올랐다.
그의 일생에서 제일 치욕스러운 기억이었다.
이강은 묶여 있는 경정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밀실 벽에 걸린 채찍을 꺼내든 이강은 그것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경정은 내공을 잃은 몸으로 채찍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한대도 피하지 않았다.
“분풀이는 다 했느냐? 왜 네가 동창 시험에서 떨어졌는지 그 이유가 떠오르는구나. 채찍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주제에 감히 동창에 들어가 무공을 익히려고 들어? 하늘이 웃고 땅이 한탄할 일이구나.”
“뭐라?”
경정은 폐인이 되어서도 굽히지 않고 이강을 향해 악담을 늘어놓았다.
분노에 치를 떨었던 이강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잊고 있었군. 너란 놈은 항상 위기에 몰릴 때마다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고, 강하게 나오곤 했었지. 백경정. 나는 누구보다 너를 잘 알고 있다.”
이강이 정곡을 짚자 경정은 속으로 탄식했다.
지금은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지만 어린 날에는 환관이 되기 위해 동고동락하며 지낸 사이다.
이강은 경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군.”
“인정하는 것인가?”
경정은 목을 쭉 빼며 이강에게 말했다.
“어서 죽여라. 복수를 하란 말이다.”
이강은 죽기를 결심한 경정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너를 죽여서 무엇을 할까?”
“네가 나를 잘 알듯이 나도 너란 놈을 잘 안다. 너는 의심이 많은 놈이라서 후환을 남기지 않고 싶을 텐데?”
“네가 알고 있는 무공비급을 죄다 토해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무공비급이라고?”
“무림맹에도 엽 태감께서 심어놓은 간자가 있다. 네가 그곳에서 숨겨진 무공비급을 조사한 것을 들어 알고 있다.”
경정은 그제야 이강이 자신을 살려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공비급이라니 당치도 않다.
자신은 강호에 흩어진 무림 비사를 수집하여 편찬하는 잡무를 맡았을 뿐이다.
“네가 무림맹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이 바로 검신(劍神)의 비급을 정리하는 일이었지. 넌 그것을 끝내자마자 황궁으로 돌아왔어. 그것은 분명 엄세록이 검신의 비급을 원해서 일 테지.”
경정은 이강이 하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이라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경정이 무림맹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검신의 야사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무림맹에서 그는 비급의 '비'자도 보지 못했다.
그의 내공도 그저 무림맹 중견 고수 정도이고 사용하는 심법과 검법도 무림맹원이라면 모두가 배우는 것이었다.
경정은 이강이 이토록 자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정은 독기 어린 눈빛을 풀고 이강을 올려다봤다.
“소태자.”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하였다.”
“내가 아는 무공비급을 죄다 알려주겠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
경정이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자 이강은 움찔했다.
무슨 간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도 해보았지만, 상황을 역전할 기회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강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경정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이제야 상황 파악을 제대로 했구나.”
경정은 이강이 다가오자 자신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를 속으로 가늠했다.
그의 혀 아래에는 사기그릇 조각이 숨겨져 있다.
양팔과 다리가 쇠사슬에 묶여 있으니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이강은 아직도 의심하는지 거리를 두고 섰다.
경정은 그것을 보고 바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에 놀란 이강이 어깨를 움찔했다.
경정은 그대로 바닥에 고개를 박고는 이강에게 읍소했다.
“제발 목숨만 살려줘. 충성을 다 하겠네.”
경정이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고 빌자 이강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개를 숙인 경정의 눈빛에 섬뜩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이강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네가 알고 있는 비급을 다 털어놓으면 너는 살 것이다.”
이강은 동창의 촉망받는 고수가 된 경정이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은 것을 보고 속이 시원했다.
지난날 동창 입문 시험에서 떨어진 치욕이 한꺼번에 씻기는듯했다.
이강은 의심을 거두고 경정의 앞으로 걸어갔다.
경정은 이강의 가죽 신이 눈앞에 보이자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검신의 비급을······.”
이강의 몸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강의 발을 손으로 쳐낸 경정은 몰려오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참아야 한다. 마지막 기회야.’
경정은 재빨리 손을 뻗어 떨어지는 이강의 목을 낚아채 비틀었다.
하지만 어느새 자세를 잡은 이강은 경정의 팔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왔고 큰소리로 외쳤다.
“시위! 시위!!”
경정은 이강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으나 아직도 이강은 그의 지척에 서 있었다.
경정은 혀 아래 숨겨놓은 그릇 조각을 입에 물고 이강에게 돌진했다.
‘철컹!’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더는 움직일 수 없는 그때.
경정은 이강의 얼굴을 사선으로 그었다.
“크악!”
쇠사슬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목을 그을 수 있었을 텐데.
저놈을 끝장낼 수 있었을 텐데.
