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인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참…… 그리고 천마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천마가 온다고? 왜?”
“우리와 합류할 것이라 하더군요. 진유 형의 말로는 얼마나 화가 났으면 우리와 함께 싸우고자 하겠냐면서, 그가 오면 잘 대해주라고 하셨습니다.”
“…….”
잘해줄 사람이 따로 있지?
합류하겠다고 하는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교주 천마가 아닌가.
그는 천검궁의 초정과는 달랐다.
“천마와 잘 지내라니. 중원의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기절초풍하겠어.”
장두총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천마의 심정이 이해는 갔다.
만일 화산파가 그렇게 당했고 마교밖에 도울 곳이 없다면, 자신이라도 부탁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하튼 잘 알았다. 명부가 사라질 때까지는 중원인으로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겠지.”
장두총의 말처럼 명부를 앞에 두고 중원은 서로 도우며 싸워야 했다.
“근데…… 이 녀석은 어디 있냐? 도통 보이지 않네.”
분명 고촌에 돌아온 고진유였건만, 도착한 날 이후 그의 모습을 제대로 구경할 수 없었다.
* * *
슈우우욱-
고도유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은색 빛이 사방으로 번졌다.
‘흠…… 역시 대단하군.’
고진유는 다가오는 그의 기세를 보며 극일가의 무공답다고 생각했다.
슬렁.
고도유의 어깨가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무화가 피어올랐다.
은빛 내력을 타고 무화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고도유가 가볍게 내밀었던 동작은 너무나 평범해 조만간 빛이 사라질 것처럼 하늘거렸다.
하지만 은빛의 무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도유 형님의 무공은 평범 속에서 비범인가?’
고진유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화의 내력이 고진유를 포위하며 좁혔다.
다가오는 고도유의 장법을 보면서 오히려 고민이 들었다.
쉽게 피하거나 막아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고도유가 펼친 은무장법은 잠깐의 머뭇거림으로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파아아앗!
붉은색 빛이 퍼지는 동시에 눈앞에까지 다가온 은무장법이 사라졌다.
은은한 매화 향기와 함께 고도유의 주위로 매화 잎이 날렸다.
‘매화…….’
고도유의 무공을 극일가의 무공이 아닌 화산파의 무공으로 막아냈다.
퍼어어엉-!!
기의 폭발과 함께 충격 때문에 생긴 폭풍이 서로를 밀어냈다.
고도유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극일가의 자손이기에 용린기를 지녔다.
그들 사이에 차이는 은룡투인으로 변할 수 있는 후예는 오직 한 명뿐이라는 것.
고진유가 은룡투인으로 변하기 전까지 그들의 기본적인 힘은 거의 비슷했다.
주르륵.
비슷한 힘으로 무공을 펼치며 서로를 밀어냈지만 고진유에 비해 고도유의 신형은 뒤로 십여 걸음 밀려났다.
“분명 거의 대등한 내력이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고도유는 자신이 밀려나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건 제가 펼친 내력에 반탄력을 합쳐 펼쳤기 때문입니다.”
“…….”
서로 다른 두 개의 내력을 동시에 따로 펼친 게 아니었다.
한 번에 펼친 내력 안에 또 다른 내력이 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냐?”
“해보니깐 어렵지 않더군요.”
“후후.”
고도유는 웃음만이 나왔다.
극일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은 명백했다.
극일가의 인물들이 중원 무림인보다 강한 이유는 태어나기 전부터 극일심공의 내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일가의 무인은 새로운 내력을 익히고자 해도 극일심공의 강한 힘에 막혀 제대로 익히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건 극일가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가요? 난 또 전부 가능할 줄 알았거든요.”
“넌 가끔 어이없는 말을 잘하더군. 이번에는 제대로 싸워보자. 지금부터 봉인했던 내 힘을 마음대로 할 테니 알아서 막아내도록 해.”
“……봉인까지는 아니지 않나요?”
“시끄럽다. 고금제일인이 어디서 엄살을.”
두두두두-
고도유의 내력에서 거친 소리가 울렸다.
“간다. 마음에 차지 않겠지만 열심히 하겠다.”
“쩝. 알겠습니다.”
극일가의 최고의 무공.
