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400화 (400/425)

400화

어둠 속이지만 고도유는 멈추지 않고 안으로 계속 들어섰다.

뚝.

긴 복도를 지나자 하나의 거실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가 끝인가?’

고도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으윽.

그의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잘 왔군.”

고도유의 곁으로 다가서는 인물.

중원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예전에 봤을 때와 또 다른 얼굴이야. 변용을 했군.’

고도유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있소이까?”

“후후후. 너무 급하군.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천천히 대화부터 나누는 게 어떠한가?”

“…….”

“자리에 앉게.”

고도유는 그를 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이미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셔보게.”

“…….”

“지상 위 시중에서 파는 일반 차라네. 서너 잔 마셔보니 괜찮더군.”

사내는 먼저 찻잔을 들어 마셨다.

그는 곧이어 차를 마시는 고도유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아직도 본인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는가?”

“없소이다.”

“그렇군.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이네.”

“그러는 당신은 후회를 하는 것이오?”

“내가 후회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그대에게 감사할 따름이지. 그대의 멍청한 결정 때문에 극일가를 완전히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거늘.”

“…….”

고도유는 찻잔을 든 채 그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놀란 모양이군. 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

“지금 배신을 하겠다는 것이오?”

“배신은 무슨…… 첨부터 극일가와 손을 잡을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배신은 누가 먼저 했는지 생각해보게.”

“…….”

고도유의 손에 쥔 찻잔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째애애앵!

“명왕, 죽고 싶은 모양이지?”

찻잔이 산산조각 부서지면서 깨졌다.

“훗. 협박하는 것을 보니 내가 두려운 모양이군.”

사내는 이미 뒤로 물러나 있었다.

고도유는 천천히 중원수호신무검을 뽑기 시작했다.

투명한 검신에서 은광이 사방에 퍼져 나왔다.

“밖에는 본 가의 무인들로 가득하다. 과연 이들 모두를 상대해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가?”

“크크크. 내가 네놈들을 무서워할 줄 알고 있군.”

“무서워하는 게 정상일 텐데. 명왕, 그대가 강하다고 해도 우린 극일가이다. 설마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스으으윽.

사내의 얼굴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사내의 눈은 매섭게 변했다.

“한 가지만 알고 나머지는 모르는군.”

“…….”

“내가 명왕이긴 하지. 하지만 실체는 이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툭툭.

그는 손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는 본 왕이 맞지. 하지만 몸은 잠시 다른 녀석을 이용한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나?”

“당신을 죽여도 실제로는 죽이지 못한다는 뜻인가?”

“똑똑하군. 그대가 생각한 그대로다.”

파앗!

고도유는 망설이지 않고 중원수호신무검을 내리쳤다.

채애앵!

명왕의 녹슨 철검이 떨어지는 중원수호신무검을 막아냈다.

고도유는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나고자 했다.

하지만 상대의 검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장난을 치는군.”

고도유의 입가에 차가운 살소가 나왔다.

번쩍!

중원수호신무검에서 빛이 폭발하며 상대의 검을 밀어냈다.

“크크크…….”

명왕은 뒤로 물러나면서 괴소를 터뜨렸다.

“역시 극일가는 다르군! 본 왕의 검에서 쉽게 떨어져 나가다니.”

“명왕이라고 해서 대단한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군.”

“극일가의 가주라면 본 왕의 상대로 충분하지.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아주게. 그대가 본 내 모습은 진정한 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상관없다. 가짜든 진짜든 내 눈앞에 나타나면 모두 죽여 버릴 테니까.”

타앗!

고도유는 앞을 달려 나가면서 중원수호신무검을 내리쳤다.

연이어 섬광이 터지면서 명왕의 시야를 가렸다.

두 사람이 선 공간에 오직 은광만이 보일 뿐이었다.

극일역천천지검공이 또 한 번 명왕을 상대로 펼쳐졌다.

콰아아아앙!!

강한 내력이 폭발하면서 사방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도유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너져서 죽는 것과 무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 그에게 죽는 것은 같았다.

명왕은 은광을 상대로 막아내면서 뒤로 밀려 나갔다.

‘강하군.’

그의 검을 상대하면서 오직 강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만큼 극일가의 무공은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제법 열심히 수련했어. 내가 방심한 모양일세.”

명왕은 명부에 들어선 고도유에 대해 무시하듯 말했다.

“방심이라…… 명왕에게 극일가는 방심할 정도로 약한 존재가 아닐 텐데.”

명왕은 전력을 끌어 올렸다.

그의 신형에서 은은한 내력이 흘려 나오면 감싸기 시작했다.

‘……의외군.’

명왕의 차분한 내기를 보면서 고도유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후후후.”

명왕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뿔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더니 갑자기 조용해졌군.”

“시끄럽다!”

고도유가 소리쳤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슈우우욱-

중원수호신무검에서 거대한 은빛 기류가 흐르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은천무량진항.”

극일역천천지검공을 펼쳤다.

명왕은 가슴으로 향해 쏟아져 나오는 은광을 보면서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쉬이이이이익-

명왕이 내력을 뿜어내자 그의 검에서 흐르는 검은 명부의 묵기가 다가오는 은광을 감싸며 막아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욱.’

고도유는 가슴에 느껴지는 명부의 기에 순간 울컥한 느낌을 받았다.

휘청.

그리고 다리에 힘이 살짝 풀렸다.

그 순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명왕의 검에서 쏟아져 나간 명부의 묵기가 중원수호신무검을 휘감았다.

찌이이이이잉-

귀를 울리는 강한 진동음에 고도유는 검을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다.

주륵.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젠장…… 방금 진동으로…….’

재빨리 운기를 하지 않으면 완전히 몸이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몸 상태보다 놀란 게 있었다.

