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이거…… 좋구만.”
오천명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동안 명부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너무나 편안했다.
명부에서 나오기 전 고진유에게 받은 신무신단을 복용했다. 염려하는 마음에 불안감이 없을 수는 없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좋아. 마음에 들었다. 신무신단의 효력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여기서 지내려면 계속 복용을 해야 하는 것이더냐?”
“신무신단은 한번 복용하면 내력 증진과는 달리 지상에서 지내시기에는 문제없습니다.”
“그렇군. 내공 증진은 한나절 정도 밖에 되지 않더구나.”
“불완전했던 신무신단은 거의 한 달 정도 됩니다. 다만 점점 중독되어 정신이 탁하게 변하면서 이지를 잃게 되더군요.”
“중원에서 우리를 명괴라고 부른 이유가 있구나.”
“네. 맞습니다. 그들은 정신이 혼탁해져 오로지 살성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천명군은 흐르는 기운을 느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여기에서 터를 잡고 사는 것도 좋겠군.”
“언제든지 올라오셔도 됩니다.”
“생각해 보마.”
신무신단의 효력을 안 이상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산동성으로 올라온 일행은 어느덧 태산으로 들어섰다.
빼곡한 숲을 지나면서 앞을 가렸던 나뭇가지들이 기를 따라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착했어요.”
인양이 삼천명부의 명천지 입구를 찾았다.
“인양아, 들어가자.”
“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인양과 녹림야검이 앞으로 나서며 길을 따라 걸었다.
숲을 지나자 푸른 하늘 아래 전각이 보였다.
저번에 왔을 때와 달라진 건 없었다.
홍과 또한 여전히 달려 있었다.
휘이이이익!
인양이 앞서 전각으로 향하자 전각 주위에서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흑의인이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오천명군님을 뵙습니다.”
“본인을 아는군. 누구지?”
“삼천명군님의 뜻에 의해 임명된 삼천명화오공입니다.”
삼천명군은 재정비를 하면서 새로운 인물들로 명부를 정리했다.
흑의인은 공손하게 물었다.
“제가 명군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안내하라.”
삼천명화오공은 돌아서며 삼천명부로 움직였다.
일행은 안내를 받으며 삼천명천궁에 도착했다.
삼천명화오공은 네 명을 곧바로 대전으로 안내했다.
고진유는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삼천명군을 보았다.
척.
삼천명화오공이 그의 앞에서 부복을 했다.
“소신, 오천명군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수고했다. 물러나라.”
스윽.
삼천명군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아래로 내려왔다.
오천명군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축하하네. 다시 올라왔군.”
“크크크…… 그대와 함께 온 친구 덕분이지. 함께 나를 찾아올 줄 몰랐네.”
삼천명군은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한 후 고진유를 보며 다가섰다.
“요즘 그대의 활약이 대단하더구만. 소문은 늘 잘 듣고 있다.”
“고맙습니다.”
“근데 오천명군과 함께 태산으로 오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지. 함께 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가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군.”
그의 물음에 오천명군이 대신 대답했다.
“자네는 은화를 기억하고 있겠지?”
“은화라면…… 오천공녀로 명유십공인 그 여아를 말하는 것인가?”
“맞네.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잘 알고 있지. 무림에 나간 뒤 중원 사내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만 아이를 낳다가…….”
“맞네. 그 아이가 바로 이 녀석이라네.”
“…….”
오천공녀의 아이라면 오천명군에게는 외조손이 아닌가.
삼천명군은 시선을 번갈아 돌리면서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다면 오천공녀가 결혼한 사내가 극일가의 가주였단 말인가?”
“그렇다네.”
“그 사실을 왜 숨기고 있었지?”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삼천명군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허, 대단한 일이군. 그래서 처음 만났지만 거부감이 없었던 모양이야.”
그는 한 번 더 고진유를 자세히 보았다.
“두 조손께서 본인을 왜 만나고자 찾아왔는가?”
“명왕이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일세.”
“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그놈은 원래 그런 놈이라네.”
“혹시 명왕부에서 신무신단을 주고 가지 않았나?”
“받았지. 갑자기 나타나서 툭 던져 놓고 가버리더군. 웃긴 놈들. 누가 달라고 말도 안 했거늘. 오천명부에서도 받은 모양이지?”