고도유의 한 손에 무형기검이 생겨나면서 주위의 기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그의 발밑으로 생긴 원형의 은색 빛이 점점 진하게 만들어졌다.
“진유, 간다!”
팟팟팟팟팟!
은색 광명이 공중으로 솟아오른 뒤 고진유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단순한 공격처럼 보이지만 위력에서 마치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유성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매화의 바람이 불었다.
붉은 매화가 바람을 따라 고진유의 전신을 휘감으면서 보호했다.
위력으로 보아서는 전혀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쏟아져 내리는 은색 광명의 강기들은 홍매화의 결계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쾅쾅쾅쾅쾅!!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먼지들이 앞을 가렸다.
“……대단하다. 은룡투인이 아니라도 아우를 이길 수 없군.”
“도유 형님께서 너무 봐주신 게 아닙니까?”
“고금제일인을 앞에 두고 내가 봐주긴 뭘 봐준다고. 역시 아우는 우리와 달라.”
“제가 특이하긴 하죠. 숙부님께 들었을 때 너무 놀랐습니다.”
고묵에게 들은 오래전의 비밀 이야기가 있었다.
고진유와 고화유의 어머니는 쌍둥이를 낳은 후 돌아가셨다고 했다.
두 남매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기에 어디 출신인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극일가 대부분의 사내는 결혼할 시기가 되면 중원에 나간 뒤 일반 여인들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당연히 어머니도 중원의 여인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날 저녁, 그들의 어머니에 대해서 숙부에게 들었다.
* * *
“두 사람 모두 앉아라.”
“네, 숙부님.”
고진유와 고화유는 그가 왜 불렀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을 부르기에 늦은 시간이었다.
고묵은 맞은편 자리에 앉은 두 남매를 보았다.
“내가 무슨 일로 부른지 궁금하겠구나.”
“네. 숙부님.”
“……혹시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어머니에 대해서 들은 게 있느냐?”
“특별하게 들은 건 없었어요. 우리를 낳은 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고화유는 고진유와 달리 많은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했지만 어머니에 대해 자세히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때가 된 듯하니 너희들에게 그분에 대해 알려주도록 하마.”
“숙부님.”
고진유가 그를 불렀다.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따로 부른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저희가 현 시점에 그분에 대해 꼭 알아야 합니까?”
“…….”
고묵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분위기를 봐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머니께서 명부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고화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뭐라고?’
그녀는 고진유의 말을 들으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고진유에게 물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잠자코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며 기다렸다.
“맞다. 너희들을 낳은 뒤 돌아가신 형수님은 오천명부의 출신이시다.”
“…….”
“…….”
명부 출신의 어머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고진유와 고화유는 지금처럼 충격적인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두 남매 모두 담담했다.
한동안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고진유는 마음을 다스렸다.
“숙부님, 정말이십니까?”
“맞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은 그분을 절대로 미워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된다.”
“저희에게는 어머니일 뿐입니다. 미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형수님은 너희들을 낳는 중 돌아가신 것은 맞지만 이유가 있었다.”
“몸이 약해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까?”
“형수님은 명부의 인물이기에 세상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희 둘은 명부가 아닌 극일가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고 싶어 했지.”
“아…… 어머니께서 명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군요.”
명부의 인물이 세상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며 그만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희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건…… 명부 출신으로 너희를 출산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형님은 당연히 명부에 가는 것을 원했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명부의 인물이 된다고 하더라도, 형수님을 잃고 싶어 하지 않으셨지. 하지만 형수님께서는 너희를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는 것을 원하셨다.”
고진유와 고화유는 가슴이 막막했다. 자신들을 위해 어머니가 목숨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형수님의 아버지. 너희들의 외조부가 바로 오천명군이다.”
“그…… 분은 알고 계십니까?”
“형수님에게서 아이를 출산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쌍둥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알게 되었을지도. 최근에 소문이 나지 않았느냐.”
이제는 고진유의 신분은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만큼 중원에 퍼져 나갔다.
“숙부님, 어머니에 대해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다. 진작 알려주지 못해서 내가 미안할 뿐이다.”
“아닙니다. 예전에는 때가 되지 않았겠지요. 근데…… 그분들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 * *
스윽.
