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413화 (413/425)

413화

고진유는 술병을 내밀었다.

“한 잔 받으시지요.”

“고맙군.”

중년 사내가 술잔을 들었다.

고진유는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에게 모든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놈은 생각 외로 입이 가벼운 녀석이지.”

술잔을 가득 채웠다.

“정이 많군.”

“처음으로 따르는 술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우는 술입니다.”

“훗, 웃긴 녀석이군.”

그는 가득 찬 술잔에 입에 대며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이번에는 그가 술병을 잡았다.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한 잔 받을 텐가?”

고진유는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술병에서 천천히 술이 떨어졌다.

술잔에 가해지는 술 방울의 무게는 만 근의 바위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고진유는 어떠한 표정의 떨림도 없이 가볍게 술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고진유도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스윽.

빈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만주(萬酒)군요.”

중년 사내는 자신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잘 자랐군.”

상대는 적이지만 중원 최고의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자신의 후손이라는 점이었다.

“좋은 세상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진유는 그가 말한 질문에 대해 다시 물었다.

중년 사내, 명왕은 팔짱을 끼며 그를 보았다.

“세상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중원 또한 예전에 전국시대가 있지 않았느냐. 수많은 나라가 존재했지만 결국 하나로 통일이 되었듯 무림과 명부, 그리고 세상. 이 모든 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원하시는 게 그것입니까?”

“그렇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느냐?”

“나쁘지는 않겠군요. 가능하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 무림과 나라가 사라진다면 세상이 평화롭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겠지요.”

“당연하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 우선 해야 할 일은 가장 먼저 골칫거리인 무림을 없애는 것. 그러고는 백성들을 핍박하는 국가 또한 없앨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인가요?”

“…….”

명왕은 입술 꼬리가 올라갔다.

화가 나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고진유의 표정을 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모든 게 사라지고 하나가 된 세상은 누가 다스리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 일은 우리가 해야지 않겠나.”

“새롭게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좋은 생각이 아닌가? 세상에서 오직 한 곳만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면 싸움도 없을 것이고 평화롭게 지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건 황제가 아닌 천제입니까?”

“크큭, 굳이 말로 나타내고자 한다면 그 말이 맞겠군.”

“천제가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겠군요.”

“네가 원한다면 천제의 자리를 나중에 물려줄 수도 있다.”

“사양하겠습니다.”

고진유는 정중하게 거부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하하, 나도 그냥 해본 말이다.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더 나눌 이야기는 없을 것 같군. 혹시 궁금한 게 있느냐?”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호, 명왕이 된 이유를 말하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명왕은 미소를 지었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고진유를 보았다.

“이유라…… 손자가 궁금하다고 하니 알려주지.”

고진유는 조부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더군.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명부는 굳이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도 없는데 그놈들을 왜 이런 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갑자기 한심하더군. 그래서 그놈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어떻게 하면 명부로 들어갈지 연구했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구천명부 중에서 한 곳의 명군이 되면 명왕에게 도전할 자격이 있더군. 난 극일가를 몰래 나온 뒤 이천명부로 들어갔다. 그곳에 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도착해 보니 이천명부였을 뿐이니.”

한숨을 쉰 그가 말을 이었다.

“신분을 속이고 몰래 들어가 이천명군을 만났다. 몇 마디 나누다가 그에게 바로 도전을 했지. 큭, 그는 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를 세상에서 지워 버렸지. 그다음은 어떻게 했는지 알겠지?”

“계속 말씀하시지요.”

홀로 명부에 들어간 그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흐음, 명군이 된 후 난 명왕에게 바로 도전을 했지. 그는 명군과는 또 다른 능력을 지녔더군.”

“그를 죽이고 명왕이 되셨습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근데 명왕을 죽였더니 그때부터 모두가 나를 명왕으로 대하더군. 명왕부를 지울 생각에 잠시 명왕 놀이를 해볼까 싶었지. 그렇게 명왕궁을 살펴보다 우연히 명왕의 심장을 얻었고.”

명왕은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번쩍.

고진유는 그 순간 명왕의 눈동자를 보았다.

‘탐욕…… 이분께서는 명왕의 심장을 얻는 순간 본인을 잃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알았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그대는 극일가의 인물이 아니라 명왕임이 확실하군요.”

“…….”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채워놓은 술잔을 들었다.

“이 잔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연은 끝입니다.”

“당연하다.”

고진유와 명왕은 양손으로 잔을 든 뒤 단숨에 술을 비웠다.

쨍그랑!

그러고는 바닥 아래로 잔을 동시에 깨뜨렸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천천히 일어섰다.

휘익!

명왕은 손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고진유의 목을 향해 다가왔다.

타앗!

갑자기 다가온 그의 손에 놀랄 법도 하지만, 고진유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막아섰다.

“…….”

“그냥 갈 생각이 없습니까?”

“저번에 당했던 것을 생각하니 그냥 물러나기에는 억울한 것 같아서 말이다.”

“알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든지 다시 상대해 드리죠.”

번쩍!

고진유의 허리에서 사의검이 빠져나오면서 섬광을 뿌려냈다.

사의검의 검광과 명왕의 호신명왕기가 부딪혔다.

