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오천명군은 나란히 앞으로 나온 고진유와 고화유를 보며 오래전 잊고 지냈던 얼굴이 생각났다.
“고화유라고 했나? 그 아이와 닮았군.”
“아버지께서도 가끔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세상이 무너져도 죽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죽었더니 믿을 수가 없군. 정말로 그가 죽었더냐?”
“제 앞에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오천명군은 여전히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극일천의 천주 황야이자 극일가의 전대 가주.
그의 죽음에 대해 들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짜 죽었다는 것인가?”
오천명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상의 인간들은 그에 대해서 모른다.
‘설마 자신의 아이들까지 속인 것은 아니겠지? 그 아이를 속인 것처럼…….’
스윽.
오천명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진유와 따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은룡투인,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따라오게.”
명군은 바로 뒤를 돌아 사라졌다.
스윽.
명화오공이 앞으로 나섰다.
“그대는 명군님을 따라가게. 여긴 내가 따로 안내하겠다.”
“일행을 부탁하겠습니다.”
고진유는 먼저 사라진 명군의 뒤를 향해 움직였다.
* * *
오천명부는 분명 지하라고 생각했다.
‘……하늘?’
계단을 따라 오르면서 끝을 보았다.
고진유는 마지막 계단 위로 올라섰다.
‘아니군.’
머리 위에 보이는 건 푸른 하늘이 아니라, 푸른빛을 내는 천장이었다.
‘그분은…….’
오천명군이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윽.
멀리 바위를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진유도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계단 끝에서 보았던 바위를 돌아서자 넓은 장소가 나왔다.
오천명군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은룡투인, 왔으면 앞에 앉게.”
고진유는 그의 앞에 놓인 석좌에 앉았다.
“그 아이는 이곳에 올 때마다 지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직접 보고 싶어 했지.”
명군이 말한 그 아이.
어머니를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결국 그 아이는 지상에 올라갔지. 그리고 그 뒤로 명부에 내려오지 않았다. 영원히…….”
명군의 얼굴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는 고진유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넌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느냐?”
“저희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너희의 모친은 명부 출신이긴 하지만 지상에서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부에서도 아주 특이한 능력을 지닌 명족이 태어나곤 하지. 그 아이는 지상에 나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런 능력을 지녔다는 말씀이십니까?”
“명부에 있을 때는 몰랐지. 당사자인 그 아이도 지상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했다.”
늘 말하던 지상의 하늘을 잠시 보기 위해 갔다가, 아무렇지 않은 몸 상태를 알고 중원을 유람했던 것이었다.
고진유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져 갔다.
‘숙부에게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건가? 명부의 여인이라 출산하면서 돌아가셨다고 하셨는데…… 아니면 이분께서 나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고진유는 정확히 상황을 판단해야 했다. 확인도 되지 않은 것에 경솔히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당장 결정할 수는 없었지만, 명군의 말이 맞다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건가?’
당장에라도 오천명군에게 어머니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가만히 경청만 할 뿐이었다.
“난 그 아이에게서 젊은 청년을 만났다고 연락을 받았지.”
‘젊은 청년이라고?’
고진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아이와 서너 번의 연락을 주고받은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왔다. 객잔에서 만났던 사내와 결혼을 하겠다고.”
“…….”
“더구나 그는 극일가의 인물이라고 하면서 결혼할 여인을 찾기 위해 중원에 나왔다고 하더군.”
오천명군은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린 대체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심지어 극일가의 인물이라고 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만나기 위해 지상에 올라갔고, 결혼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냈지.”
“…….”
“극일가의 가주이며 극일천주라 하더군.”
“저어…… 죄송하지만 제가 기억하기에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맞다. 그 아이를 만날 때는 얼굴을 바꿨다.”
“…….”
오천명군이 말한 내용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당사자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난 그가 변용까지 하면서 일부러 그 아이에게 접근했다고 보았다.”
“왜……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오직 그만이 알겠지.”
