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비령 소속 인물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나경입니다.”
“들어오게.”
사내는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숙이고는 가주 고도유를 향해 전서를 내밀었다.
“전서가 급히 도착했습니다.”
“어디서 온 것이오?”
“서쪽의 끝에서 도착했습니다.”
“줘보시오.”
고도유는 전서를 받은 뒤 바로 펼쳐보았다.
‘서쪽의 끝이라면…….’
고도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그는 고진유와 고묵에게 전서를 내밀면서 대략 내용을 알려주었다.
“마교가 그들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
두 사람도 고묵과 전서의 내용을 읽었다.
“이런…… 명괴 이십 명으로 마교를 거의 전멸을 시켰다라…… 대단하군.”
“그들도 대단하지만 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훗. 명부 놈들이 마교를 만만하게 본 것 같군. 중원 전체와 싸우는 그들이거늘.”
“게다가 마교주인 천마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인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고진유는 천마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명부의 명군이 아니고서는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저어…….”
비령 나경의 표정은 고진유를 보며 머뭇거렸다.
“비령께서 본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나 보군요.”
“천마가 은룡투인께 직접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천마가 본인에게? 그가 무엇을 말했습니까?”
“명부와 싸우는 데 그도 함께하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천마가 직접 부탁할 정도라면 상당히 열받은 모양이네요.”
고묵도 같은 생각이었다.
웬만큼 억울하지 않다면 쉽게 부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천마 성격상 할 수 없을 텐데. 조카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우리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다. 우린 조카의 명을 따를 뿐이지.”
고진유는 곁에 선 나경을 보며 말했다.
“천마에게 가서 알겠다고 전해주세요. 함께 오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사라졌다.
고도유는 전서를 한 번 더 읽어보다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명부에서 굳이 마교를 칠 필요가 있었을까요?”
“도유 형님, 그건 제가 압니다. 명부의 입장에서, 그들은 마교가 배신을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계속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입니다.”
“명부라 해서 다를 줄 알았는데. 생각하는 것은 일반 사람이나 다르지 않군.”
“그게 바로 탐욕이지 않겠습니까. 천상이나 명부나……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조카의 말처럼 탐욕은 세상의 구별이 없는 유일한 악이라 할 수 있겠지.”
“제가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고진유의 목소리는 진지하게 변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제 생각입니다. 두 분께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명부의 일이 끝난다면 극일가 또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듯합니다.”
“…….”
“…….”
고묵과 고도유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카, 극일가가 사라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구나.”
“정확한 표현은 극일가가 세상에 나오자는 것입니다. 고촌에서 우리끼리 따로 지내는 게 아니라 세상에 함께 나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물론 도유 형님께서는 극일가의 명맥을 유지해야겠지요.”
“음…… 여기를 버리자는 것인가?”
“이곳을 버리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도유, 넌 어떠하냐?”
그는 가주인 고도유를 보았다.
끝내는 가문의 가주가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저도 진유 아우의 생각이 맞는 듯합니다. 명부가 사라진다면 본 가의 존재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전대 가주님께서 고민했던 문제이지 않습니까. 본 가의 힘은 너무 강합니다. 언젠가는 세상에 큰 위험을 줄 게 분명합니다.”
“그렇군. 본 가에 의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없겠지. 우선 우리의 생각을 서로 알았으니 자세한 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숙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들은 극일가의 방향에 대해서 차후 의논하기로 결정 내렸다.
지금 극일가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명부와의 전쟁이었다.
세 사람은 무림맹에서 연락이 오면 바로 움직일 준비를 하기로 했다.
명부와 싸우기 전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신무신단의 제조.
고진유는 가주전을 나선 뒤 곧장 신무신단을 만드는 의의원(醫依院)으로 향했다.
* * *
‘음…….’
언종은 신무신단의 제조법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형산파에서 만들었던 제조법과는 비슷하지만 달랐다.
철갑에서 얻은 완전한 신무신단의 제조법을 자세히 보면서 차이를 찾아내었다.
‘그렇군. 여기 이 부분에서는 황조삼에서 양의 차이가 났구나.’
생각지도 못한 약재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하수오도 새롭게 추가가 되었어. 이것이라면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흑망균의 독성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겠군.’
제조서에 따른 신무신단의 제조법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언종은 고개를 들어 마주 앉은 인물을 보며 물었다.
“신의자 어르신, 어떠하십니까? 신무신단의 제조법은 완벽하다고 보여집니다.”
“자네가 신무신단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으니 보는 눈이 맞겠지. 나도 제조법에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보지만 실제로 복용해 보지 않고서는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제일 좋은 방법은 제조법에 적혀 있는 그대로 만든 뒤 직접 확인하는 것이네.”
“네에.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내일 정도이면 신무신단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내일 알 수 있겠군. 혹시 기대가 된다고 하면 이상한가?”
극일가로 온 언종은 곧바로 신무신단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준비를 하던 중 무림맹에서 신의자가 합류를 했다.
그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신무신단의 중독성을 치료하는 해독제를 만든 인물이었다.
그들은 서로 반대의 편에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신무신단의 제조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그리고 고진유가 원한 대로 신무신단의 제조법이 완벽한지 아닌지는 우선 그대로 만들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극일가에는 필요한 약재들과 각종의 약초들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서 구하기도 힘든 만년설삼이 한쪽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의 제왕이라 불린 천년칠각사(千年七角蛇)의 독뿔도 옥병에 서너 개나 들어 있었다.
“무림맹도 귀한 약재들이 많지만 극일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군.”
