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51)

궁으로 돌아오다.

프롤로그 - 후궁으로 성공하기

황제 폐하의 후궁으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암투에 능해야 한다.

둘째.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다른 후궁의 속내를 파악해야 한다.

셋째. 윗전 마마님을 내 뒷배로 만들어야 한다.

넷째. 화려한 언변으로 후궁들을 제압해야 한다.

십 년 차 환관인 나, 백경정은 오늘 후궁으로 회귀했다.

폐하의 총애는커녕 언제 죽어도 모를 승은 상궁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능력이 있다.

첫째. 그동안 궁에서 지켜본 암투가 태산이다.

둘째. 회귀의 기억으로 누가 악인인지 알고 있다.

셋째. 윗전 마마님들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꿰고 있다.

넷째.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언변에 능하다.

내가 후궁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잠깐 허튼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후궁이란 능력이 출중하다 하여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폐하의 총애가 있어야 하는 법.

폐하께서 겉모습만 여인인 나를 총애하실 리가 없지.

그냥 무공을 되찾아 황궁에서 도망치자.

이렇게 마음먹은 지 딱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어느새 나는 폐하의 총비(寵妃)가 되어 있었다.

***

1화 - 궁으로 돌아오다.

빛바랜 자색(紫色) 천장.

오래된 나무 냄새.

감란원(咸丹院)에 도착한 경정은 짐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육 년 만이로구나. 드디어 궁으로 돌아왔어.”

경정은 침상 구석으로 걸어갔다.

품계가 낮은 환관들의 숙소인 이곳은 황궁 안에 있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낡아 갈라진 벽에서는 칼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이곳은 여전하구나. 회칠 한 번만 해주면 될 것을. 무엇이 어렵다고 해주질 않는 게야.”

경정은 갈라진 벽을 만지작거리며 무시당하고 괴롭힘당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못 건드려. 난 이제 동창(東廠)의 고수니까.”

가진 것 하나 없는 환관 백경정(白倞挺)은 이제 없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동창 위사가 된 경정의 앞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감란원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기 누구요? 왜 남의 자리에 앉아 있소?”

경정은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환관의 목소리를 듣고 두 눈이 커졌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 환관인가? 아직 환복하지 않고 뭘 하는 게냐? 그리고 그 자리는 너의 자리가 아니니 당장 일어서라!”

경정은 외로운 황궁 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의지했던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정이 천천히 일어서서 뒤 돌아섰다.

콧김을 내며 달려오던 환관이 마주하는 사내를 보며 놀라 소리쳤다.

“경정이냐?”

“그래. 나다. 백경정이 돌아왔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소이자.”

“정말 경정이야? 정말로 네가 돌아온 것이야?”“나 없는 동안 눈이라도 삐었어? 보라고.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동창 위사 백경정님이시다.”

소이자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친구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와 몸집이 비슷했던 비실비실했던 친구는 무림맹에서 6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와! 백경정. 너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환골탈태했어.”

“환골탈태는 무슨. 강호인들이 들으면 웃겠다.”

“아니야.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아. 네가 내 동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소이자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야. 소이자. 왜 울어?”

“나도 모르겠다. 왜 눈물이 나지?”

경정은 어린아이처럼 우는 소이자를 옆으로 끌어당기며 앉혔다.

“소이자. 내가 없는 동안 황궁에서 있었던 일 좀 이야기해줘.”

소이자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경정을 쳐다봤다.

그의 동무는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높은 신분이 되어 돌아왔지만, 눈빛은 과거와 똑같았다.

소이자는 변함없는 친구를 보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궁은 그동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

장인 태감 엽성의 앞에 환관 이강이 서 있다.

눈썹이 하얗게 센 엽 태감은 차향을 음미하며 이강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백경정이 돌아왔습니다. 공공.”

엽 태감은 아무 말 없이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만족한 듯 웃었다.

“이번에 서주에서 진상한 차가 아주 훌륭하구나.”

“몇 년간 수해가 발생하지 않아 차 농사가 잘되었지요.”

“오랫동안 태평성세가 지속되니 이는 모두 황제 폐하의 은덕이지.”

“공공과 같은 분이 폐하의 옆에서 보좌하시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이강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엽 태감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엊그제 시찰을 나가셨습니다. 변방의 기성군까지 돌아보고 오신다니 족히 보름은 걸리는 여정이지요. 때가 아주 좋습니다.”

“때가 좋다라.”