“자네는 그것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철갑에서 나온 제조법으로 만든, 제대로 된 신무신단이라 하더군. 혹시나 해서 수하들에게 시범 삼아 복용시켜 보았지만 이상도 없었지. 그래서 한번 먹어볼까 고민하던 중이었네.”
“신무신단이 있으면 보여주게.”
“그러지 뭐.”
삼천명군은 바로 옥병을 꺼낸 뒤 오천명군에게 보여주었다.
“명왕 이 새끼가 우리에게 준 게 무엇인지 보여주겠네.”
그는 받은 옥병을 인양에게 건네주었다.
인양은 옥병을 연 뒤 안으로 백향목 열매 가루를 뿌렸다.
퍼엉!
결과는 똑같았다.
옥병에 든 신무신단이 부풀어 오른 뒤 터졌다.
“……!”
“신무신단을 복용하면 약효의 기가 머릿속에 저장이 된다더군.”
삼천명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망할 새끼가…… 우릴 죽이려고 했군.”
그의 시선은 여전히 신무신단이 터진 옥병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신무신단의 약효는 어느 정도 지속되는 것이지?”
“내공 증진의 효과는 사라지지만 약효 성분은 영원히 남아 있네.”
“그렇게 되면?”
스윽.
이번에는 고진유가 나섰다.
“백향목 열매 가루와 만나면 머리 안에서 반응을 일으킵니다.”
“남아 있는 신무신단의 약효를 지우는 방법이 있나?”
“혹시나 해서 해독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아…… 다행이군.”
“한 알이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럼 열 개 정도면…….”
“백 개 정도는 없는가?”
오천명군은 벌컥 소리를 쳤다.
“아니, 무슨 백 명이나 복용을 시켰는가?”
“한 명 가지고는 확인할 수 없지 않은가. 최소한 백 명이 괜찮다면…… 전부 복용하려고 했지.”
“무식한 놈.”
“……크흠. 미안하군.”
삼천명군은 눈치를 보면서 고진유와 시선을 마주쳤다.
“알겠습니다.”
녹림야검은 등에 메고 있던 짐 안에서 해독제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그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네. 자네가 두 번이나 우릴 살려주었군.”
“아닙니다.”
“명왕, 그 새끼를 치는 데 삼천명부는 당장 도움을 주겠네. 감히 이런 짓거리를…….”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어엉? 그게 아닌가?”
“그자와 싸우는 건 제가 할 일입니다. 명부에서는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여기 왜 왔는가?”
삼천명군의 거처에서 술상이 거하게 펼쳐졌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보며 부러웠다.
‘조손 관계라니…… 이거 참.’
황당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사실이었다.
“은룡투인은 명왕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가?”
“늘 자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자신감이라기보단 처음부터 진다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고진유는 술병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한 잔 더 드시지요.”
“고맙네.”
삼천명군은 술잔을 들어 술을 채웠다.
“우리도 이 친구가 얻었던 신무신단을 받을 수 있겠는가?”
“신무신단을 복용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여기도 제법 괜찮게 살아갈 수 있지만 세상보다는 좁지 않은가?”
“삼천명군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고맙네.”
“다만 세상에 나오신다면 명부에서 지녔던 힘은 잃게 될 것입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절반 정도로 떨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삼천명군은 이미 신무신단을 복용한 오천명군을 보며 물었다.
“자네도 알고 있었나?”
“복용하기 전에 미리 이야기를 하더군. 명부의 기운과 세상의 기운이 다르기에, 신무신단의 약효로 명부기 일부가 몸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렇군.”
“난 가끔 왜 우리가 명부에 살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네. 분명 세상 밖의 사람과 같은데 우리 조상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
“자네 말이 맞네.”
“그대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오천명군의 물음에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
항상 많은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네. 명부에서는 그저 시간이 지나가는 것만 구경할 뿐이지.”
“…….”
시간 구경이라.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명부의 일상은 늘 같았다.
하루에 시작과 끝은 거의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질 때가 대부분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난 중원이라는 곳을 구경 다닐 것이네.”
“그 옆에 자리가 빈다면 함께해도 되겠나?”
“후후후. 원한다면 얼마든지. 혼자보다는 둘이서 다니는 게 재미있지 않겠나.”
삼천명군은 결정을 내렸다.
힘이 약해진다고 했을 때 살짝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의 정리를 했다.
“좋아. 신무신단을 우리에게도 줬으면 하네.”
