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팔천명군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천지금쇄진법에 대해 잘 알았다.
‘이건 우리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낼 뿐이지. 진법에 갇힌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네놈들도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와야겠지.’
싸우는 것은 결국 마찬가지.
그는 팔천명부의 명괴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조용히 기다려라. 조만간 극일가에서 들어올 것이다. 그때 끝장내면 그만이다.”
지상으로 나온 명괴들이 이보다 조용할 때는 없었다.
그들도 분위기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긴장을 유지하면서 적이 들어올 때까지 웅크리며 기다렸다.
거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은 오직 살의만으로 번쩍이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팔천명군의 말이 맞았다.
스르르륵.
진법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후후. 중앙에 모여 있군.’
고도유는 진법으로 들어오면서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파악을 끝난 상태였다.
천지금쇄진법의 내부에서는 외부의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외부에서는 내부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너무 쉽군.’
극일가의 가주가 된 고도유는 자신이 있었다.
휘익.
그는 수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진법에 들어선 극일가의 무인들은 한곳에 뭉쳐 있는 명괴들을 향해 다가섰다.
슈우우욱.
극일가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강력했다.
당당한 움직임은 그들의 내력을 더욱더 강하게 보여주었다.
‘강하군.’
광오하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
선두에 선 명화일공은 눈썹 끝이 치켜 올라섰다.
투욱.
이마에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내가…… 땀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올라왔다.
슈우우우욱.
순간 앞에서 다가오는 검기를 느꼈다.
‘크윽, 이렇게 빨리……!’
그는 고개를 들어 공중에 뜬 인물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불쑥 다가온 검기를 막아냈다.
콰아아앙-!!
검기가 떨어진 충격은 컸다.
명화일공은 뒤로 밀려 나갔다.
두두두두두두-
그와 동시에 극일가의 무인들이 좌우에서 쏟아져 나왔다.
명괴들과 부딪치는 그들의 무력은 강했다.
수적으로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극일가의 무인들이 밀어붙이는 힘은 팔천명부를 밀어내는 데 충분했다.
쉬이이이이이-
계속해서 명화일공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검기가 다가왔다.
“어떤 새끼가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느냐!”
파아앗!
명부살유기가 뻗어나가며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기를 쳐냈다.
콰아아아앙!!
기의 폭풍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며 서로 밀어냈다.
상대는 무장의 모습을 한 인물이었다.
“적룡무장기 대주 공초라 한다. 그대는?”
“명화일공이다.”
“팔천명부 명화공의 수장인가. 내가 잘 보았군.”
공초는 달려오면서 선두에 선 명족들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명화일공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명족들이 얼마나 강한지 싸워보고 싶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극일가의 무공이 얼마나 강하기에 지상으로 나가지 못할까 궁금했지.”
“대답이 마음에 드는군. 시작해 볼까?”
“얼마든지.”
째애애앵!
공초는 적룡수종검을 정면으로 끌어올렸다.
햇빛을 받은 검신에서 쏟아진 빛이 명화일공의 얼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는 강한 햇빛에 얼굴을 짧게 돌리며 인상을 썼다.
타아아앗!
공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오면서 적룡수종검을 내리쳤다.
번쩍.
또 한 번의 섬광이 터지면서 명화일공의 시선을 가렸다.
“크아아아아!!”
명화일공은 목이 터질 듯 괴성을 질었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명부의 혼령이 앞으로 솟구쳤다.
쉬이이이이이-
섬광의 앞을 명부의 혼령들이 감싸면서 막아냈다.
“……!”
공초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분명 그의 전력을 다한 일검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공초의 일검을 막아낸 명화일공 또한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전력을 쏟아낸 탓인지 뒤이은 움직임이 불편했다.
‘이런…….’
다른 곳에서 서로 싸웠다면 둘 중 한 명이 먼저 물러났을 터.
하지만 지금, 누군가 한 명은 필히 죽어야 했다.
물러날 수 없는 두 명은 다시 기를 끌어 올리며 서로를 향해 살수를 펼쳤다.
쉬이이익-
슈우우욱!!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해 방어는 필요 없었다.
누가 먼저 눈앞에 보이는 적을 죽일 것인가.
스걱.
퍼어어억!
날카롭게 잘려 나가는 소리와 동시에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
“…….”
공초와 명화일공은 서로 마주 보며 노려보았다.
공초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보았다.
옷이 떨어져 나가며 드러난 허리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피하진 못했군…….”
검을 휘두른 다음 상대의 공격을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또한 빨랐다.
공초는 몸 전체로 상처가 번지기 전에 재빨리 혈을 눌러 막았다.
그 모습을 본 명화일공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상대의 강함을 인정했다.
‘졌다. 이길…… 수 없…… 어.’
쿠우우웅.
명화일공은 몸은 통나무처럼 앞으로 넘어졌다.
* * *
팔천명군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명화일공의 죽음.
오랫동안 함께했던 수하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
노여워하거나 분노가 폭발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할 뿐이었다.
“멍청한 새끼…… 그것 하나 똑바로 못하고 죽어버리는군. 실력이 안 되면 죽을 수밖에 없지.”
당연했다.
명부에서 평생을 보낸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휘이익!
명군의 앞으로 한 인영이 내려섰다.
극일가의 새로운 가주가 된 고도유가 팔천명군을 노려보았다.
스르르르-
팔천명군의 기에 대항하기 위한 용린기가 뿜어져 나왔다.
“용린기? 누구지?”
“극일가의 가주. 고도유라 한다.”
“가주? 패룡무군장 고도유가 아니고?”
