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극일가로 돌아온 지 보름이 지났다.
겉으로 보기엔 극일가의 하루하루는 평온했다.
하지만 마지막 결전을 앞둔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가득했다.
극일가뿐만 아니었다.
무림맹과 천검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최후의 결전을 위해 모든 시간을 수련에 빠져들었다.
스윽.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소리에 창고 앞을 지키던 위사가 소리쳤다.
“누구냐?”
“수고가 많네.”
창고 앞으로 다가오는 노인은 위사를 보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여기에 무슨 일이십니까?”
얼굴을 드러낸 그는 극일가의 장로인 도하금이었다.
“잠시 지나가는 길이었네.”
“……그렇습니까?”
위사는 긴장했다.
극일가의 창고 건물 중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막다른 장소였기 때문이다.
“혼자 근무하는가?”
“…….”
명부에서 많은 이들이 매몰된 탓에 극일가의 인원은 절반 이상이 부족한 상태였다.
당연히 근무 또한 혼자 서는 경우도 많았다.
이곳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구만.”
스르르릉.
도하금의 허리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도, 도 장로님?”
“미안하네. 자네는 죽어야겠네.”
커억!
언제 살수를 펼쳤는지도 보지 못했다.
“왜…….”
“자네에게는 미안하네. 본인은 어쩔 수 없이 주군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털썩.
위사는 더는 도하금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도하금은 죽은 시체의 몸을 뒤졌다.
철렁.
창고의 열쇠를 꺼내 든 그의 표정은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은 듯 무심했다.
‘주군께서…… 드디어 움직이고자 하신다.’
도하금은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안에는 수많은 신무신단과 해독제가 쌓여 있었다.
휘익.
그는 이미 준비해 온 화염지에 불을 붙인 뒤 신무신단을 쌓아놓은 상자에 던졌다.
화르르르륵!
불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후후. 잘 타는군.”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지금쯤이면 그자들은 정리가 되었겠지?”
슬금슬금.
검은 인영이 침실로 조심스럽게 향했다.
누구도 그의 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르르르.
열리는 틈 사이로 침상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인물이 보였다.
‘죽을 줄도 모르고 잘 자는군.’
흑의인은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 내지 않고 그를 조용히 죽여야 했다.
가까이 다가서면서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기 위해 손을 넣었다.
스윽.
한 걸음씩 아주 천천히 내디디며 침상에 붙어 섰다.
돌아누운 채 깊은 잠에 빠져든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
그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고자 하는 순간,
[멈추는 게 좋을 것 같군. 손이 빠져나오는 순간 잘릴 것이다.]
‘허억.’
흑의인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전음을 보낸 인물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주위에 있었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뒤로 물러선다. 목이 잘리기 전에.]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그렇다면 이자의 목은 베어야 해.’
흑의인은 품속에 넣었던 손을 빼냈다.
스걱.
그의 손이 품 안에서 나오는 동시에 검광이 번쩍이며 베고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아아악!”
그리고 비명이 침실에 울렸다.
흑의인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 침상 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을 보았다.
“살…… 협…….”
천무십이인 녹림야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극일가에 여전히 남의 명을 따르는 인물들이 있을 줄 몰랐소.”
“으으윽…….”
흑의인은 고통을 참으면서 밖으로 달아날 기회를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고자 하는 것이오?”
“…….”
그는 순간 구차한 자신을 보았다.
살고자 하는 본성 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듯했다.
“큭. 어차피 죽은 목숨이군.”
퍼어어억!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흑의인은 스스로 태양혈을 누르며 목숨을 끊었다.
부스럭.
침상에서 일어난 주국은 죽은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분의 말씀이 맞았구려.”
“네. 어르신. 이곳에도 명왕의 명을 따르고 있는 자가 있을 줄 몰랐습니다.”
“원래 사람이란 그런 것이네. 한 번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떠한 진실도 그들에게는 거짓처럼 들리며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
“어르신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늘 조심스럽게 살펴야겠습니다.”
“후후후. 역시 그대는 똑똑한 사람이네.”
“산적인 제가 무슨……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탁탁.
주국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니네. 자네가 만일 일찍 글공부했다면 상당히 똑똑했을 것 같네. 아쉽게도 어긋난 길을 갔지만 지금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나.”
“고맙습니다.”
녹림야검은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아 참……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곁에 인양 동생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쿠우웅!
인양은 가볍게 손을 뻗었다.
“우우욱…….”
흑의인은 신음을 터뜨렸다.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충격이었다.
털썩.
다리가 주저앉으면서 그대로 넘어졌다.
일어나고자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
흑의인은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이들에게 잡힌다면.
‘차라리 목숨을 끊는 수밖에.’
그는 손을 들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자 했다.
“어딜!”
흑의인이 손을 들어 스스로 자결하려는 모습을 보며 인양은 곧바로 신법을 펼쳤다.
휘익.
인양은 흑의인의 앞으로 달려가면서 그대로 복부를 가격했다.
퍼어억.
그는 강한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침상에서 숨을 죽인 채 상황을 보던 언종이 일어났다.
스윽.
그가 인양의 곁으로 다가서 온몸이 축 처진 채 늘어져 있는 흑의인을 보았다.
“저어…… 죽은 게 아닙니까?”
“기절한 것이오.”
“그렇군요.”
인양은 기절한 흑의인을 보며 깨어난 뒤 움직이지 못하도록 혈을 눌렸다.
“진유 형의 말씀이 항상 맞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인양이 바닥에 쓰러진 흑의인을 끌고 가려는 참이었다.
