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408화 (408/425)

408화

“휴우.”

그는 상체를 감았던 붕대를 풀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낫지 않았던 상처가 단번에 호전되었다.

“신무신단 때문에 망하고 신무신단 때문에 낫는군.”

칠천명군은 해독을 한 뒤 고진유가 준 신무신단을 복용했다.

효능은 대단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여 보았다.

“하나 더 복용하고 싶을 정도로 좋군.”

“필요하다면 드릴 수는 있지만 계속 복용한다고 해서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가?”

그의 표정에 뭔가 아쉬움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고진유를 보는 표정이 밝아졌다.

“은룡투인, 그대는 칠천명부의 은인이네.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네.”

“아닙니다. 도움을 받고자 찾아온 건 아닙니다.”

그는 고진유의 말에 의아했다.

명왕과 싸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명군과 함께 온 이유 또한 칠천명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라 방금까지도 생각했다.

“그게 아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명왕을 상대할 때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음…… 진정한 사내군. 사내라면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포부는 당연하지.”

“고맙습니다.”

칠천명군은 남의 도움 없이 진심으로 싸우고자 하는 그의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명왕을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겠지. 그대가 명왕과 싸워 이겼다고 하세.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명왕을 죽이고자 하는 건 사부님의 원수를 갚기 위함입니다. 그 밖에 명부에 대한 적대감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칠천명군뿐만 아니라 삼천명군과 오천명군 또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제가 은룡투인이며 극일가 가주의 숙명이기에 명왕과 싸우고자 한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대가 싸우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제가 처음으로 극일천과 싸운 이유는 사부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극일천에서 명왕까지 이어지더군요.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원수도 함께 갚아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오천명군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고진유를 보았다.

“어머니는 저희를 낳다가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그분은 누군가에게 의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게 확실하더냐?”

오천명군은 이보다 화가 난 적이 없었다.

“네, 외조부님.”

“감히 어떤 놈이……? 설마 명왕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아직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이 어머니를 죽인 건 변하지 않을 사실입니다.”

오천명군의 손과 몸이 떨렸다.

“하! 나도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튼튼한 아이가 너희들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으니까!”

“외조부님, 진정하십시오. 소손이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고진유가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치솟아 오른 그의 감정이 안정이 되면서 사그라졌다.

고진유는 칠천명군의 물음에 대답했다.

“명왕을 이긴 뒤 그다음은 없습니다. 전 싸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훗. 극일가의 가주가?”

세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가문이 극일가임을 그는 잘 알았다.

“제가 특이해서…… 그런가 봅니다. 명부 출신의 어머니와 화산파 출신의 사부님을 모셨지 않았습니까.”

“하긴. 특이한 경력이긴 하지.”

“명부에서 무림을 먼저 건드리지 않은 한 관심 없습니다. 세상에 나오시든 아니든 평화롭게 지내시면 됩니다.”

“그대의 개인적 생각인가? 아니면 극일가의 가주로서 생각인가?”

“이번 일만 끝나면 극일가 또한 중원으로 끌어 올릴 생각입니다.”

“…….”

“극일가는 더는 무림을 위해 고촌에서 희생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가? 극일가에서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우리도 굳이 여기에 숨어서 지낼 필요는 없겠지.”

오래전 명부가 깊은 곳에 숨어든 이유는 극일가의 시선을 피한 것이었다.

“은룡투인, 명왕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이길 것입니다.”

“알겠네. 우린 그대가 원하는 대로 지켜보기로 하겠네. 혹시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원한다면 도와주지.”

“고맙습니다. 세 분께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든든합니다.”

“후후후. 이제는 어디로 갈 텐가?”

“마지막으로 남은 일천명부에 갈까 합니다.”

구천의 명부 중 명왕의 소속이었던 이천명부을 제외하면 일천명부만이 남아 있었다.

그곳을 마지막으로 명부는 정리가 될 것이었다.

“음…….”

일천명군을 떠올리자 칠천명군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다.

“그곳에 가는 것은 좋다만, 우선 그자는 우리와는 달리 극일가에 상당히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친구에게 물어봐라.”

그가 가리킨 인물은 오천명군이었다.

“외조부님, 극일가와 일천명부가 크게 싸운 적이 있습니까?”

“극일가가 아니라 우리 오천명부와 싸웠지.”

