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412화 (412/425)

412화

일천명부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곧장 일천명군을 따라 그의 거처로 안내를 받았다.

뚝.

고진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여인의 인물화가 거실에 걸려 있었다.

“진유 형, 화유…… 누님과 닮았는데요?”

“이분이 어머니…… 시군.”

고진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상상만 했던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인물화를 보는 고진유의 눈동자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스윽.

고진유의 곁으로 일천명군이 다가섰다.

“고운가?”

“어머니를 처음 뵙습니다.”

“……그렇군.”

“정말로 어머니를 좋아하셨군요. 지금까지도 곁에 두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데리고 왔어야 했다. 망할 놈…….”

그는 그날의 일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앉도록 하게.”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함께 들어온 인양과 녹림야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기다렸다.

“명부를 돌아다닌 이유가 그들과 함께 명왕을 치고자 함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그분들께도 명왕을 공격하는 동안 명부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고 부탁했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말라는 말이군. 명왕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승패는 싸워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진유의 목소리에는 전혀 떨림이 없었다.

“여하튼 자신이 있으니 도전하는 것이겠지.”

“후후후.”

고진유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명부의 도움도 없이 그와 직접 싸우고자 하는 이유를 말해보게. 내가 보기에 분명 다른 게 있다고 보이네.”

“맞습니다. 명왕과 싸워야 할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군.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 곤란하게 하면 안 되겠지.”

일천명군은 대화를 하면서 고진유의 얼굴을 계속해서 뚫어지게 보았다.

“혹시나 자네가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자의 목은 내가 자를 것이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고진유는 명왕부에서 온 신무신단에 대해서 물었다.

“혹시 그들에게서 신무신단을 받았습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던져놓고 가더군. 그것을 복용하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네. 신무신단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보니 거짓말인가?”

“거짓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준 신무신단은 문제가 많은 물건입니다. 일천명부에서 복용을 하게 되면…….”

고진유는 그가 신무신단에 대해 간단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알려주었다.

“명왕이 우리를 죽이고자 계획을 세웠군.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 항상 우리를 죽이고자 했으니깐. 다른 곳도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을 걸세. 그래서 자네의 뜻을 따르기로 했겠지. 우린 그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될 뿐이다.”

“감사합니다.”

“음…… 명왕과 싸운 후 계획은 뭔가?”

“다른 분들께도 이야기했습니다. 명부의 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신무신단이라면 명부인들이 세상 밖에서 지내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게 가능한가?”

“삼천명군님과 외조부이신 오천명군님께 확인해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자네 말을 믿겠네.”

일천명군의 표정은 밝아졌다.

이십 년 동안 가슴에 답답했던 무엇인가 내려간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항상 세상을 동경하며 지냈다네. 그러던 어느 날 세상 밖에서 사랑하고 싶은 사내를 만났다고 했지. 그녀가 말하기를 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도 사랑하면 상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면서.”

“…….”

“난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한 말을 알게 된 것 같다.”

일천명군은 미소를 띠며 고진유를 보았다.

“그녀의 아이를 보니 마치 내 아이처럼 보인다.”

“…….”

‘이분은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하셨구나.’

그를 선택하지 않아 미워할 줄 알았건만 여전히 마음속에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명군님을 선택하셨다면 행복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후후후. 그렇게 되면 네가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여하튼 오늘 기분이 좋다. 바쁜 줄 알지만 내일 떠나도 되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일천명군은 곧바로 수하에게 시켜 술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 * *

우우우우-

명왕의 신형에서 명왕기가 뻗어 나왔다.

“어이가 없군. 사신을 살려주다니.”

둘 중 한 명은 죽을 것이라 확신했건만,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그 녀석이 일천명부에서 나왔다고 했나?”

“넵. 그렇습니다.”

이천명부만 제외하고는 구천명부를 모두 돌아다닌 셈이었다.

“앞으로 피곤하겠군.”