“아버지께서는 제 앞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진짜인지 확신하느냐?”
“…….”
오천명군의 말에 고진유의 마음이 흔들렸다.
‘나를 속이고자 한다면 그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극일가의 가주이면서 극일천주였던 아버지께서 변용을 하면서까지 어머니에게 접근한 이유도 있을 것이고.’
고진유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머릿속에 호통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아. 마음이 혼란할 때는 항상 단심공을 외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부님.’
고진유는 곧장 매화단심공의 구결을 외웠다.
쏴아아아아아-
몸속에서 청량한 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휴우…….’
흥분되기 시작했던 마음이 진정되어갔다.
“……제가 지금 당장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처음 듣는 이야기이니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게 좋겠지. 이해한다.”
“고맙습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고진유는 그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이곳은 명부에 대해 들은 것과 다르다.’
오직 살육과 죽음만이 있는 세상이 명부라 했다.
하지만 오천명부에 들어서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삼천명부와 또 다른 느낌이지만 피 냄새만이 나는 곳은 분명 아니야.’
명군은 고진유의 표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명부에 들어서니 어떠한가?”
“장소만 다를 뿐 지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린 특이한 종족일 뿐이지. 근데 소문이 너무 안 좋은 방향으로 났더군.”
“그렇습니다. 명족은 오직 죽음밖에 모른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틀린 것도 아니지. 명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이다.”
“…….”
“다만 우린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지. 미친놈처럼 함부로 날뛰지는 않아.”
“팔천명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내가 말한 미친놈들이 바로 그들이지.”
“명부 전체는 팔천명부와 다르다는 것이네요.”
“다르다…… 라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호전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보면 된다. 명왕의 뜻에 동조하여 지상인과 싸우게 된다면 우리도 팔천명부와 다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삼천명부 또한 명왕의 명에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았었다.
그때는 삼천명군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물어볼 수 있었다.
“무엇이지?”
“명부들은 명왕의 명을 무조건 따르지 않습니까?”
“지금 묻는 이유가 삼천명군 때문이군.”
“맞습니다. 그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웬만하면 명왕의 명을 따르지. 하지만 명왕의 명은 절대적이지 않다. 명부의 법에 의하면 명왕과 명군은 동일한 위치이기에 힘으로 거부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구천명부의 수장인 명왕은 아홉 명의 명군 중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 모든 경쟁자를 이겨내고 되는 것이었다.
명왕이 되고자 한다면, 그를 제외한 명부의 명군이 도전하여 명왕을 이겨야 했다.
“명왕이라고 해서 명군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렇군요…… 명왕에 대해 설명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삼천명부의 일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전혀 명왕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명왕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이 없습니까?”
“도전자의 조건은 한 가지밖에 없다. 우선 명부의 수장에 도전한 후, 명군이 되면 된다. 그러면 명왕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것이지.”
“명군 외에는 도전하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그렇다.”
“만일 명왕의 명을 거역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명부는 오직 힘으로 결과를 낼 수 있다. 명왕의 방문을 받겠지. 그와 함께 명왕군도 따라올 것이고.”
“그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명왕의 명을 어기면 안 되는 것이네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들의 대화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갔다.
오천명군은 마지막으로 고진유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지상인이 명부에 들어오면 원래의 내력을 그대로 펼칠 수 없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말씀하시지요.”
“함께 온 그들은 어떻게 된 것이지? 전혀 무공이 줄어들지 않은 것 같은데.”
“신무신단을 복용했습니다.”
“이런…….”
오천명군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했다.
일월가에서 만들었다는 신무신단을 이들이 왜 복용했는지 단번에 이해한 것이다.
명부의 명족들이 지상에 나가기 위해 일월가에서 만든 것이 신무신단이었다.
이는, 반대로 극일가에서 복용한다면 그들이 명부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명족들이 가능하다면 극일가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너무 완벽하게 되어서, 오히려 명족을 위한 게 아니라 극일가를 위한 신무신단이 아닌가 싶을 정도…… 였습니다.”
