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423화 (423/425)

423화

스륵.

고진유는 한 걸음 뒤로 움직이며 비수의 살기에서 비켜섰다.

흑의인이 펼친 비수는 스스로 자신감을 내보인 만큼 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비수를 피한 고진유를 보며 말했다.

“빠르군.”

“당신이 느린 게 아닌가? 근데 생각보다 약한걸.”

“크크크. 그렇게 보이겠지.”

“…….”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지?”

흑의인의 안광이 번쩍거렸다.

순간, 고진유는 마치 허공 속에 떠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기습.’

고진유는 가슴을 지나가는 그의 비수를 보며 한 걸음 뒤로 피했다.

조금 전과 같은 공격.

고진유의 뒤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비수가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다.

“하압.”

고진유는 기합과 함께 사의검을 뽑은 뒤 비수를 막아냈다.

“제법인걸…… 그렇다면 다시 해볼까?”

그의 안광이 한 번 더 번쩍거렸다.

또다시 처음부터 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고진유의 가슴을 지나가는 비수, 그리고 바로 뒤에서 나타난 비수를 막아내면 새롭게 허리에서 또 다른 비수가 나타났다.

타앗!

고진유는 다시금 허리를 오른 방향으로 비틀며 비수를 피했다.

스걱-

세 번째 이어진 공격에 스치듯 상의 자락이 잘려 나갔다.

‘이건…….’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군. 이 공간은 시간을 조절하는 진법이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처음부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공간일 터.

‘그렇다면……!’

고진유는 그의 안광이 빛나는 순간을 기다렸다.

‘지금이다.’

안광이 번쩍이는 동시에 고진유는 눈을 감으며 정신을 그대로 유지했다.

휘익!

상대의 비수가 다가왔다.

‘역시…….’

가볍게 피한 뒤 두 번째도 원래대로 피했다. 곧바로 세 번째 비수가 허리를 향해 다가왔다.

오른 방향으로 틀어야 했지만,

“당신은 실수했다.”

휙!

고진유는 몸을 왼 방향으로 회전했다.

당황한 흑의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쉬이이이익-

머리 위에서 사의검의 검강이 떨어졌다.

그의 눈앞으로 떨어지는 홍매화.

흑의인은 홍매화를 보면서도 움직일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어, 어떻게……?”

흑의인은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휘청거리며 넘어질 듯했다.

“보아하니 믿지 못하는 표정이구려.”

그는 고진유를 노려보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당신은 너무 자만했어. 바보가 아닌 이상 당신이 어떻게 공격하는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소?”

“절대로 알 수 없다. 믿을 수 없어.”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무적공간 안은 자신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믿었다.

슈우우욱-

고진유는 사의검을 앞으로 내밀며 그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찔렀다.

“아아아악!”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흑의인의 숨이 끊어졌다.

파아앗!

무적공간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 * *

명왕문 앞에 섰다.

‘이곳인가?’

정말로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문 건너편에 명왕이 있을 것이었다.

끼이이익-

고진유는 힘을 주며 문을 밀었다.

천천히 안으로 열리는 문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람을 가른 그가 명왕전으로 들어섰다.

휙휙.

고진유와 거리를 유지하며 열 명의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옆에서 따라오기만 할 뿐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당장 공격할 기색은 없군.’

고진유는 흑의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크크크…….”

명왕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명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홀로 몰래 들어온 것을 보니 그놈이 배신을 했군.”

“…….”

고진유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이건 빼도 박도 못 하겠네.’

명왕좌에 앉아 있는 노인.

그는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얼굴이었다.

“실제 얼굴로는 서로 처음 마주 보는군. 안 그런가?”

“그렇군요.”

“혹시 그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전부 잊었소이다. 쓸데없는 말이라서.”

“크하하하하!”

명왕은 대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앞에서 너무나 건방진 녀석이 아닌가.

“역시 내 핏줄이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소한 하나는 성공했군.”

“…….”

“일단 네놈과 정리를 하기 전에 마무리 지을 게 있군.”

명왕은 흑의인들을 보며 명령을 내렸다.

“배신자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백향목을 터뜨려라.”

휘익!

흑의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전에서 사라졌다.

“큭…… 저들이 어디에 가는지 아느냐?”

“백향목을 터뜨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군.”

명왕은 고진유의 표정을 보았다.

백향목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의외였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지도 알고 있겠군.”

“물론 압니다. 하지만 별일 없을 테죠.”

“그게…… 무슨 말이지?”

“신무신단의 해독제를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명왕의 눈에 살기가 순간 솟구쳤다.

“그것을 이미 풀었다는 것이더냐? 언제?”

“여기로 들어오는 길에 조금 나누어 주었소이다.”

“왜…… 그 짓을 했지? 이놈들은 극일가의 원수이거늘.”

고진유는 그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극일가의 전대 가주였던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소만.”

“하, 하하하핫!”

명왕은 또 한 번 대소를 터뜨렸다.

“명부의 핏줄이라 이들이 남들 같지 않은 모양이지?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말렸거늘. 그놈이 말을 안 듣더군. 그때 차라리 죽여 버렸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아쉬워.”