그때 밖에서 극일가의 야밤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불이 났다!!”
* * *
창고가 화염에 타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듯 보기만 할 뿐이었다.
불을 끄기 위해 극일가의 인물들이 달려왔지만 고진유가 그들을 말렸다.
“가주, 이게 대체 어떤 일인가? 창고 안에 신무신단이 모두 타고 있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신무신단은 이미 다른 곳에 옮겨두었습니다.”
“…….”
“신무신단 같은 물건을 함부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위사를 혼자 둔 채로.”
고묵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진유를 보았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녀석이야.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고 있다.’
“창고가 커서 그런지 잘 타네요.”
“하아…… 그러게 말이다.”
“불구경이나 하시죠. 계속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런가? 알겠네.”
고묵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처럼 느긋하게 불구경을 했다.
스윽.
고진유의 뒤로 인양이 다가왔다.
“진유 형.”
“왔어?”
“그들이 움직였습니다.”
“어떻게 됐지?”
“둘 중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누구더냐?”
“장로전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렇군. 자, 가서 만나볼까?”
‘또 일이 생긴 모양이군.’
고묵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숙부님, 함께 가시지요.”
“어디를?”
“가보시면 압니다.”
“알겠네.”
세 사람은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집무실에 곧장 들어서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흑의인이 보였다.
고묵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장로전의 호위장 원저량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십 년을 함께 지내온 동료이자 가족이었다.
“허허허……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하더니…… 그대도 마찬가지였구려.”
“할 말이 없소이다.”
“괜찮네. 서로 원하는 게 다를 뿐이니 어쩔 수 없지.”
고묵은 다시 물었다.
“자네가 창고에 불을 질렀는가?”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묵은 오면서 아는 척을 해달라는 고진유의 말을 들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원저량을 보면서 이해가 갔다.
“물론 아닌 것을 알고 있네. 불을 지른 인물이 누구인지 아니까. 혹시나 자네가 제대로 말을 하는지 궁금했을 뿐일세.”
“뭐……? 그걸…… 어떻게?”
“멍청한 사람이군. 자네들이 두 사람을 죽이고자 한 사실도 미리 아는데, 가주가 불을 지른 인물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보는가?”
원저량은 고개를 돌려 고진유를 올려다보았다.
“명왕이 누구인지 아는 순간 극일가에도 그들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있을 거라 예상했소.”
“…….”
“당신을 살려둔 이유는 그들을 알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숙부님께 증거로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오. 당신을 위협해서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긴장할 필요 없소이다.”
고진유는 녹림야검과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녹림야검은 부복한 그의 팔을 잡은 뒤 강제로 일으켰다.
원저량은 눈동자가 다급하게 흔들거렸다.
“가주…… 님…….”
“됐소이다. 죽는 게 두렵소? 자결하고자 하던 분이 아니오. 서로 깔끔하게 끝을 내도록 합시다.”
“그건…….”
단호한 고진유의 목소리.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였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이상 갑자기 죽고 싶지 않았다.
“도 장로께서 자신을 따른다면 세상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말에…… 죄송합니다.”
“도 장로가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허허허. 답답한 이 사람아. 무엇이 아쉽다고…….”
고묵은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안타까웠다.
그리고 고진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숙부님,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도 변할 것입니다. 극일가의 인물들도 예전과 같지 않을 겁니다.”
‘맞았어. 우리 때와 달라졌다.’
극일가가 고촌에서 떠날 거라고 했을 때 그는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는 결심이 섰다.
극일가는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게 맞았다.
“녹검 씨, 그를 데리고 나가서 조용한 곳에 두게.”
원저량은 다행이라 여겼다.
우선 죽음은 면한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녹림야검은 그를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 * *
고진유와 고묵은 함께 장로전으로 들어섰다.
극일창에서 커다란 불이 일어났지만 이곳은 조용했다.
“도 장로가…… 범인이라니…….”
고묵은 여전히 도하금에 대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도 말없이 조용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무림에도 별 관심이 없는 인물로 장로전에 들어선 후 더욱더 조용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명왕과 이어져 있을 줄은 몰랐다.
스윽.
두 사람 앞을 장로전 호위 무사들이 막아섰다.
호위장 원저량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부호위장 권양도가 대신 수장을 맡았다.
“잠시만 멈춰 주십시오.”
“…….”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네.”
“확인을 얻어야 합니다.”
고묵은 기분이 상했다.
마치 들어가지 못하도록 검문을 하려는 투의 목소리였다.
“권 부호위장은 지금 본인에게 한 말인가?”
“……그렇습니다.”
“자네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지?”
“알고 있습니다. 가주님과 태위님이십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가주께서 들어가는 것에 확인이 필요한가?”
“…….”
“본 가에서 가주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거늘. 지금 가주께 무슨 행동을 한 것이지?”
권양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말을 한 뒤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죄송합니다.”
“지금 이게 죄송할 문제인가? 당장 네놈에게 불충죄를 물을 수 있네.”
권양도는 이토록 화가 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숙부님, 괜찮습니다. 부호위장께서 어쩔 수 없었겠지요. 도 장로께서 시킨 일이라 확인을 받아야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고진유는 미소를 띠며 고묵을 말렸다.
하지만 그의 말에 권양도는 흠칫거렸다.
“아 참, 지금 본 가에 불이 나서 난리가 났는데 이곳은 너무 조용하군요. 모르고 있었소이까?”
“그건…….”
“그것도 도 장로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요?”
“아…… 닙니다.”
“불을 끄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하지 않겠소이까?”
“…….”
그는 점점 할 말이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