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경내의 광장 위에 나타난 청년.
형산파의 무인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본인은 고진유라고 하오.”
“고금제일인……!”
“고금제일인이다!”
웅성.
그들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무림인들이 고금제일인이라 부르며 중원인들이 무림은자라고 부르는 인물
고진유의 목소리가 형산파의 무인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본인이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지 않겠지요?”
경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고진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림맹이 모른다고 생각했소이까? 그대들의 수장인 좌극천, 그자가 극일천무신궁의 간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소이다. 아마 그대들도 알고 있는 자가 있을 것이며 몰랐다고 해도 어렴풋이 인지는 했을 것이오.”
“…….”
경내에 모인 형산파 무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본인은 형산파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했소이다. 하지만 형산파는 무림맹이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외다. 그랬다면 조용히 있어야 하건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소?”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본 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이다.”
“반 장로라고 하셨소이까? 정말로 몰랐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조사동에서 신무신단을 제조한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할 건 아니지요?”
‘결국…… 이런 일이…….’
그는 본 문에서 신무신단을 제조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다.
만일 좌극천에게 따지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았다.
자신이 그에게 죽는다면 좌극천에게 동조하지 않은 동료들마저 위험할 수 있었다.
‘무림에서 모르기를 바랐거늘.’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희망이었다.
언젠가는 무림에서 알게 될 일이었고,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터질 게 터졌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형산파의 멸문밖에 없었다.
“고 대협, 본 문을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본인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고진유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
반혁소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되묻는다는 것은 일말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만들었다.
“본 문은 고금제일인께서 어떻게 하든지 원망하지 않겠소이다.”
“형산파는 본인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이오?”
“맞소이다.”
고진유는 경내에 모든 형산파의 인물들에게도 재차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그대들은 반 장로께서 한 말을 들었을 것이오. 만일 다른 뜻이 있다면 나와서 본인에게 의견을 말하시오.”
“…….”
형산파의 무인들은 서로 눈치를 볼 뿐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고진유는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
강압적으로 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조르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렸다.
일각이 지나면서도 형산파의 무인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스윽.
고진유의 신형에서 흐르는 기운은 숨이 막힐 만큼 웅장하게 퍼져 나갔다.
“좋소이다. 본인을 따르겠다고 하니 이 시간 이후로 그대들의 목숨에 대해서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으면 하오.”
“…….”
고진유는 광장 아래로 내려서며 그들 앞에 가까이 섰다.
“우선 모두 제자리에 앉도록 하시오.”
“…….”
반혁소는 좌우를 한 번 살핀 후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서로 얼굴만 보던 형산파의 무인들도 제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넓은 경내에 서 있는 인물은 세 명 뿐.
고진유는 형산파의 무인들이 똑바로 들을 수 있도록 무혼신녀에게 부탁을 했다.
“누님, 지금부터 명에 따르지 않거나 앉은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는 인물이 있다면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죽여도 상관없나?”
“편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알겠다. 진유 아우의 말대로 하지.”
무혼신녀는 단번에 무형살기를 뿜어냈다.
묵경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난 무엇을 할까?”
“형은 내가 좌측으로 보내는 인물들이 딴짓을 못 하도록 맡아주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무혼신녀와 묵경은 고진유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지켜보았다.
“지금부터 한 명씩 본인 앞으로 나오시오. 엉뚱한 짓은 안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외다.”
고진유의 명에 가장 먼저 반혁소가가 앞으로 다가섰다.
“돌아서시오.”
“…….”
무엇을 할지 몰랐지만 그의 말대로 따랐다.
그는 뒤를 돌아서며 자신을 보는 형산파 무인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스윽.
고진유의 손이 다가온 뒤 등에 닿았다.
차가운 그의 기가 온몸에 스치며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하는 것이지?’
혹시나 몸에 제재를 가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옆으로 물러나시오.”
“…….”
이윽고 그는 등에서 손을 떼고 옆을 가리켰다.
“우측으로 가서 앉아 계시오.”
“……알겠습니다.”
반혁소는 우측의 빈 곳에 간 뒤 의아한 표정으로 앉았다.
“다음.”
이번에는 호천검 가웅이 일어난 뒤 앞으로 나섰다.
‘흠, 할 말이 많은 모양이군.’
그는 애써 참은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예전에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우리 오랜만이지요?”
“…….”
그는 대답이 없었다.
“돌아서시오.”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조용히 돌아서시오. 그대의 사부처럼 죽고 싶지 않다면.”
“…….”
지금까지 그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봐서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가웅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부님을 죽였소?”
“그렇게 되었소.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고진유는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보았다.
“이런…… 굳이 살피지 않아도 알겠군. 신무신단을 복용했군요.”
그의 눈동자에서 신무신단의 내기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슈우욱.
고진유의 일장이 그대로 가웅의 단전을 때렸다.
퍼어어억!
가웅의 단전에서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아아악……!”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굴렀다.
“형, 이자는 좌측입니다. 끌고 가세요. 만약 난동을 부린다면 조용히 만들면 됩니다.”
“알았다.”
묵경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고진유는 형산파의 무인들 중 신무신단을 복용한 인물을 찾아내고 있었다.
묵경은 바닥에 쓰러진 가웅을 끌고 간 뒤 옆으로 내던졌다.