‘완벽하게…… 파훼당했다.’

후다다다닥!

그가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 다행히 극일가의 무인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들은 우선 고도유를 감싸며 보호했다.

고도유는 바로 가부좌를 한 뒤 내부 혈맥을 바로잡기 위해 운기를 시작했다.

“크하하! 역시 별 볼 일 없는 놈이군.”

명왕은 더는 고도유에게 관심이 없었다.

실력이 늘었다고 하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여겼건만.

그는 천천히 돌아서며 바닥에 앉아서 운기하는 고도유를 본 뒤 미소를 지었다.

“그럼 먼저 가지.”

휘익!

명왕의 신형은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

“멈춰라!”

극일가의 무인들이 명부에 가득했다.

두두두-

명왕을 향해 극일가의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어허, 가만히 있으면 바로 죽지는 않을 텐데. 아쉽군.”

명왕의 사방을 둘러싸며 극일가의 검이 펼쳐졌다.

휙휙휙!

수많은 검들이 명왕을 베기 위해 다가왔지만 허공을 가를 뿐.

그때였다.

명왕이 사라진 자리에서 빛이 퍼져 나갔다.

스걱.

극일가 무인들의 목이 잘리며 떨어졌다.

“……!!”

명왕의 가공할 무공에 극일가 무인들은 뒤로 물러났다.

명왕의 상대가 되지 않다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

“어, 어디로 갔지?”

명왕의 신형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명왕은 멀리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굳이 손을 쓰며 모두 죽일 필요는 없지. 어차피 네놈들은 여기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할 테니.’

휘이이익.

명왕의 신형이 사라졌다.

벌떡.

운기를 마친 고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기서 나간 듯합니다!”

“…….”

고도유의 인상이 완전히 굳어졌다.

거용관에서 육천명군을 물리친 후 그의 연락을 비밀리에 받았다.

육천명부에 아직 명괴들이 남아 있으니 정리를 한 후 그곳에서 만나고자 했다.

근데…….

그가 배신했다.

* * *

오래전, 자신의 방에서 한 장의 서신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누가 보냈지?’

호위하던 무인에게 확인했지만 전혀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극일가의 호위를 뚫고 내 방에 서신을 놓고 갔다는 말인가?’

극일가 안으로 비밀리에 들어설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도유는 서신을 들었다.

찌이이잉.

손에 느껴지는 기가 특이했다.

‘대체…….’

서신을 펼치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열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없었다.

서신을 펼쳤다.

펼치기 전의 강렬한 느낌과는 다른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만날 시간도 적혀 있지 않은 서신.

하지만 극일가에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상대라면,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휘이이이잉-

산 정상에 올라섰다.

그곳에는 오직 바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도유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나왔다.

“나도 미쳤군. 장난 같은 편지에…….”

“아니. 미치지 않았다.”

“……!”

고도유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이 움찔거렸다.

휘익.

재빨리 돌아서며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중년 사내가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너무나 평범하기에 오히려 비범하게 보일 정도의 사내.

“당신은 누구요?”

“명왕.”

“……무엇이라 말했소?”

그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대가 알고 있는 명왕이다.”

“……!!”

고도유는 어이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인지 모르나 본인과 장난을 하는 것이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소.”

“왜 못 믿는 것이지? 분명히 누구인지 밝혔거늘.”

“…….”

사내의 눈빛에서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고도유는 분명 검을 뽑아야 했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믿는 모양이군.”

“……그대가 본인의 방에 서신을 보낸 것이오?”

“그렇다. 내가 직접 다녀왔지.”

“어떻게? 그곳에 본 가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크크크.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아직은 내가 누구인지 가르쳐 줄 수는 없다네.”

“…….”

명왕의 말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의 입으로 명왕이라고 했지만 또 다른 신분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점점 그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해졌다.

우선 그가 자신을 만나고자 한 이유를 묻고자 했다.

“명왕, 본인을 이곳까지 부른 이유에 대해서도 비밀이오?”

“그건 아닐세. 당연히 알려줘야겠지.”

“무엇이오?”

“여전히 성격이 급하군. 여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무엇이 보이는가?”

“…….”

“세상이 보이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다면 무인이 아니겠지.”

스윽.

고도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지금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오?”

“저기 내려다보이는 세상을 주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

고도유는 순간 심장이 떨리는 것을 알았다.

“무슨 말이지? 본인이 누구인지 잊었소?”

“극일가의 인물이지. 그저 세상을 구한다는 알량한 대의에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놈.”

챙!

고도유는 검을 뽑으며 명왕을 향해 겨누었다.

“나를 죽이려 했다면 벌써 검을 뽑았겠지. 안 그런가?”

“닥쳐라!”

“세상을 극일가가 아닌 그대에게 주겠다. 그동안 난 재미를 보고 난 뒤 물러나도록 하지.”

“……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지?”

“명부에도 없앨 놈들이 있어서. 근데 내가 나서기에 애매한 놈들이라 누군가의 손이 필요할 뿐일세.”

“그것을…… 극일가에서 해주기를 바라나?”

“맞네. 난 지상에는 관심이 없네. 명부나 지상이나 다를 게 없거든. 자네와 내가 각자 있는 자리에서 잘 지내면 되지 않겠나?”

“…….”

고도유의 마음 한편에 있던 욕망이 깨어나고자 했다.

“앞으로 극일가의 가주가 나타난다면 자네는 극일가를 위한 소모품 인생으로 살다가 죽겠지.”

‘……소모품이라…….’

고도유는 아버지처럼 극일가에서 그런 인생으로 살다가 죽고 싶지 않았다.

무인으로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변했다.

“당신 말을 들어보지.”

고도유는 뽑아 든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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