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뚝. 뚝뚝.
허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심한 상처이기에 지혈을 하고자 했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가득한 날이었다.
‘젠장…… 죽기에는 너무 안 좋은 날이군.’
그가 옆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고자 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은룡…… 투인…… 강하군.”
“본도를 찾아온 당신의 용기는 가상했소. 하나 너무나 무모했소이다.”
“난…… 이길 줄…… 알았으니깐.”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면 자신을 가질 만한 실력이었소. 본도가 삼천명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소?”
“싸…… 움의 승패는…… 상대적이다.”
“맞는 말이지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소이다.”
“충고는 됐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지?”
“본도가 할 일은 하나. 당연히 일월가를 칠 것이외다.”
“그 의미…… 를 알고 있을…….텐데…….”
“잘 알고 있소. 명왕을 가두어놓았던 언약의 구속이 사라지겠지요.”
“그걸…… 잘 알면서도…… 일월가를 치겠다는…… 건가?”
“우리가 일월가를 치든 말든 어차피 명왕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잖소.”
“…….”
“명왕이 나오는 거라면 우리가 쳐들어가든 아니든 난 끝을 낼 것이오.”
“만일…… 그대가 진다면…… 어설픈 결정으로 이곳은 지옥이 될 텐데…….”
“내가 없는 마당에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소.”
“크크큿. 무림…… 은자라는 인물이…… 그런 말을 한 줄…… 중원인들이 알면…… 깜짝 놀라겠군.”
나상녹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웃음을 뱉었다.
짧은 만남에도 그가 어떤 성격인지 알았다.
“웃긴…… 녀석이군. 적이…… 아니었다면…… 재미있는 친우가 되었을지도…… 커어억.”
그는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이게 죽는 것이군. 별로 나쁘지도…… 않아.’
그동안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 궁금했었다.
투둑.
그의 목이 옆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하늘에서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고진유는 고개를 들어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비가 오네.”
* * *
쏴아아아아-
일각 전부터 하늘에서 폭우가 떨어졌다.
“크으…… 이런 날씨에는 따뜻한 술 한잔이 좋은데…….”
묵경은 의자에 기대어 폭우를 보며 술 생각이 났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술상 준비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일월가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상황.
전시 상태에서 수장의 허락 없이는 술을 함부로 마실 수 없었다.
“하늘을 보아하니 내일까지 계속 내릴 것 같네요. 간단하게 술 한잔할까요?”
벌떡.
묵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까? 내가 가져올게.”
“저도 함께 갔다 오겠습니다.”
녹림야검도 얼른 그를 따라나섰다.
고진유는 사라진 두 사람의 뒤를 보았다.
‘그러게.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인양아, 다른 사람들도 묵경 형처럼 술 생각이 나겠지?”
“그럴 겁니다.”
“우리만 마실 수 없으니 오늘 하루는 적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전해라.”
“넵. 알겠습니다.”
인양은 곧장 고진유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중간중간 환호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더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공자님, 들어가겠어요.”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안으로 들어선 북소연을 맞이했다.
그녀의 손에는 술상이 들려 있었다.
“묵경 오라버니가 둘이서 마시라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여기 앉으세요.”
고진유와 북소연은 나란히 앉았다.
쪼르르.
술잔 위로 따뜻한 온기가 올라왔다.
“묵경 오라버니의 말이 맞았어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은룡투인의 모습이 멋졌어요.”
“보았소이까? 근데 지금은 멋있지 않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 묵경 오라버니가 워낙 은룡투인에 대해 말을 많이 해서 꼭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보고 싶었다면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실례가 될 것 같아서요. 이젠 봤으니 됐어요.”
“후후후. 그렇군요.”
이번에는 고진유가 그녀의 잔에 술을 부었다.
“우리 둘이서는 오랜만에 마시는군요.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앞으로 좋은 시간이 많을 겁니다.”
“괜히 급하게 하지는 마세요. 우리에겐 시간은 많이 있어요.”
“알겠소이다.”
고진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부터 몸조심하세요.”
“…….”
“소저를 닮은 딸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전…… 공자님을 닮은 사내아이였으면 좋겠어요.”