“명왕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무신단을 복용한 이상 명왕부로 들어오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쯔쯔. 모르고 있군. 신무신단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녀석이 신무신단의 해독제를 만들었더군. 똑똑한 놈이야. 명부에 그냥 간 게 아니었어. 우리의 계획을 제대로 망쳐 놓았다고 봐야겠지.”

신무신단으로 극일가를 죽이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이 되었다.

“할 수 없지. 되는 대로 싸우는 수밖에.”

“명왕님, 상관없습니다. 명왕부의 힘은 구천명부가 모두 모인다고 해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자네 말이 맞다. 예전부터 별 쓸모없는 녀석들이었지. 어차피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놈들이었고. 이번 기회에 정리하면 되겠군.”

“소신이 지금 바로 명왕대법군을 이끌고 구천명부를 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은 아니야. 음…… 은룡투인이 명왕부로 움직이는 순간에 구천명부 중 한 곳을 치는 게 좋겠군. 어디가 좋을까?”

“가장 강한 칠천명부를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칠천명부라…… 이유가 무엇인가?”

“명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가장 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칠천명군의 목을 벤 뒤 다른 명부에 똑바로 보여줄 것입니다.”

“자네의 계획이 좋겠군. 항상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아라.”

“알겠습니다.”

“그만 물러가도 좋다.”

쿵.

명부공은 머리를 바닥에 강하게 부딪치고는 곧바로 일어나며 밖으로 나섰다.

명왕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밀릴 줄은…….’

어디에서 일이 꼬였는지 바로 알았다.

은룡투인의 존재.

태어나기 전 그를 죽이도록 사신을 보냈다.

“모든 원인은 그 녀석이었군.”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어미와 함께 무조건 죽이도록 명을 내렸지만 사신은 거짓말을 했다.

“망할 놈…….”

전대 명왕의 수하를 믿었던 게 실수였다.

‘여하튼 사신을 이기다니 대단하군. 은룡투인의 전인답군.’

명왕은 그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사신을 만났다면 듣지 않아야 할 말을 들었을 게 분명했다.

“말 많은 놈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겠지.”

예전에 사신을 죽였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을,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 그냥 둔 것이 피곤하게 되었다.

명왕의 얼굴 표정이 구겨졌다.

“하는 수 없지.”

모든 사실이 고진유에게 알려졌다.

“한 번 더 만나볼까. 그놈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겠지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은 하군.”

스윽.

명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뒤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장소로 내려갔다.

빙석 위에 십여 구의 시신들이 보였다.

‘어떤 녀석이 좋을까?’

천천히 돌아보면서 살폈다.

“손자를 보러 가는데 괜찮은 놈으로 가야지 않겠나.”

명왕은 걸음을 멈추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 *

고진유는 마음 편하게 일천명부를 나섰다.

세 사람은 고촌으로 향했다.

구천명부에 대한 일정들이 끝이 났다. 다행히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었다. 남은 건 명왕부밖에 없었다.

명왕부로 들어갈 날은 준비가 끝나는 날이 될 것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마을들을 지나며 움직였다.

마을은 평온했다.

오히려 명부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보다 중원은 조용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몰랐다.

그저 눈앞에 보인 평화로움에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진유 형, 어떻게 밥이라도 먹고 갈까요?”

“그러지. 급한 일도 없잖아.”

그들에게 남은 건 신무신단과 해독제를 제때 만들어내는 것뿐이었다.

오랜만에 객잔에 들르자 점소이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세 명이네. 자리가 있는가?”

고진유는 점소이의 손에 은자를 한 냥 슬쩍 건네주었다.

단번에 점소이의 눈이 커지면서 과한 목소리가 나왔다.

“공자님. 좋은 자리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점소이는 은자를 꼭 쥔 채 객잔의 상층으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상층에는 제법 손님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대부분 무인들과 지역의 권문세가의 인물들이 이용했다.

벌떡.

한쪽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자리한 그의 동료들이 계단을 오르는 사내들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왜 그러는가?”