“금의위(錦衣衛) 수령 엄세록은 이번 시찰에 따라가지 않았고 엄도통의 제자인 백경정도 마침 무림맹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강의 말에 엽 태감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둘을 동시에 없애면 황제 폐하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엄세록은 금의위의 수령이다. 그의 무공이 출중할진대 어찌 우리 힘으로 죽일 수 있겠느냐?”

이강은 웃으며 소매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항우도 쓰러트릴 수 있는 극독입니다. 엄세록이 만독불침도 아닌데 어찌 이것을 마시고 살 수 있겠습니까?”

“무림맹에 파견되었다는 동창 시위도 그 독약으로 죽일 셈이냐?”

“그자는 살려야죠. 누군가는 살아남아 엄세록이 죽은 죄를 짊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엽 태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무림맹에서 갓 돌아온 제자가 스승을 죽였다?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군. 이유는 만들어 놓았느냐?”

“그것이야말로 차고 넘치지요. 엄세록이 약속을 어겨 동창의 시위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고 했을 수도 있고, 무림맹에서 힘을 키워 오만방자해진 제자가 스승에게 덤볐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오랫동안 내 아래에 있더니 수완이 꽤 훌륭해졌구나.”

“모두 공공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금의위와 동창의 세력을 한 번에 꺾어놓는 일이니 신중히 처리해라.”

“명심하겠나이다.”

***

소이자는 침을 튀기며 황궁 안의 사건을 떠들어댔다.

“지금 백귀인이 받는 총애가 엄청나. 궁에 오래 계신 환관과 궁녀도 이렇게 총애를 받는 후궁은 본 적이 없대.”

“백귀인? 황궁에 백 씨 후궁도 있었어?”

“너와 이름이 같은 백경정 마마님이잖아. 예전에 상의감에서 일했던 승은 상궁 말이야. 기억 안 나? 승은을 입긴 했는데 폐하께서 찾아주시지 않아 바느질로 돈을 벌어서 먹고살았잖아.”

“아! 기억난다. 우리도 가끔 일거리를 맡겼었지. 그런데 그분은 나이가 서른이 다 되지 않았나?”

“백귀인은 올해로 서른네 살이 되셨어.”

황제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던 후궁이 서른 살이 넘어서 총애를 얻고 회임까지 하다니.

확실히 소이자가 흥분하며 떠들만한 대사건이긴 했다.

“지금 내명부는 화귀비의 세상이야.”

“벌써 귀비가 되셨구나. 내가 무림맹에 갈 때까지만 해도 화빈이셨는데.”

“화귀비께서 백귀인을 어찌나 싫어하시는지 몰라. 우리 같은 힘없는 환관과 궁녀들만 괴로울 뿐이지.”

“그래도 백귀인이 회임하셨다니 아무도 못 건드리겠네.”

“그렇긴 하지.”

소이자와 경정이 그동안 못했던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감란원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얼마 전에 궁에 들어온 신입 환관이었다.

어린 소년은 경정을 보자마자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백 공공.”

“공공이라고? 와. 나 이제 공공이라고 불리는 거야?”

경정은 기쁨을 감추고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백 공공이다. 말해 보아라.”

“엄 수령님께서 찾으십니다."

”혹시 금의위의 엄세록 도통(徒統)을 말하는 것이냐?"

“그러합니다. 백 공공. 이제는 도통이 아니라 수령님이시지요.”

경정은 스승님이 금의위 수령 자리에 올랐다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경정은 소이자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저기 있는 짐을 풀어봐. 무림맹이 있는 무안에 계화가 유명해. 너를 주려고 계화떡(桂花?)을 사 왔으니 꺼내서 먹어.”

소이자는 친구가 자신을 주려고 간식을 사 왔다는 말에 웃음을 흘렸다.

경정은 다시 근엄한 얼굴로 돌아와 어린 환관에게 말했다.

“앞장서라.”

***

육궁(六宮)과 한참 떨어진 황궁의 동쪽 끝까지 간 경정은 청초각(淸楚閣)이라는 낡은 전각 앞에 섰다.

“엄세록 수령님께서 여기서 나를 기다리신다고?”

“예. 소인은 말을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정은 기분이 이상했다.

엄세록의 성격을 보면 이런 은밀한 곳으로 자신을 불렀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육 년 동안 황궁의 정세가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 스승이 자신을 이런 후미진 곳으로 부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경정은 의심을 거두고 청초각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나는 동창 고수다. 설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 한 몸을 지킬 힘은 있어.’

청초각은 궁에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황폐했다.

경정은 무성하게 핀 잡초를 해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님. 제자 백경정이 돌아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대낮이었으나 전각 안은 어둡고 음침했다.