극일가의 가주란 말에 팔천명군은 의아한 시선으로 고도유를 보았다.
“모르고 있었군. 물론 패룡무군장이라고 불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는 본인이 극일가의 가주지.”
“…….”
팔천명군은 입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주라고 말할 때 그의 눈동자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
‘이자는…… 우리와 같은 눈빛이군.’
세상의 구원자라고 알려진 극일가의 가주의 눈동자에서, 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탐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세상 누구보다도 순수한 감정에 대해 잘 알았다.
“크크크…….”
팔천명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하하하핫!!”
“…….”
점점 커지는 웃음소리에 고도유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가슴을 파고드는 상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웃는 거지?”
“그냥…… 갑자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을 뿐이니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
“지금 본인을 놀리는 것인가?”
“그대가 극일가의 가주라고 한다면 고금제일인은 극일가에서 나온 것인가?”
“그는 본 가의 은룡투인이다.”
“은룡투인이 가주가 되는 것은 아니군.”
“남의 집안일이 무슨 상관이지?”
“크크크크. 다만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다.”
팔천명군은 기분 좋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제는 승패도 의미가 없었다.
극일가주 또한 세월이 지나면 점점 자신들처럼 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탐욕으로 물들게 되는 것이었다.
“극일가의 무공이 어떠한지 구경해볼까 하는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보여주지. 나 또한 명군의 무공에 대해 궁금했으니.”
“오늘은 서로 궁금했던 게 해소되는 날이군.”
고도유와 팔천명군은 가볍게 서로를 주시했다.
어떠한 내기도 없이, 그저 미소를 띠며 주시하는 것뿐이었다.
“……역시 극일가의 가주답다.”
“당신도 명군답군.”
그들의 무력이라면 내력이 실리지 않아도 안광만으로 상대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다.
서로 보는 것만으로 수십 번의 생과 사의 서로 교차하면서 지나쳐 갔다.
스르르르르릉-
중원수호신무검이 천천히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극일가의 가주의 신물이자 가주에게 물려주는 검.
두 자 반 정도의 투명한 검신과 손잡이를 휘감고 있는 은빛의 용.
중원수호신무검에서 흐르는 은광은 명부의 기를 중화시키며 흐트러지게 했다.
“그 검…….”
“본 가의 신무검이 부담스러운가?”
“…….”
팔천명군은 눈을 찌푸렸다.
검을 볼수록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부담은 무슨. 나중에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아깝다고 않을까?”
“그런 걱정은 당신이 할 필요는 없겠지. 본 가의 중원수호신무검은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
“크크크, 다른 건 몰라도 그 검만큼은 부숴 버려야겠군.”
찌이이잉-
그의 손안에서 거대한 월극대도가 만들어졌다.
손잡이부터 예리한 날까지 진한 흑색.
우우우웅-
팔천명군은 전신에 흐르는 내력을 월극대도에 밀어 넣었다.
투두두두둑.
월극대도를 덮고 있던 흑색의 막이 마치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부서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번쩍!
흑색 막이 완전히 사라진 월극대도가 태양의 빛을 그대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샤아아악-
백색으로 변한 월극대도가 바람을 가르며 고도유의 왼쪽을 지나갔다.
‘빠르다.’
휘리릭!
고도유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면서 바람에 날렸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다가오는 것 같던 월극대도는 갑자기 공간을 뚫고 나오며 몸을 두 쪽 낼 뻔했다.
상대의 공격은 기습 아닌 기습.
‘동요해서는 안 돼.’
아쉽거나, 안타깝거나, 두렵거나, 포기하는 생각을 하는 즉시 상대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팔천명군은 그것을 알면서도 이번 공격은 상당히 아쉬워했다.
“성공할 거라 생각했나?”
“…….”
“두려운 모양이군.”
“맘대로 생각하든지.”
“당신의 말은 의미가 없어. 이미 몸으로 설명이 되었으니까.”
스으으으응-
중원수호신무검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위의 기를 빨아 당기는 힘이 강해졌다.
‘역시…… 신검이다.’
신검을 든 시전자의 내력뿐만 아니라 시전자 주위에 흐르는 자연 속의 무형기마저도 힘을 더해주었다.
구우우우웅-
하늘이 움직이는 듯, 그리고 땅이 움직이는 듯한 굉음이 울었다.
고도유의 검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가주가 된 후 가장 먼저 가주의 무공인 극일가 최고의 검공을 익혔다.
극일역천천지검공.
고진유조차 익히지 않은, 극일가 최고의 검공이자 무공이었다.
‘엄…… 청난 검공이군.’
팔천명군 또한 다가오는 기세만으로 검공의 위력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 또한 구천명부 중 한 곳의 주인.
신무신단으로 인해 명부가 아니더라도 지상에서 전 내력을 펼칠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팔천명군의 신형이 흑무기체로 변하면서 세상을 덮을 만큼 번져 나갔다.
잠시나마 진법에서 싸웠던 두 진영의 무리들은 서로 물러나며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땀이 맺힌 손을 강하게 쥐었다.
고도유와 팔천명군의 싸움은 마치 신들의 싸움과도 같아 보였다.
꿀꺽.
누구도 결과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오직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할 뿐.
콰아아아앙---!!!
중원수호신무검이 팔천명군 앞에서 부딪히기 전에 폭발했다.
“커어어억……!”
예상 밖의 공격이었다.
그는 눈앞에서 터지는 중원수호신무검의 위력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슈우우우우-
흑무기체 앞에서 터진 폭발 때문에 파장의 위력이 증폭되며 팔천명군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순간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