“가웅,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다치기 싫으면.”
끄으응.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 단전이…….’
무인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단전이 완전히 부서졌다.
그는 쓰러진 채로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어이, 지금 누구를 노려보는 거지?”
“…….”
“그런 눈으로 한 번만 더 진유 아우를 쳐다본다면 어딘가 부러질 수 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묵경을 보았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이지?”
“몰라서 묻는 것인가?”
“…….”
“네놈은 신무신단을 복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텐데. 이제 네놈과 할 말이 없으니 조용해라. 안 그러면 죽을 때까지 말을 못 하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스윽.
가웅은 고개를 다시 반대로 돌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세상이 무너진 듯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진유는 신무신단을 복용한 형산파의 무인들을 계속해서 찾아냈다.
거의 절반 이상이었다.
게다가 복용한 인물들 중에는 형산파의 주요한 당주급의 인물들이 거의 속해 있었다.
반혁소는 단전이 부서진 채 쓰러진 그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았다.
‘하아…… 방법이 없구나.’
* * *
형산의 축융봉 아래로 해가 떨어질 무렵, 모든 게 끝이 났다.
고진유와 반혁소는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아니외다. 모든 게 본 문의 잘못이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고마운 건 본 문입니다. 명색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이것만으로도 대인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반혁소의 대답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도 형산파를 충분히 멸문시킬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중원 무림에 공식적으로 봉문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봉문이라…… 반 장로께서 편하실 대로 하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죽이고자 했다면 굳이 단전을 파괴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저들은 지옥혈림으로 보낼 것입니다.”
“…….”
“그곳에서 영원히 일을 하다가 죽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하…… 그렇군요.”
단전이 사라진 채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무인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 될 수 있었다.
“저들이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생활했던지라…….”
“반 장로께서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요. 저들이 반 장로를 동료라고 여길까요?”
“…….”
“아닐 겁니다. 저들에게 동료는 형산파가 아닌 극일천무신궁이나 일월가였습니다.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면 반 장로는 물론 나머지 인물들을 모두 죽였을 겁니다.”
반혁소는 그의 말에 가슴이 무거웠다.
“조만간에 지옥혈림에서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흑귀들에게 인수인계를 하기 전에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동안 잘 지키면 됩니다.”
“…….”
“본인이 혹시나 해서 말하는 것이외다. 만일 한 명이라도 사라진다면 여전히 내통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그 책임을 필히 형산파 전체에게 물을 것입니다. 일부러 어렵게 일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본인은 새로운 형산파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고진유의 강압적인 말에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분간 형산파의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곳이라도 봉문한 형산파를 공격한다면 본인과 척을 져야 할 것이라 공표하겠소이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본 문의 입장에서는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새로운 형산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혁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 * *
형양으로 빠르게 내려온 인양과 녹림야검은 신무신단을 처리하기 위해 곧장 형산표국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형산에 도착한 뒤 형산 표국에 대해 알아보았다.
한 시진이 지나자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휘익.
두 사람은 내력을 감추며 표국 안으로 들어섰다.
‘신무신단은 어디에 있을까.’
표행에 나설 물건들을 저장한 창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산표국에는 저장 창고가 세 개 있었다.
인양과 녹림야검은 세 개의 창고 중 한 곳을 유심히 살폈다.
[저곳인 것 같아.]
[맞는 것 같아요.]
[들어가서 확인을 해볼까?]
[진유 형이 신무신단이 확실하다면 먼저 처리해도 된다고 했어요.]
[그렇군. 그럼 물건부터 확인해보자.]
[네, 알겠어요.]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은 세 개의 창고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붉은 창고였다.
붉은 벽돌로 쌓여 있는 창고는 다른 곳보다 표사들의 경계가 삼엄했다.
휘리리리릭!
그들은 곧장 신법을 펼치며 창고를 향해 다가섰다.
표사들이 주위에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인양과 녹림야검의 기척을 알아내지 못했다.
스르르르.
두 사람은 어둠이 짙은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음…….’
창고 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환단의 냄새가 가득했다.
굳이 닫혀 있는 상자를 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았다.
“녹검 형, 이게 전부 신무신단이네요.”
“뭐 이리 많아?”
창고의 절반 이상이 신무신단을 가득 채운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들을 전부 불에 태워 버려야겠어요.”
“신무신단을 전부?”
인양의 생각으로는 외부로 유출되기 전에 없애는 게 좋을 듯했다.
“진유 형이 여기에 올 때까지 하루나 이틀이 걸릴 것 같아요. 괜히 기다렸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한꺼번에 정리하기 좋은 기회예요. 나중에 이것들이 밖으로 나가면 귀찮을 수도 있잖아요.”
“알았어. 나도 그게 좋을 것 같다.”
녹림야검은 인양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고진유의 곁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인양만큼 그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타악!
녹림야검이 허리에 찬 호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상자에 불을 붙였다.
“됐어. 잘 타네.”
“좀 더 지켜보고 있다가 나가도록 하죠.”
화르르르-
불은 점점 크게 번지면서 신무신단을 채운 상자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창고 안에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밖에서 알아차렸겠지?”
“이 정도면 쉽게 끌 수 없을 것 같네요.”
“나가자.”
휘이이익!
인양과 녹림야검의 모습이 창고 안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