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군사 제갈양은 안으로 들어선 고진유와 인양을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했다.
“하핫! 고금제일인이 이렇게 친히 방문을 해주는군. 가문의 영광이구만. 어서 오시게.”
“오랜만입니다, 제갈 형님.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나야 늘 정주에 박혀 꼼짝도 못한 채 지내고 있지. 진유 아우는 어떠한가?”
“그럭저럭 살 만합니다.”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는 말이군.”
“그렇게 들리는 모양인가 보네요.”
제갈양은 오랜만에 만난 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눈 뒤 바로 뒤에 선 인양과도 인사를 했다.
“인양도 오랜만이네. 이러다가 얼굴 잊어버리겠다.”
“제갈 형님을 뵙습니다.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차피 이 녀석이야 무림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 신경을 안 쓴다고 하지만, 넌 앞으로 할 일이 많지 않으냐. 이 녀석만 따라다니지 말고 앞으로 독립할 생각도 해야 한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후후, 그렇지. 따로 갈 곳이 없으면 나에게 와도 되고.”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툭툭.
제갈양은 마음에 들었는지 인양의 등을 두드리고는, 먼저 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건넸다.
“자네가 올 때마다 겁은 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일단 듣기는 해야겠지. 두 사람 자리에 앉게.”
“고맙습니다.”
그들은 자리에 앉은 뒤 서로 마주 보았다.
제갈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곤륜파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군.”
“무림맹으로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상당히 시끄럽더군요.”
“그 짓을 한 놈들이 명부에 있는 명족이라는 놈들이지?”
“정확히는 팔천명부에서 나온 놈들입니다.”
“저번에 명부에서 쉽게 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그때는 그게 맞았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인가?”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했습니다.”
“쯧. 아쉽군. 세상일은 대부분 늘 안 좋은 쪽으로 흐른다니깐.”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여하튼 많이 안 좋은 모양인가 보군. 하긴…… 네가 형산파에서 곧바로 무림맹에 올 정도라면.”
제갈양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진유가 말한 대로 명부에서 나왔다면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어떻게 안 좋아진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겠어?”
“그 전에, 신무신단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신무신단?”
제갈양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신무신단에 대해서는 모든 게 밝혀졌다고 생각했기에, 새로운 사실이라는 게 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우린 지금까지 그들이 신무신단을 복용하면 내력을 상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맞아, 그랬지. 근데 또 다른 게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몰랐던 진짜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신무신단이 가진 진짜 비밀?”
“명부의 명족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몸에 제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데 신무신단이 그들이 가진 제재를 없애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즉…… 신무신단을 복용하면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곤륜파에 쳐들어갈 수 있었던 게 그놈들이 신무신단을 복용해서였어.”
“네. 맞습니다.”
고진유는 제갈양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 설명을 자세히 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미쳤다고 했을 만큼 황당하게 들렸다.
“……진유 아우는 나를 찾아올 때마다 항상 놀라운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아. 이건 정말 심각한 일이기도 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괜히 부담스럽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흠…… 그들이 정말로 세상에 올라왔다면, 명부의 괴물들을 상대로 무림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과 붙지 말라고 한다면 도망 다닐 수야 있겠지만, 일반 백성들은 무림인들처럼 피할 수 없지 않나.”
제갈양의 말이 맞았다.
무림인들은 충분히 명괴들이 오는 사실을 알고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명괴들과 마주치는 즉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좋은 방법이…… 설마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은 아니지? 일단 극일가가 그들을 상대로 싸울 테고.”
“당연히 본 가에서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우리를 피해 다닌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군. 안 좋은 상황도 생각해 봐야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아?”
제갈양은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고진유를 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갈세가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제갈세가의 힘을? 아우도 알고 있겠지만 우린 그렇게 무공이 강한 편이 아니지 않은가?”
“제갈세가의 특별한 힘은 무공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원 무림에서 진법에 관해 제갈세가를 따라갈 수 있는 문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거야…… 맞는 말이지. 자랑은 아니지만 본 가만큼 진법에 능통한 문파나 가문은 중원에 없다고 봐야겠지.”