주국은 많은 약재를 보면서 감탄이 나왔다.
툭.
언종은 불을 피운 뒤 솥 안으로 필요한 양의 재료들을 넣기 시작했다.
수많은 신무신단을 만들면서 재료를 넣어야 하는 완벽한 시각을 알아냈다.
‘지금이다.’
황조삼을 두 푼 정도 갈아서 환단의 진액에 넣었다.
부글부글.
진액 속에 넣은 재료들이 함께 녹으면서 끓어올랐다.
모든 약재들이 완전히 녹기까지 이각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어르신 솥 안에서 완전히 녹으면 일차로 부분 완성이 됩니다.”
“그렇군. 기다려야 하는군.”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솥을 보았다.
언종은 멍하니 솥 아래 활활 타오르는 불을 한참 보았다.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극일천무신궁이나 일월가, 그리고 명부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세상을 멸하기 위해서.
근데…….
그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굳이 왜…… 신무신단을 만들어 목숨까지 바치면서 명부와 싸우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종의 궁금증에 신의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금제일인에게는 측은지심이 있다네.”
그의 생각이 고진유의 뜻과 맞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고진유가 행한 행동들을 보면서 어떠한 마음을 지녔는지 잘 알았다.
“측은지심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신의자 주국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측은지심이 무슨 말인지 안다.
하나 언종은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은 듯했다.
그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네.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행복한 사람이 있고 오로지 자신만의 것에만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있지. 많은 사람들 중 특이하게도 남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네. 불쌍한 사람을 보며 가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측은지심이라고 하지.”
“고금제일인이 그러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그뿐만 아니야. 여기 모인 사람들도 마음속에는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다네. 자네도 마찬가지라네.”
“…….”
언종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의로 온 게 아니었다.
고진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 왔다고 할 수 있었다.
“전…….”
“자네 사정은 알고 있다네. 하지만 지금 자네를 보게. 신무신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
“만일 그런 마음이 없다면 열심히 한다고 해서 진심이 보이지는 않네.”
언종은 그의 말을 되새겼다.
극일가에 온 뒤 죽음의 협박을 받아서 신무신단을 만드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예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세상은 자네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네. 그것 또한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 있지. 어려울 건 없어. 자네가 최선을 다해 신무신단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원인들을 위한 측은지심이 있기 때문이라네.”
“아…… 아…….”
언종은 주국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의 말씀을 잘 알겠습니다. 늘 가슴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자네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되었다네.”
주국은 분위기가 달라진 언종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드드드-
그때, 의의원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고진유가 안으로 들어섰다.
신무신단의 약향이 의의원 전체에 가득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고금제일인께서 오셨구려.”
“신의자께서는 신무신단을 만드는 데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아직은 없소이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하시지요.”
고진유는 돌아서며 언종과 마주섰다.
불편한지 시선을 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지낼 만합니까?”
“너, 너무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신무신단 제조에 열심히라더군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경험자가 있으니 우린 운이 좋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좋지요.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소이다.”
고진유는 제조 현장을 둘러보았다. 며칠 동안 신무신단을 제조할 준비를 하느라 많이 바빴다고 했다.
“오늘 시작한 모양이군요.”
“우선 시험 삼아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언제쯤 신무신단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내일쯤이면 시제품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빨리 나오네요. 내일 완성이 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국은 궁금한 게 있었다.
그들이 신무신단을 제대로 성공했는지 어떻게 확인을 하느냐였다.
“우리가 신무신단을 만든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외다. 완전한지 알기 위해서는 신무신단을 복용한 뒤 몸에 이상이 없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건 본인이 복용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금제일인께서…… 위험하지 않겠소이까?”
“위험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잘못된다고 해도 신의자께서 이미 해독제를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신무신단이 잘못되었다면 복용하는 순간 몸속에서 바로 지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야…… 문제가 없겠지요. 알겠소이다. 만드는 즉시 연락을 드리겠소이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진유는 그들이 신무신단을 만드는 과정을 좀 더 지켜본 뒤 의의원을 나섰다.
* * *
천명전으로 모인 일행의 주된 관심은 신강에서 들려온 소식이었다.
장두총의 목소리에는 감탄이 섞여 있었다.
“두 곳 다 대단하네. 이십 명으로 마교를 거의 멸문에 밀어붙인 명부나 그들 모두를 죽인 마교나…….”
“그러게 말입니다. 곤륜파는 열 명을 상대로 한 명도 죽이지 못한 채 멸문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마교는 명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명괴와 싸우는 과정에서 천마는 한쪽 팔을 잃었다고 들었다.
“인양아, 천마와 붙은 놈이 명화공이라고 했지?”
“네. 진유 형이 말하길 팔천명부 수장인 명군의 바로 밑, 열 명의 명화공 중 한 명이라 했습니다.”
“명화공이라…… 그런 놈이 아직 아홉 명이 더 있다는 것이군. 앞으로 이놈을 상대할 때 모두 조심하세요.”
“그렇게 하지.”
무혼신녀는 팔짱을 낀 채로 대답했다.
그녀는 마교와 명부의 싸움에 대해 듣자 다행이라 여겼다.
“천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잘된 일이다. 명부의 무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었잖아.”
“맞습니다. 화유 누님의 말씀처럼 마교에서 제법 잘 싸워준 덕분에 상대의 능력을 알게 되어 앞으로 싸우는 데 상대하기 편해진 듯합니다.”
그녀의 말을 바로 이어서 말한 이는 혁자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무혼신녀를 편안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딱히 기분이 나빠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일행도 모른 체했다.
이제는 시선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