북소연은 그동안 소하를 보면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것 때문인지 얼마 전에 그녀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일단은 항상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세요.”
“근데…… 저만…… 그래서 설미 동생에게 미안한 것 같아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일 큰형님이 먼저 아기를 낳아야지 않겠습니까?”
“고마워요.”
사실 혹시나 자신보다 그녀들이 먼저 아이를 가진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을 하긴 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임신을 한 덕분인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설미 동생 차례인가요?”
“…….”
“나중에 설미 동생에게 말을 해주면 좋아하겠네요.”
“하하하. 아. 네에…….”
그녀는 미소를 띠며 술병을 앞으로 건넸다.
“한 잔 더 드시겠어요?”
“소저는?”
“전 이제 됐어요. 조심해야 하잖아요.”
“그렇군요. 고맙소이다.”
고진유는 술잔을 들어 그녀의 술을 받았다.
“공자님께서 강한 줄 알지만 조심하셨으면 해요.”
“알겠소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돌아오도록 하겠어요. 당신과 우리 아이를 위해서…….”
고진유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술잔을 비웠다.
* * *
일월가.
수백 년 동안 항상 중원의 어둠에서 존재한 곳.
극일가가 명부를 견제했다면, 극일천은 일월가를 견제했다.
중원 무림은 극일천이 암중으로 장악한 것처럼 보였으나, 일월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막아선 것이었다.
일월가에서는 극일천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섯 명의 인물들을 간자로 보냈다.
결과적으로는 극일천이 사라졌기에 일월가의 계획은 성공했다.
토비천과 목비천은 당당하게 일월가에 복귀했다.
일월가주 일월신은 허리를 숙인 두 명의 인물을 보았다.
“부가주가 죽었소.”
“…….”
토비천은 미세하게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예상했었다.
삼천명군과 싸워 이긴 은룡투인을 일월가의 부가주가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신을 간단하게 이겼다고 해서 기대를 했건만. 역시 안 되는 건 기대를 안 하는 게 맞군. 그렇지 않은가?”
“가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소인도 같은 생각입니다.”
목비천과 토비천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대들이 잘 알고 있겠군. 은룡투인이 그렇게 강하오?”
“…….”
두 사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흠…… 본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강한 모양이군.”
“송구하옵니다.”
“미안할 건 없소. 그대들이 잘못한 게 없으니.”
“감사하옵니다.”
“부가주의 죽음이 일월가를 깨우고 있으니 어찌 보면 본 가에는 잘된 일이지.”
“…….”
역시 토비천이 생각한 것이 맞았다.
부가주의 죽음은 본인 스스로가 아닌 가주의 책임이었다.
“본인은 그동안 중원에서 일월가가 너무 몸을 움츠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두 분의 생각은 어떠한지 묻고 싶군.”
“가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목비천과 토비천은 그의 말에 반대의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하하하! 그렇소이까? 그렇다면 극일천도 없는 마당에 우리 본 가에서 중원에 나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지 않소?”
“소신들은 가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본인의 뜻을 따른다면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소이다. 두 분이 이번 일에 앞장을 서주면 좋겠소.”
일월신은 그들을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소신들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하하! 그대들이 바로 나서주니 기분이 좋군. 잠시 중원 밖에 나가서 몸을 푸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본인의 생각이 어떻소?”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회양 정도의 지역이면 괜찮지 않겠나?”
“회양에는 무림 문파가 없는 걸로 압니다.”
“무림 문파는 무슨. 그냥 회양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
가주가 원하는 것은 회양의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바로 향천이나…… 극일가를 치시는 게 아닙니까?”
“중원에 나서는데 한 번 정도는 연습 삼아 몸을 풀어야 할 게 아니오. 그동안 잠들어 있던 살성도 꺼내어야 하고. 우리 바로 밑에 있으니 서너 일 정도면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는 데 충분할 것 같소. 두 사람은 준비가 되는 대로 떠나시오.”
“…….”
“두 사람이 일월살들을 끌고 가서 그들에게 피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되살려 주면 좋겠군.”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즉시 바로 향천으로 향하지.”