“본 가에서 계속 생산을 하고 있으니 나오는 대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백향목 열매 가루를 뿌려보면 제대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고맙네.”
채애앵.
세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다.
“이제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
“아직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가까운 곳부터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봅니다.”
“혹시 칠천명부로 가보지 않겠는가?”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가 구천명부와 사천명부 두 곳을 전부 차지한 상태지.”
“그게 정말인가?”
오천명군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칠천명부에서 두 곳을 공격이라도 했으면 단번에 소문이 났을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오천명부에서는 모를 수도 있겠군. 칠천명부에서 비밀리에 움직였다네. 거기에는 내가 아는 녀석들이 있거든.”
“칠천명부에서 움직인 이유가 뭔가?”
“명부 놈들이 이유가 있어 싸우는가? 갑가기 밥을 먹다가도 싸울 수 있는 게 우리이지 않나. 그리고 오천과 구천은 칠천명군을 싫어하지 않았나.”
“하긴…… 칠천명군과 두 곳은 오래전부터 좋은 사이는 아니긴 했어.”
“칠천명군이 마음을 먹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삼천명군과 오천명군도 그의 강함에 대해서 인정했다.
“저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칠천명부에서 그들을 쳤다고 하는데 어디로 움직인 것입니까? 지하에서 명부로 연결되어 있는 길이 따로 있습니까?”
“그건 아니다.”
“중원으로 나왔다는 것입니까?”
“그 방법밖에는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중원으로 나와 구천명부와 사천명부로 갔다는 것입니까?”
“그렇겠지.”
“……자신 있게 나온 것을 보니 신무신단을 받은 것 같습니다.”
“명왕에게서 말인가?”
“제 생각으로 그것을 받자마자 좋은 기회라고 여긴 모양입니다. 구천명부나 사천명부도 받은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같은 조건이지 않습니까.”
“칠천명부는 곧바로 복용했다는 말이군.”
“그들이 중원을 지나 두 곳으로 갔다는 사실만 봐도 신무신단을 틀림없이 복용한 게 맞습니다.”
“음…… 앞뒤를 가리지 않은 녀석이라 명왕의 말대로 복용하고 봤을 게야.”
두 명군 또한 그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결단력이 강한 인물인가 보네요.”
“명왕과 한때 제법 치고받을 정도였으니까. 명군들 중에선 가장 강한 인물이다.”
“우리를 만나줄지 모르겠군요.”
“칠천명군도 꽉 막힌 인물은 아니야. 만나서 충분히 설명하면 잘 들어줄 테지. 신무신단을 복용했다면 해독제가 필요할 테고.”
삼천명군은 심심하던 찰나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자네는 오천명군과 함께 그곳으로 갈 것인가?”
“그렇습니다.”
“나도 함께 가도 되겠는가? 칠천명부는 그나마 내가 좀 더 친하게 지낸다네. 같이 간다면 도움이 될 테지.”
“삼천명군님께서 함께 가주신다면 당연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대가 좋다고 하니 잘 부탁하겠네.”
삼천명부를 지난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 * *
산동성의 태안을 빠르게 내려온 후 안휘성으로 내려왔다.
일행이 도착할 장소는 칠천명부였다.
안휘성의 회북 북쪽에 위치한 바위산으로, 주민들은 망이산으로 부르고 있었다.
“……신기하구만.”
삼천명군의 반응도 중원으로 처음 나온 오천명군과 같았다.
신무신단을 복용했다.
약효가 몸속에서 퍼지는 느낌이 좋았다.
온몸을 조였던 사슬들이 풀리며 사라진 느낌.
예전에 나왔을 때와 다르게, 마음대로 세상 밖을 돌아다녀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역시…… 명부에 박혀 있는 것보다 세상에 나오는 게 더 좋군. 먹을 것도 많고. 게다가 너무 맛있다.”
그의 손에는 닭 꼬치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그는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다.
‘모든 일이 끝나면 삼천명부는 세상 밖으로 나와야겠군.’
회북으로 들어선 그들은 곧장 칠천명부의 땅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힘든 망이산으로 들어선 뒤 계곡 사이를 지나 무저갱 아래로 내려섰다.
얼마나 깊이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명부기가 사방에 퍼져 있는 것을 알았다.
“여기부터 칠천명부의 명천지가 시작되는군.”
다섯 사람이 칠천명부의 관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