고진유는 말을 하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극일가를 위한 게…… 아니라면……?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건 우연일 뿐이야.’
* * *
제갈세가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무림맹으로 모여들었다.
제갈세가의 가장 큰 어른 제갈문의 명에 제갈세가의 가주까지 집결했다.
중원상국의 신안 제갈기까지 전서를 받았다.
“허허, 형님께서 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부르시는지 모르겠군.”
중원상국에 몸을 담은 후 제갈세가에서 부르는 일은 처음이었다.
전서에는 무림맹에 모여야 하는 특별한 이유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한 줄 때문에 집결할 수밖에 없었다.
-기야, 형님한테 맞기 전에 오도록 해라.
제갈기는 중원상국에서 특별히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무림맹 근처에 도착했다.
“제갈 어르신, 반각이 지나면 무림맹에 도착할 것입니다.”
“수고했네.”
“저어…… 근데…… 앞에 제갈세가에서 나오신 분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
제갈세가의 의복은 어딜 가도 비슷했다.
마차를 몰던 표두 호총이 그들을 단번에 알아본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가인들이 많다고?’
“잠깐 멈추게.”
“알겠습니다.”
제갈기는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표두 호총이 말한 제갈세가의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자신에게까지 전서를 보냈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모였을지.
그의 말처럼 제갈세가 출신의 인물들이 한데 잔뜩 모여 있었다.
그들 또한 무림맹에서 보낸 제갈문의 전서를 받았다.
-무림맹에서 할 일이 있으니 전서를 받는 대로 들어오도록. 만일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세가에서 호적을 파낼 테니 알아서들 하라.
제갈문의 말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들은 진담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분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은 분이시다.’
세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들에게 호적을 파버린다는 말은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제갈기는 제갈세가인들이 모여 있다는 곳을 보았다.
모두 대부분 백색 문사건을 쓴 제갈세가의 인물들이었다.
‘제갈노까지?’
자신처럼 다른 문파나 가문에 몸을 담고 있는 제갈세가인까지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본 가의 제갈기가 펄럭이는 마차가 보였다.
‘본 가에서도 왔군.’
무림맹으로 들어서기 전 사전에 정보를 얻기 위해 모여 있는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던 그들은 다가오는 노인을 보면서 조용해졌다.
제갈기의 눈매 때문인지 그의 첫인상은 언제나 강해 보였다.
더구나 그는 제갈문 다음으로 가장 연배가 높은 어른이었다.
제갈세가인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신안 숙부를 뵙습니다.”
“허허허. 자네도 왔는가?”
제갈기가 어깨를 두드리며 중년 사내를 반갑게 맞이했다.
“세가 밖으로 얼굴을 내보인 적이 없다는 가주도 나왔구려.”
“천안 제갈문 숙부께서 좋은 일이 있다고 하시기에 얼른 달려왔습니다.”
“후후후. 얼마나 좋은 일이기에 사방팔방으로 나갔던 세가의 사람들을 불러들이는지 모르겠군.”
“그분께서 신안 숙부까지 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일은 항상 나누어야지. 근데 도착했으면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분도 계셔서 인사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렇군. 무림맹에 들어가서 천안 형님 앞에서 떠들 수는 없는 일이긴 하지.”
제갈기도 모여든 세가의 형제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보게, 유안.”
제갈노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태생적으로 다리가 불편했다.
“신안 형님을 뵙습니다.”
“천안 형님이 뭔가 제대로 할 모양인가 보네. 불편한 자네까지 부를 정도라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전 기분이 좋습니다. 여기에 모인 얼굴들을 보니 세가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들만 부르신 것 같군요. 제가 그 안에 있다는 게 좋습니다.”
“허허허! 그런가? 안으로 들어가 보세나. 천안 형님이 얼마나 좋은 물건을 가지고 계시기에 우리까지 부르는지 보고 싶군.”
제갈기는 세가의 인물들과 함께 무림맹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