경정은 아쉬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팔다리는 완전히 힘을 잃고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시야로 얼굴을 가리며 울부짖는 이강이 보였다.
경정은 그제야 웃으며 원수의 피가 묻은 사기그릇 조각을 삼켰다.
‘개로 태어날지언정 네 허수아비가 되어 살지는 않겠다.’
경정은 웃으며 눈을 감았다.
***
덜컥. 덜컥.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 안의 땅은 황제와 비빈들의 가마가 지나다녀야 했기에 도로포장이 잘 되어 있다.
여전히 황궁 안인데도 불구하고 수레가 덜컥일 정도로 도로의 상태가 나빠졌다면 이는 이곳이 궁의 외곽이라는 소리다.
경정은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사기그릇 조각을 삼켜 폐가 찢기고 내장이 다 찢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이 남아있다니.
경정은 지금 수레에 실려 황궁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수레에는 궁에서 나온 오물통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수레가 멈췄다.
수레를 몰던 환관들이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은 죄를 지은 궁인들이 가는 신자고(辛者?) 소속의 환관이었다.
“서창의 이 공공께서 크게 다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가?”
“이 공공? 소태자를 말하는 건가?”“예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 밤중에 똥 수레 곁으로 누가 올까? 그나저나 소태자가 어딜 다쳤는가?”
“누군가 그의 얼굴 한쪽을 칼로 도륙해 놨다고 하네. 왼쪽 눈은 실명 상태이고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궁에서 그런 일을 당한 거야? 자객이라도 들었나?”
“그거야 나도 모르지. 우리는 육궁 안쪽으로는 못 들어가는 신세인데 어찌 알겠는가?”
수레에 누워있는 경정은 이강의 불운한 소식을 듣고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비록 원수를 죽이지는 못했으나 평생을 가지고 갈 상처를 남겼으니 반쪽짜리 복수라도 복수는 복수였다.
신자고의 환관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귀인이 연못에 빠져 돌아가신 이야기는 들었는가?”
“십 년 만에 총애를 받아 회임했다는 그 백귀인 말인가?”
“그렇다네. 지금 그 일로 내명부가 난리가 났네. 백귀인을 모시던 시녀들이 지금 그 일로 신형사(?刑司)에 불려가 고신을 받고 있다는군.”
“아이고. 황제 폐하께서 군 시찰을 나간 이때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이를 어찌할꼬.”
“백귀인의 시신이 물에 퉁퉁 부어서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라네. 배 속에 있는 용종도 같이 죽었으니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피바람이 불 것이네.”
피바람이라.
수레에 누워있던 경정은 생각했다.
승은 상궁으로 십 년간 아무 일도 없이 잘 지낸 백귀인이 회임하자마자 연못에 빠져 죽었다.
내명부의 암투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백귀인의 이름이 나와 같은 백경정이었지. 참으로 재수 없는 이름이구나. 같은 이름을 가진 궁인이 동시에 횡액을 당했으니 말이야.’
그때 스산한 바람이 불더니 경정의 옆에 있던 거적때기가 옆으로 떨어졌다.
거적의 안쪽에서 피부가 백옥같이 새하얀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의 입가에 검고 푸른 피가 굳어 있었고 무엇이 그리 억울했는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경정은 거적에 쌓인 시체를 보며 놀랐다.
‘······백귀인?’
그 시체는 다름 아닌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백귀인이었다.
‘독에 당한 것인가?’
경정은 백귀인의 입가에 남은 검붉은 피를 보며 그녀가 독에 당해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연못에 빠져 죽은 이는 다른 사람이구나. 독살된 것을 숨기기 위해 가짜로 바꿔치기하고 진짜는 이렇게 수레에 실어 궁 밖으로 내보내려는 것이야.’
경정은 후궁들의 암투와 계략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수법이 잔혹한지는 몰랐다.
경정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백귀인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백귀인이나 자신이나 이제 궁에서 잘 살 일만 남았는데 계략에 당해 이렇게 수레에 실린 몸이 되었다.
경정은 점점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생명도 이제 곧 끊어지리라.
경정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들었다.
쇠사슬에 뚫려 너덜너덜해진 손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경정은 남은 힘을 쥐어 짜냈다.
드디어 그의 손이 움직였고 그것은 백귀인의 얼굴로 향했다.
경정의 차가운 손이 백귀인의 부릅뜬 눈꺼풀에 닿았다.
‘환관이 후궁의 몸을 만졌으니 죽을 죄를 지었군.’
경정은 냉소하며 백귀인의 부릅뜬 눈을 감겨줬다.
눈을 감은 백귀인은 아까와 다르게 편히 잠든 것 같이 보였다.
경정은 눈을 감고 읊조렸다.
‘우리 두 사람. 부디 극락왕생합시다. 다음 생에는 다시는 황궁에 들어오지 말고 강호에서 자유롭게 살다 갑시다.’
환관 백경정은 그렇게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