“맞습니다. 제갈세가가 중원 최고지요.”
고진유의 엄지를 치켜 올렸다.
“진유 아우, 보아하니 진법으로 명괴를 상대하고자 하는 것인가?”
“진법으로 그들을 막을 수 없겠습니까?”
“글쎄…… 시도해 보진 않았지만…… 힘들 것 같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혹시 본 가와 천검궁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예전에 그들이 중원에 도전했을 때 본 가와 그들이 부딪혔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린 천검궁을 막기 위해 가장 넓게 펼칠 수 있는 진법인 대팔괘기문진으로 상대했다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겠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단번에 뚫려 버렸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소용이 없었지.”
“이유가 있었습니까?”
“진법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었거든. 그들이 오는 모든 방향을 대팔괘기문진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무력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진법이 견디지 못한 것도 한 몫을 했어.”
“……아하…….”
고진유는 어떤 문제인지 바로 이해했다.
제갈양의 설명이 이어졌다.
“명괴를 상대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진법의 크기야. 근데 진법을 넓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 두 개의 진법을 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서로 이어져야 하는 힘의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같은 지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제갈양은 천검궁을 상대했던 과거를 근거로 제갈세가의 기문진법으로는 명부의 명괴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했다.
고진유는 그에게 한 권의 서책에 대해 물었다.
“……혹시 천지금쇄(天地擒鎖)진법을 아십니까?”
“그건…… 오래전에 실전(失傳)되었던 진법이잖아? 그것을 아우가 어떻게 알고 있지?”
천지금쇄진법.
진법을 자세히 공부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진법이었다.
원시무림 시절 구두(口頭)에 의해 전해져 온 하나밖에 없는 진법이며, 그 자체가 진법서이기도 했다.
천지금쇄진법의 가장 큰 위력은 진법을 펼치는 시전자의 수에 따라 얼마든지 연계하여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만의 시전자가 진법을 펼칠 수 있다면, 한 개의 지역성까지 포함시킬 정도의 넓은 지역을 가둘 수 있다고 전해진 진법서였다.
다만 아쉬운 건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본 가에 존재했던 진법서입니다. 오래전에 명족을 상대로 펼친 진법이라고 해서 관심 있게 본 적이 있었어요.”
“아…… 하, 그렇군. 아우가 정말로 천지금쇄진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지?”
제갈양의 눈동자가 빛났다. 지금까지 본 그의 얼굴 중에서 가장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혹시 그것을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외워두긴 했죠.”
“그것을 외웠다고? 지금 기억을 전부 하는 게 맞아?”
“제갈 형님, 전 고진유입니다. 혹시 잊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
제갈양은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아. 네가 누군지. 미안하다. 내가 너를 무시한 듯한 말을 했군.”
“괜찮습니다. 제가 옆에 없으니 자꾸 잊는 듯하네요.”
“그러게 자주 얼굴 좀 보여주면 좋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건 그렇고, 천지금쇄진법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제갈 형님께서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제갈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기 생각과 같다는 고진유의 대답이었다.
“세상에 나온 명귀들 전체를 가두어 놓겠다?”
“그렇습니다. 그놈들을 가두려면 현 단위 마을 전체의 면적이 필요할 겁니다.”
“현 정도의 넓이라…… 엄청 넓은데. 가능할까?”
“천지금쇄진법이라면 충분히 연계가될 겁니다. 제갈세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보고요.”
“……못할 것도 없겠지만…… 천지금쇄진법을 직접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대답은 못 하겠다.”
“만일 가능만 하다면, 어쩌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큰 공을 세우는 문파는 제갈세가가 될 것입니다.”
“…….”
제갈양은 잠시 묵묵히 가만히 있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문파라…….’
씨익.
그동안 무림맹의 군사라 하지만 일월가와 명부를 상대로 도움이 되지 않아 실망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명부와의 싸움에서 제갈세가의 힘이 필요하다고 고금제일인이 직접 부탁을 했다.