“저기…….”

사내는 말을 하려다가 바로 뛰쳐나가며 세 사람 앞에 다가섰다.

“고금제일인과 천무십이인 두 분을 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린 안면이 있네요. 묵경 형의…… 사촌이군요.”

“네. 맞습니다. 서문진우입니다. 그는 저에게 사촌 동생이 됩니다.”

“반갑습니다. 이곳에서 진우 형을 만나게 되는군요.”

인양과 녹림야검도 앞으로 나온 뒤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세 분께서는 여기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식사하고자 왔소이다.”

“아, 하하, 여기에는 삼하과가 유명합니다.”

“고맙습니다. 한 번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서문진우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일행은 부러운 시선으로 돌아온 그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저분들이 고금제일인과 천무십인이오?”

“권협과 살협이라네.”

“아하…… 젊다고 하더만…….”

그들의 시선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세 사람에게 고정이 되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라고 하던가?”

“잠시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더군.”

“자네는 좋겠네.”

“허허허.”

서문진우는 웃음을 지었다.

무림 최고의 인물들과 서로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받았다.

점소이가 쟁반에 삼하과 세 그릇을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최고의…… 재료로 준비했습니다.”

“고맙네.”

점소이는 삼하과를 내려놓은 뒤 한 걸음 물러났다.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가?”

“아, 아닙니다. 그냥…… 고금제일인이라 하셔서…….”

“후후. 맞소이다. 본인이 고진유라고 합니다.”

털썩.

점소이는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소, 소인이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일어나세요.”

고진유는 그의 팔을 잡은 뒤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점소이는 너무나 쉽게 몸이 일어나자 놀랐다.

“무슨 일인가요?”

“저어…… 그게…….”

점소이는 슬쩍 한 곳을 쳐다보았다.

서문진우와 그의 동료들이 있는 자리였다.

“그대의 신상은 본인이 책임지겠소이다.”

“…….”

점소이는 미소를 띤 고진유의 얼굴을 마주했다.

고금제일인이 책임지겠다는데 더는 겁이 날 게 없었다.

“무강문이…… 저희 객잔에 밀린 식비가 많습니다.”

“그렇소이까?”

“그것 때문에 주인어른께서 계속 돈이 없다고 하셔서…… 일하는 저희도 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들에게 얼마나 밀려 있소이까?”

“거의 몇 년 동안 돈을 내지 않고 보호비도 받아가면서…….”

점소이는 슬쩍 옆을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무강문이라 했소?”

“네, 그렇습니다.”

“알겠소이다. 내가 한 번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겠소이다.”

“감사합니다.”

고진유는 일어난 뒤 서문진우가 앉아 있는 자리에 다가섰다.

벌떡.

식탁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우 형님, 혹시 무강문을 잘 아십니까?”

“…….”

서문진우는 대답 대신 옆에 선 사내를 보았다.

그는 고진유와 시선이 마주치자 포권을 했다.

“무강문의 주반명입니다. 고금제일인을 처음 뵙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나 객잔에 외상이 많이 밀린 모양이군요. 맞습니까?”

“아, 아…… 그렇지 않아도 내일 갚고자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난 또 갚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얼른 갚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네에.”

고진유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우 형님께 제가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입니까?”

“저기 저 친구가 마음에 들어서 앞으로 이곳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제가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전 친구가 다치는 것을 가장 싫어하지 않습니까.”

서문진우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신에게 부탁했지만 실제 뜻은 무강문에서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한 것이었다.

툭툭.

고진유는 점소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이야기를 잘했으니 괜찮아질 것이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술 한 병 들고 오게나.”

“넵.”

점소이는 빠르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스윽.

고진유는 원래 자리가 아닌 홀로 앉아 있는 중년 사내를 향해 다가섰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려고 술을 시킨 게 아니더냐? 앉아라.”

고진유는 그와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두 번째 만남입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핏줄이 당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크크크크. 같은 핏줄끼리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

중년 사내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진유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