“그게…… 무슨?”

“원래 네 어머니는 새롭게 일천명부의 주인이 되는 그와 혼인하기로 약조한 사이였다.”

“…….”

고진유는 예상치 못한 일에 멈칫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어머니가 갑자기 그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일천명부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일천명군은 네 아버지를 찾아갔지. 자신의 여인을 찾기 위해 올라갔지만 극일가의 주인에게 이길 수 없었고. 명부에 다시 내려온 뒤 괜히 화풀이를 우리에게 하더군. 일부러 자신에게 보내기 싫어서 극일가에 보냈다는 둥…… 피곤한 녀석이야.”

“극일가는 좋아하지 않겠군요.”

“당연하다. 네가 극일가의 가주라고 하면 단번에 싸우려고 할지 모르겠다.”

“안 된다고 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다. 싸우겠다면 상대해 주면 됩니다.”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을까?”

“만나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설마 저 혼자 상대하기 위해 일천명부 전체가 움직이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네. 그는 극일가의 이름만 들어도 살짝 정신이 변하는 놈이라서…… 조심해야 하지.”

“여하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천명부와 삼천명부도 연이어 일어섰다.

“세 사람. 어디 가려고 하는가?”

“여기서 볼일을 마쳤으니 마지막으로 일천명부에 가야 하지 않겠나.”

“나도 가겠네.”

“됐네. 자네가 가면 일천명군이 더 난리를 칠 게야.”

“아쉽군.”

칠천명군은 바로 오천명군의 말을 인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습격하여 친 사천명부와 일천명부의 관계는 형제보다 가까운 동맹 사이였다.

사천명군을 죽인 그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자네는 여기에 남아서 혹시나 모를 명왕에 움직임에 대해 살피게나.”

“그렇게 하지. 재미있게 다녀오게.”

“술 한잔 잘 마시고 가네.”

고진유는 밖으로 나가기 전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 * *

우우우웅-

노인은 짙은 안갯속을 걷고 있었다.

분명 두 다리로 걷고 있지만 그의 발바닥은 허공을 뜬 상태였다.

드드드드드-

커다란 석문이 올라갔고, 노인은 석문으로 들어섰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정확히 십 보를 걸은 뒤 멈췄다.

번쩍!

두 개의 빛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휘이이익.

그리고 노인의 눈앞으로 날카로운 손톱이 날아오다 순간 그대로 멈췄다.

노인의 입가가 올라갔다.

“여전히 팔팔하군.”

“크크크. 몇십 년 만인지 모르겠군. 여긴 무슨 일이지?”

“여기서 죽었는가 확인하기 위해 왔네.”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군?”

파앗!

주위에 불이 켜지면서 밝아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두 명의 얼굴.

창백할 정도로 짙은 회색빛을 띤 사내와 노인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명왕, 내게 무슨 짓을 시키기 위해 온 거지?”

“사신인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네.”

“내가? 명왕이 하지 못 하는 일이 또 있었나?”

“…….”

“이번에 그 일을 맡아준다면 내게 무엇을 주겠는가?”

“원하는 게 있나?”

“굳이 필요하다면 명왕의 한 팔 정도?”

“알겠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한 팔을 내주도록 하지.”

“크크크크…….”

그는 웃음을 토해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나 대가로 팔을 주겠다니?

“말해보게. 내가 누구를 죽이면 되는가?”

“은룡투인이라는 놈이 있네. 그놈을 죽여주게.”

“…….”

그는 눈에 힘을 주며 명왕을 노려보았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농담은 아니겠지?”

“농담처럼 들리는가?”

“당연히. 그놈은 극일천주가 아닌가?”

“죽었네. 지금은 다른 녀석이 은룡투인을 물려받았지.”

“죽었다고? 언제?”

“얼마 안 됐네. 망할 녀석이…… 저 세상으로 갔지.”

“그렇군. 흠, 누구에게 죽었나?”

“그놈이 싸워서 질 놈인가?”

“…….”

“망할 놈이 스스로 올라갔다.”

“허어! 그럴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지?”

“사는 게 재미가 없다더군. 그리고 원하는 것을 전부 이루었다고 말했지.”

“웃긴 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재미있거늘!”

은룡투인은 극일가의 인물이며 직계의 자손에게 태어나는 운명이었다.