방년으로 보이는 여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가 객잔이라는 곳이구나.”
말로만 듣던 중원의 객잔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사전에 파악을 끝냈다.
다다다다-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두른 객잔 점소이가 빨리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 네에.”
‘뭐야?’
점소이는 아래위를 쳐다보면서 단번에 파악했다.
돈 많은 집의 여식으로 집안 몰래 밖으로 구경 나온 게 확실했다.
“객잔에 처음 오셨소?”
“네에.”
‘오늘 재수가 좋다고 하더니만…… 적당히만 받아먹으면 탈이 없겠지.’
점소이는 앞으로 돌아섰다.
“따라오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점소이를 따라 객잔 안에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뭘 드시겠습니까?”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거로 주세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일단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음식부터 시키는 것으로 봐서 돈 많은 집안인 게 확실했다.
“알겠습니다. 저희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음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네에, 부탁하겠어요.”
점소이는 돌아서면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제대로 호구를 잡았어.’
그녀에게 돈은 얼마든지 있어 보였다.
두리번두리번.
혼자 식탁에 남은 그녀는 신기한 듯 주위를 살폈다.
뚝.
그렇게 고개를 돌리다가 건너편 식탁에 있는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야, 느글거리게.’
자신을 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그러자 창가에 앉은 청년이 보였다.
약관 정도로 어려 보이는 나이.
청년은 음식을 먹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옆으로 돌렸다.
그녀와 잠시 시선이 마주쳤지만 별 상관이 없다는 듯 돌아서며 식사에 전념했다.
이각 정도 지났을 때, 주방에서 손에 가득 요리된 음식을 들고 나왔다.
“손님, 준비하신 음식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많이 시켰나요?”
“맛있는 거로 전부 달라고 하셔서 준비한 것입니다. 이미 만든 것이라 무를 수는…….”
“네에. 됐어요. 전부 내려놓으세요.”
점소이는 식탁에 얼른 세 접시를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스윽.
그녀는 허리 안에서 주머니를 꺼낸 뒤 금전 하나를 내밀었다.
“수고비를 준다고 들었어요.”
“아…… 고맙습니다. 성심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께서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소인을 부르시면 됩니다.”
점소이는 허리가 접히도록 숙였다.
단번에 객잔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조용히 식탁 가득 채운 음식을 혼자서 거의 남김없이 먹었다.
끼이익.
그때, 그녀의 옆자리에 있던 사내가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났다.
“이보시오, 소저. 합석해도 되겠소이까?”
그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니요. 아까부터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잖아요. 난 응큼한 눈을 별로 안 좋아해요.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거죠?”
웅성.
그녀의 목소리에 객잔 안이 술렁거렸다.
사내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미친년이 있나? 감히 위지세가의 소야검을 어떻게 보고 망발을 지껄이는 거야?”
“당신이 이상하게 쳐다봤는걸요. 난 그런 눈을 많이 알아요.”
“내가 언제 봤다고……! 돼지처럼 먹고 있기에 신기해서 봤을 뿐이다!”
휘이익!
퍼어억!
그 순간, 그의 옆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피하고자 했지만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온 물체는 그대로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악!”
위지양은 바닥에 쓰러지면서 자신의 얼굴을 맞힌 물체가 무엇인지 보았다.
‘만두?’
그는 벌떡 일어나며 주위 탁자를 빠르게 살폈다.
창가에 앉은 사내의 식탁 위에 만두가 놓여 있었다.
“죽고 싶으……!”
핏.
위지양은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젓가락이 그의 눈앞에 다가온 뒤 공중에 멈췄다.
“정확히 열 번을 세겠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한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
타앗.
위지양은 순식간에 객잔에서 사라졌다.
청년은 일어난 뒤 그녀의 자리로 다가섰다.
“고마워요.”
“당신, 명부에서 나온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요?”
“난 극일가에서 나왔으니까.”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라도 상대에게 출수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명부에서 나온 이유는?”
“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이것도 죄가 되나요?”
“……지상에서 딴 짓만 하지 않는다면.”
“그래요? 그러면 당신은 왜 나왔는데?”
“결혼할 여인을 찾기 위해 나왔다.”
“…….”
청년과 여인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를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