“정말로 그것이 가능하면 본 가에서 무조건 맡아서 하도록 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두어둘 테니까.”
“고맙습니다. 그놈들을 가두기만 하면 나머지는 본 가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뒷일은 극일가가 진법 안에 들어가 맡겠다는 것이군.”
“맞습니다. 하지만 본 가는 마무리를 지을 뿐이죠. 중요한 것은 중원의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막아내는 제갈세가입니다.”
“알겠다. 천지금쇄진법을 본 뒤 얼마의 인물이 필요할지 봐야겠어.”
“지금 바로 볼 수 있도록 그대로 베끼도록 하죠.”
스윽.
제갈양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진유에게 종이와 붓을 건네주었다.
“부탁해.”
“조금만 기다리세요.”
“우린 잠시 밖에 나가 있도록 하겠네.”
두 사람은 고진유가 집중을 하도록 밖으로 나갔다.
* * *
태상장로 제갈문은 어둠이 짙은 시간에 찾아온 고진유를 반갑게 맞이했다.
“허허, 어서 오시게. 고금제일인께서 어쩐 일로 왔는가?”
“어르신,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노부야 늘 한결같지. 그대는 여전히 얼굴이 좋아 보이네.”
“고맙습니다. 요즘 불편한 건 없으신지요?”
“괜찮네. 아이들이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으니.”
“그렇군요. 건강하셔서 다행이십니다.”
“이모님께서는 잘 계시는가?”
“그분도 늘 한결같으십니다.”
“허허허, 시간이 나면 한번 뵙고 싶은데…… 여전히 무림의 일은 바쁜 것 같네.”
“조만간 끝이 나지 않겠습니까. 세상 걱정은 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무림에 아무 일도 없는 것 같군. 무슨 일로 본인을 찾아왔는가?”
고진유가 인사차 들렀다면 혼자 왔을 것이었다.
군사까지 함께 온 건 분명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제갈문은 그가 무림맹에 찾아온 뒤 자신까지 만나러 온 것만으로, 쉽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인지했다.
이미 곤륜파의 일 또한 소문을 들은 상태.
어쩌면 세상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풍전등화에 놓여 있을지도 몰랐다.
“고금제일인께서 말했던 그들이 세상에 나타난 모양일세.”
“그런 듯합니다.”
“극일가에서 상대한다고 알고 있거늘. 그럼에도 무림맹에 온 이유는 많이 어렵기 때문인가?”
“극일가에서 그들만을 상대한다면 어렵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는 사이에 무림과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이지요. 곤륜파를 멸문시킨 그들의 수는 겨우 열 명의 명귀였습니다. 팔천명부의 전체가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허어…… 그렇구만.”
제갈문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에 온 이유는 그들과 싸우지 말고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고 알리기 위함인가?”
제갈문의 물음에 이번에는 제갈양이 대답했다.
“할아버님, 그게 아닙니다. 고금제일인은 그들을 진법으로 가두고자 합니다.”
“…….”
진법에 가둔다는 말에 제갈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열 명으로 곤륜파를 멸문시킬 정도의 힘이라면 제갈세가의 진법으로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일부만 진법에 가둔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명부에서 나온 명족 전체를 가두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개의 현 전체를 진법으로 가둘 수 있어야만 승산이 있는 일이었다.
스윽.
그때, 제갈양이 그의 앞으로 서너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제갈문은 함께 들어선 제갈양을 보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더냐?”
“할아버님,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가 가지고 온 천지금쇄진법입니다.”
“…….”
제갈문은 말이 없었다.
조용히 앞에 놓인 종이들을 살폈다.
그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말로만 듣던 천지금쇄진법.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전설상의 진법서.
특히 제갈세가의 인물이라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기문진법서가 눈앞에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제갈문은 몰랐다.
머릿속에 외우고자 해도 서너 번 외울 시간이 지날 정도였다.
스윽.
제갈문은 숨을 크게 내쉬며 아래로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