강렬한 빛이 객잔의 이 층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뒤 손을 펼친 순간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객잔은 빛에 잠겨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층 객잔에 있던 손님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빛이 사라지고 시야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툭.

그리고 그들의 귓가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끄, 끝났나?’

앞이 조금씩 보이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명왕의 목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고진유 앞에는 목이 사라진 몸뚱이만이 있었다.

휘익!

인양과 녹림야검이 빠르게 다가섰다.

“형…… 몸은 어때?”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된다.”

녹림야검은 혹시나 몸에 이상이 있을까 연신 고진유를 살폈다.

“그가 갑자기 공격할 줄은 몰랐네.”

고진유는 바닥에 떨어진 명왕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번뜩.

노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 거참…….’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는 목을 만졌다.

명왕의 표정은 점점 살기로 굳어졌다.

“두 번이나 내 목을 단번에 베다니 황당하군.”

‘우리의 인연은 끝이다. 나도 부담 없이 극일가를 상대하도록 하마.’

명왕은 차가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 * *

고하천을 건너며 고촌으로 들어섰다.

마을을 지나 아래 성으로 내려서자, 이미 고진유가 돌아온 것을 알았는지 성문에 극일가의 인물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극일영무장 제형은 고개를 숙였다.

“제형 님께서 직접 나오셨군요.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가주님께서 복귀하시는데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후후후, 수련들은 어떻습니까?”

“최선을 다해 수련하고 있습니다.”

“제형 님께서 고생이 많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네. 소신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극일영무장 제형은 앞장을 서며 궁으로 들어섰다.

“숙부님을 뵙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가주전이 아닌 고묵의 거처로 방향을 돌렸다.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인양과 녹림야검에게도 돌아가서 쉬도록 했다.

“두 사람도 먼저 가 있어.”

드륵.

고진유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주, 어서 오시게.”

고묵은 들어선 그를 보며 환하게 반겨 주었다.

툭툭.

두 팔을 벌려 고진유를 안았다.

“갔던 일은 잘됐는가?”

“네. 그들 모두 제 뜻을 따라주기로 했습니다.”

“허허허. 잘됐어. 역시 잘될 것으로 생각했었네.”

“고맙습니다.”

고묵은 그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허전하신 모양이구나.’

고진유는 미소를 띠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일천명부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천명군이 형수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더냐?”

“네. 여전히 어머니를 그리워하셨습니다.”

“허허허. 그도 사내이긴 하구나.”

일천명군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그도 대충 알고 있었다.

“혹시 그가 조카를 대하면서 미워하지 않더냐?”

“저를 아들처럼 생각하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허허허. 그게 정말이더냐? 정말로 형수님을 사랑하신 게 맞구나.”

“네. 어머니는 좋은 여인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연하다. 네 어머니는 정말로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기 충분했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게 안타깝구나.”

“숙부님. 어머니를 죽인 자를 만났습니다.”

“……!”

고묵의 눈이 단번에 두 배나 커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형수님을 죽인 자를 만났다고?”

“네, 그렇습니다.”

고묵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보아라. 형수님을 죽인 자가 누구더냐?”

“…….”

고진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고묵은 쉽게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숙부님. 지금까지 모든 일의 시작은 우리였습니다.”

“우리라면…… 극일가를 가리키는 말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극일가에서 세상의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휴우.”

고묵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은 명왕이었습니다.”

“명왕이…… 왜 형수님을 죽였다는 하더냐? 차라리 형님을 죽이고자 했다면 모를까…….”

“그가 원한 건 은룡투인이었습니다.”

“……?”

고묵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룡투인은 역시 극일천주였던 자신의 형이었다.

“명왕은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인물. 은룡투인의 전인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사신이란 살수를 보내 어머니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이 너를 숨긴 것이더냐?”

“네. 맞습니다. 명왕이 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숨겼던 것입니다.”

“형수님을 죽인 사신은 쌍둥이를 낳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건 어떻게 된 것이더냐?”

“그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신이 모시던 인물이 전대 명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대 명왕을 몰아낸 그에게 비밀로 했던 것입니다.”

“허어. 이거 참…….”

고묵은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명왕을 죽이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너를 죽인다고 해도 여전히 은룡투인은 형님이시지 않더냐?”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명왕에게 졌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

극일가의 가주이자 은룡투인이 명왕에게 졌었다니?

충격적인 사실에 고묵이 경악했다.

“그, 그 사실을 어디서 들었느냐?”

“그에게…… 명왕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고묵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은룡투인은 절대로 명왕에게 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숙부님.”

“…….”

고묵은 자신을 부르는 고진유의 목소리에서 지금까지 말했던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음을 알았다.

“명왕의 신분은…… 조부…… 이십니다.”

벌떡!

고묵은 제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조부라면……? 내 아버지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고묵은 힘없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사실 그분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아느냐?”

“그분께서…….”

고진유는 명왕과 만난 뒤 나눈 대화를 알려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고묵은 모든 게 허무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가 말한 게 사실이겠구나.”

이런 이야기를 거짓말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정황이 맞아 들어갔다.

“아버지께서…… 명왕이라니…….”

“숙부님, 조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명왕입니다.”

“……네 말이 맞다. 그는 명왕일 뿐이겠지.”

스윽.

고진유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가 모든 것을 제대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네. 숙부는 조카만을 믿겠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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