“……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토비천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 *
밖으로 나온 토비천과 목비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가주전 아래 정문으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갈 뿐이었다.
거의 바닥에 내려설 때쯤, 토비천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자네의 얼굴을 보니 가주님의 명이 별로 내키지 않은 모양이군.”
“……모르겠네.”
“허허, 자네도 나처럼 바뀐 모양이네.”
목비천은 고개를 돌려 토비천을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우린 중원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군.”
“……맞네.”
두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미 그들의 마음속은 중원인이 되어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가주의 명대로 회양의 모든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
“난 못하네. 난…… 무림인이네.”
목비천은 일월가의 사람임을 부정했다. 그는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림과 상관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도문……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이네. 하지만 우리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주께서 그만두지 않을 걸세.”
“정후, 그렇다고 해서 가주의 명을 따르겠다는 것인가?”
“명을 따르겠지만 막아야지. 그에게 알리겠네.”
“그라면…… 은룡투인에게 알리겠다는 것인가?”
토비천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멀리 형주에 있네. 아무리 빨라도 하루 만에 연락을 보낼 수 없어.”
“자네는 내가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잊고 있는 모양이군.”
“아하…… 그렇군.”
목비천은 그의 특이한 능력이 있음을 기억했다.
“그것이라면…… 그가 만일 받아주기라도 한다면 내 뜻을 전할 수 있다네.”
“부탁하겠네.”
토비천과 목비천은 결심을 내린 듯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가주전의 정문을 나섰다.
* * *
우우우웅-
고진유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누군가 마치 방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함부로 문을 열어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느낌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리는 기를 느끼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조심스럽게…….’
고진유는 만일을 위해 주위를 내력으로 감싼 뒤 기를 받아들였다.
[본인은 토비천이라 하오.]
‘토비천?!’
[이건 본인의 생각만을 전할 뿐, 다급하게 그대에게 알리고자 함이오. 조만간 일월가에서 회양에 나갈 것이오.]
‘회양에는 문파가 없을 텐데.’
[그대가 아니면 이것을 막을 사람이 없소. 본인의 말을 들었다면 그들을 살려주시오.]
‘……이런. 그들을 모두 죽이려는 거야. 미친놈들.’
고진유는 망설이지 않았다.
함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일월가에서 굳이 이런 방법으로 함정을 팔 이유는 없었다.
일월가가 회양으로 나간다는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고진유는 곧바로 내일 일찍 회양으로 떠날 것이라 명을 내렸다.
폭우는 아침이 밝아지면서 다행히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형! 준비가 끝났어요.”
문밖에서 인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작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은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무의를 입은 인양이 서 있었다.
“멋있는걸?”
“저도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나가자.”
“알겠습니다!”
인양은 앞장을 서며 광장으로 나섰다.
우우우우우우-
하늘을 뚫을 정도의 기세가 광장으로 가까이 다가서면서 느껴졌다.
향천의 인물들.
화산파 제자들까지 모두 도의를 벗어 던지고 은빛 무의로 통일했다.
그들의 복장은 하늘에서 내려온 무장들과 같았다.
고진유는 앞으로 나섰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 향하는 것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본인이 여러분께 아뢰오! 고대로부터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무리가 있었소. 그들은 늘 세상을 삼키고자 항상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세웠소이다. 우리의 선조께서 그들과 맞서 두 번이나 물리쳤소. 이제 또다시 악의 무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자 하니, 이번에는 우리가 그들을 막고자 나서게 됐음이오.
하나 여러분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은 또다시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니. 세상은 언제나 우리의 땅이었고 우리의 세상이었소. 그들이 더는 우리의 것을 넘보지 못하도록 여러분들과 본인이 나서고자 하는 바이오.
본인이 여러분의 앞에서 적을 모두 벨 것이니 따라오면 될 것이오.
본인 향천주는 그대들과 함께 그들을 몰아낼 것이오!”
고진유는 사의검을 든 손을 번쩍 들었다.
앞에 모인 수많은 향천의 인물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향천 만세!!”
그들의 함성은 형주를 떠나 중원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