죽었다는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명왕, 그대가 말한 은룡투인은 누구인가?”

“그놈의 아들이네.”

“……?”

사신의 얼굴 전체가 꿈틀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은룡투인은 사내들에게 전승된다고 하지 않았나?”

“맞다.”

“그에게 자식은 계집 하나밖에 없었잖나.”

“우리가 속았네. 그때 태어난 아이는 쌍둥이였어. 세상에 아무도 모르게 사내아이를 빼돌렸더군.”

“…….”

“그리고 진정한 은룡투인이 될 때까지 세상 밖으로 내던져 놓았지.”

“크하하! 극일천주는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대가 죽일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군.”

“…….”

“그래서 몰래 빼돌려 놓았어. 역시 똑똑한 녀석이야. 그대는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극일천주의 여인을 죽여달라 부탁하지 않았나…… 크큭, 의미 없는 짓을 했군.”

명왕은 말이 없었다.

극일가의 가주이자 극일천주인 그가 명부의 여인을 고를 줄은 몰랐다.

명부의 여인이기에 자신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자칫하여 명부들과 괜히 사이를 나쁘게 만들 필요 없었으니까.

임신을 한 그녀를 보면서 망설였다.

배 속에 든 태아가 사내인지 여아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 죽이는 것보다 출산한 후 사내아이이면 함께 그녀를 죽이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그 일을 맡은 인물이 사신이었다.

“세상에 은룡투인이 나오지 못하게 하려던 계획이 틀어졌군.”

“상관없네. 죽이면 될 뿐이야.”

“죽인다라…… 너무한 게 아닌가?”

“시끄럽다.”

“흐음. 알겠네. 하긴 내가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

“……말이 많군.”

“언제 시작하면 되지?”

“지금 바로. 그 녀석은 일천명부로 가고 있다.”

“거길? 왜?”

“이천명부만 빼고는 명부 전체를 돌아다니더군.”

“그들과 함께 명왕부를 치고자 하는 것인가?”

“그럴 수도.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생각하겠지.”

“크크크크…… 역시 대단한 녀석이군. 누구를 꼭 빼닮았어.”

“…….”

“음. 극일가만으로 힘들겠지? 극일심공이 있다고 해도 명부에서 제대로 싸우기 힘들지 않은가. 그래서 명부와 함께 싸우고자 하는 것이겠지?”

“신무신단이 있다.”

“허어…… 그걸 만들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문제가 되겠는데.”

“문제가 될 건 없어. 극일가 놈들이나 명부 놈들이 명왕부로 들어오는 순간 모두 죽게 된다.”

“그들이 들어오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신무신단을 복용했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럼 그렇지. 분명 그 안에 무슨 짓을 했군. 약삭빠른 자네가 가만히 보고 있었을까. 큭, 하지만 극일가가 명왕부로 올 일은 없을 것이네. 내가 그를 죽일 테니까.”

“그렇게 해주면 나로서도 좋은 일이지.”

“크크크. 자네의 말투를 보니 꼭 내가 실패할 것처럼 들리는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게.”

“그럼, 가볼까?”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명왕은 앞에 있던 그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그 녀석이 사신을 이길 실력인지 궁금하군.’

명왕은 돌아서며 밖으로 나섰다.

* * *

일천명부에는 명군들과 동행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칠천명부를 나왔지만 도중에 생각을 바꾸었다.

일천명군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라 했다. 게다가 오천명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얼굴을 마주치는 게 좋은 일은 아니라 여겼다.

오천명군 또한 고진유의 뜻을 따랐고, 그들은 다음에 만나기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고진유는 인양과 녹림야검, 두 사람과 함께 마지막으로 일천명부로 향했다.

“형,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뭘?”

“그가 형이 누구인지 알면 엄청 싫어하지 않겠어?”

“아마도.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를 왜 한 번도 안 했는지 모르겠군.”

“그분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때린 놈은 모르는데 맞은 놈만 기억하는 것처럼요.”

“인양의 말이 맞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이후로 그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양과 녹림야검의 말이 맞는 듯했다.

“아…… 그런 것 같군. 두 사람은 그걸 어떻게 알았어?”

“형은 다른 것은 잘 아는데 이상하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 그건 앞으로 인양이 잘 가르쳐주면 되겠다.”

“알았어요.”

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일천명부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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