“당신에게 자식은 의미가 없군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현재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니까.”

“그렇군요. 저도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소이다.”

스윽.

명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당신도 마찬가지지 않겠소이까?”

“크큭…… 그렇다면 누가 이기는지 확인을 해볼 시간이겠군.”

“그렇게 하죠.”

“싸우는 건 이곳이 아니다. 따라와라.”

스르륵.

명왕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고진유도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 * *

사방이 막힌 동굴이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은 자신들이 내려온 뻥 뚫린 천장밖에 없었다.

명왕은 아래로 내려온 고진유를 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고진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 전체에서 명부의 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곳이 바로 명부의 원기가 시작되는 명왕동정이란 곳이다.”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지요?”

“크크크. 어차피 명부의 맥은 이어져 나가야 하지 않겠나.”

“…….”

“둘 중 한 명이 죽는다면 이기는 자가 명왕이 되는 것이지. 명왕이 되면 극일가의 가주보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명왕이 되고자 했소이까?”

“아직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명왕이 되는 순간 깨닫게 되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파아아앗!!

은빛의 전신에서 섬광이 사방으로 향해 뻗어 나갔다.

콰아아아앙-!!

용린기에 의해 명왕동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명왕의 눈이 커지면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짓이더냐? 그만두지 못할까?”

그는 재빨리 고진유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미 무너져 내리는 명왕동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타앗!

고진유는 신법을 펼치며 명왕동정에서 빠져나왔다.

두두두두두-

땅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명왕동정은 거의 흔적도 없이 바닥에 묻혔다.

“미친…… 새끼…….”

고진유의 뒤로 내려선 명왕의 얼굴은 야수보다 차가웠다.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모르겠소만.”

“명왕부의 심장을 무너뜨렸다. 네놈이 한 짓 때문에 이곳이 흔적도 없이 무너지게 될 거란 말이다!”

“잘됐군요.”

“뭐라?”

명왕은 어이가 없었다.

명왕부가 무너진다면 자신들조차 매몰되어 죽을 수 있었다.

휘이이익!

그때 고진유의 곁으로 기척이 빠르게 다가왔다.

“진유 형!”

명왕존과 함께 신무신단의 해독제를 푼 뒤 고진유의 기를 찾아온 것이었다.

“인양아, 명왕부가 무너진다. 지금 당장 모두 데리고 나가.”

“네? 혀, 형은?”

“바로 따라갈게. 빨리 가.”

“아, 알겠어요! 꼭 나오세요!”

“형이 누군지 알지? 나중에 밖에서 보자.”

“네!”

인양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들어왔던 방향을 따라 나갔다.

세상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밖에서 보자고 약속을 한 이상 그는 나올 게 틀림없었다.

우우우웅-

점점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커져만 갔다.

밖으로 나간 인양의 앞으로 명왕존이 다급하게 나타났다.

“무슨 일이오?”

“진유 형이 이곳이 무너진다고 했소.”

“설마…… 명왕동정이……?”

명왕존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알아챘다.

명왕부를 지탱하는 힘이 사라졌다면 그의 말대로 무너질 것이었다.

“빨리 나가도록 하죠.”

“그는? 그는 나오지 않는 것이오?”

“진유 형과 명왕은 아직 그곳에 있소. 형이 따라 나온다고 했으니 우린 빨리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소.”

인양과 명왕존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 * *

터어엉!

명왕부가 무너지는 소리가 중간중간 들리기 시작했다.

“망…… 할 새끼…….”

“그만 마음을 내려놓으시지요. 이젠 끝났습니다.”

“……이렇게 끝을 낼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군.”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건 뭐지?”

“명왕이라 해도 저를 낳아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

명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왕궁을 받치고 있던 기둥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와 여기서 싸운다면 밖으로 나갈 시간이 없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당신과 함께 죽는다면 괜찮습니다.”

“죽는 게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

“아직 젊은 나이지만 지금까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크크크크…….”

고진유의 표정에서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 졌다. 네놈이 이겼다.”

“무엇을 말입니까?”

“무엇이라니. 오늘로서 명왕 놀이는 끝이라는 것이다.”

“…….”

“떠나라. 지금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명왕 놀이는 끝이 났다고. 저세상에 가서 네놈 아버지를 만나서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명왕은 두 손에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태양혈을 강하게 내리쳤다.

파아아아앙-!!

그의 전신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명왕은 마지막으로 고진유를 보면서 한마디 했다.

“극일가는…… 위대하다.”

털썩.

명왕은 쓰러지면서 옆으로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아래로 사라졌다.

“……하아.”

고진유는 숨을 내쉬었다.

명왕의 죽음을 직접 보았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근데…….

“모르겠군. 이런 기분이 들어야 하는 게 맞는지…….”

허탈하면서도 허무했다.

두두두두-

하지만 길게 생각에 잠겨 있을 수 없었다.

점점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끝났다는 기분이 들까.”

휘이이익!

고진유는 무너지는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며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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