고개를 들어 안쪽까지 살피니 누군가의 그림자가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스승님. 거기 계십니까?”

경정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어두워서 주위를 살필 수 없자 경정은 품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들었다.

‘휘릭.’

불꽃이 터지며 화섭자에 불이 붙었다.

경정은 옆에 거미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촛대를 발견하고 그것에 불을 붙였다.

그제야 전각 안이 밝아지고 사물이 분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경정은 목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경정은 순간 놀라서 눈이 커졌다.

‘연근산(軟根散)이다.’

경정은 즉시 촛대를 버리고 전각 바깥으로 탈출했다.

무림맹에서 일하며 이런 함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불꽃이 연소하며 반응해 연근산을 내뿜는 기관.

불을 켜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고수를 잡기에 더없이 훌륭한 기관이다.

경정은 재빨리 전각 밖으로 탈출했으나 이미 연근산을 맡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때 나타난 시위들이 주저앉은 경정의 양팔을 잡고 무릎 꿇렸다.

‘연근산뿐만 아니라 마취제까지 섞였구나. 고얀 놈들.’

경정이 마취제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져 있는데 전각 안에서 얼굴을 가린 한 사내가 나왔다.

그는 금의위 수령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스승님!”

사내가 얼굴을 가렸던 천을 벗어내자 경정은 그제야 그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는 다름 아닌 경정의 내서당(內書堂, 환관 수련원) 동기인 이강이었다.

“네가 어찌 나를······.”

경정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떠보니 어두운 지하 밀실이었다.

경정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환관들을 암암리에 처리할 때 사용하는 감란원 안에 숨겨진 밀실이었다.

경정은 마취제가 풀리는지 전신에 고통이 엄습해왔다.

밖은 초여름이라 훈훈한데 지금 경정의 몸은 북해빙궁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경정의 몸은 마치 한겨울의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경정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몸뚱이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경정은 고개를 들었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팔다리가 커다란 쇠꼬챙이에 의해 뚫려있었다.

무공을 잘 아는 이가 혈 자리를 골라 뚫어 놓은 것이었다.

경정은 망가진 그의 몸을 보고 몸을 떨었다.

이 밀실 안을 탈출한다 해도 그는 다시 무공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은 스승님을 보러 간 것인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때 밀실 문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정은 꿰뚫린 몸으로 밀실 문을 노려봤다.

이내 육중한 돌문이 열렸고 아는 얼굴이 고개를 쑥하고 내밀었다.

“경정!”

그는 경정의 친우, 소이자였다.

***

소이자의 말을 들은 경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다고?”

“네가 엄세록 수령님을 죽였다는 소문이 황궁 안에 자자해. 넌 시위를 피해 도망치다가 잡혀서 죽었고.”

“말도 안 돼. 내가 스승님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난 무슨 짓을 해도 스승님을 이길 수 없어.”

“네가 엄 수령님을 죽일 때 사용한 독약도 함께 발견됐어.”

경정은 순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도 함정에 당한 것처럼 엄세록도 당한 것이다.

엄세록의 무공이 제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황제가 계신 지엄한 궁에서 극독에 당할 거라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경정은 스승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생각에 원통했다.

“경정. 이것 좀 마셔. 내가 죽을 끓여왔어.”

소이자가 따뜻한 죽 그릇을 경정에게 내밀었다.

경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죽을 싸 들고 찾아온 친우를 보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소이자. 당장 이곳을 떠나.”

“이걸 마시는 걸 보고 갈게.”

“바보야. 너까지 연루될 수 있어. 떠나라고.”

경정은 죽그릇을 들고 울고 있는 소이자를 보며 눈을 감았다.

자신은 악독한 수에 걸려들었다.

무림맹에 파견되는 행운을 누리고, 궁에 돌아와 동창 위사로 떳떳하게 살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바보 같구나. 허망하게 당했어.’

경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육중한 밀실의 문이 열리고 시위들이 등장했다.

시위의 복색을 보니 동창의 반대 세력인 서창(西廠)의 것이었다.

경정은 그제야 누가 흉계를 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소이자는 갑자기 들이닥친 시위를 보고 놀라 죽그릇을 놓쳤고 차가운 밀실 안에 깨진 파편이 흩어졌다.

경정은 서창과 함께 들어온 이강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숙여 바닥에서 깨진 사기그릇 조각을 입에 물었다.

‘이대로 혼자 죽지 않는다. 이강. 너는 내가 꼭 지옥으로 데려가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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