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338화 (338/425)

338화

반시진이 지났다.

금비천을 태운 배는 악양루 앞에 섰다.

나하중은 동정호의 호숫가에 내려 악양루로 천천히 올라섰다.

하늘로 날아 올라갈 듯한 처마의 끝이 보였다.

‘저기 있군.’

동정호를 내려다보는 청년.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매화도의를 보아 만나고자 한 고진유가 분명했다.

스윽.

자신의 기척을 느꼈는지 돌아선 청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맞군.’

나하중은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포권을 했다.

“화산도협.”

“금비천이라 부르면 되오?”

“편할 대로 부르시오.”

“혼자 온 게 아니외다.”

나하중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네.”

“알고 있소이다. 그들이 몰래 따라왔겠지요.”

“…….”

고진유의 얼굴은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여하튼 미안하게 되었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외다.”

“그들이 오기 전에, 본도를 만나고자 한 이유나 들어봅시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고 하면 될지 모르겠군.”

“하긴. 본도라도 사는 게 재미없었겠소이다. 날마다 본도에게 깨지는데 살맛이 있는 게 이상한 게 아니오?”

“후훗. 맞네.”

나하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서 본도를 만나면 다시 삶의 흥미를 느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구려.”

“그렇네. 그래서 만나고자 했던 것이지.”

“본도를 보니 어떻소이까?”

“모르겠네. 당장 변화를 느낀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군요.”

고진유와 나하중은 잠시 서로를 볼 뿐 말이 없었다.

몰래 따라온 목비천이 신경 쓰였다.

“그만 돌아가게.”

“본도의 걱정을 하는 것이오?”

“걱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미안해서 하는 말이네.”

“특별히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소이다. 이해합니다.”

“지금 오는 인물들은 비천에서 온 게 아니네.”

씨익.

고진유는 그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본도가 원하는 곳에서 나왔군요.”

“……그대가 원하는 곳?”

“저기 밑에 있는 그들은 일월가에서 나온 인물들이겠지요.”

“…….”

나하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똑바로 알고 있다면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오히려 일월가의 인물이라 더 좋아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이 나왔군요. 언제 나올지 몰랐는데 이제야 나오다니…… 본도가 여기에서 기다리면 되겠소이까? 일월가에 대해 말만 들었을 뿐,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

그는 전혀 떨고 있지 않았다.

‘허어…… 이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현 상황은 분명 그에게 불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무엇인가를 믿고 있는 게 확실한 듯했다.

“화산도협, 두렵지 않은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일월가에서 나왔다고 했네. 당연히 혼자라면 두려워야 하는 게 맞지 않겠나?”

“본도가 혼자 있다고 해서 일월가를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시오?”

“…….”

고진유의 표정에는 여전히 두려움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천하제일인이라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자만심이었다.

“난 분명 그대에게 물러가라 했소.”

“맞소. 본도가 안 간 것이외다.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되오. 그만 가보시지요.”

“……부디 오늘 살아서 여기를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네. 다음에는 본인이 필히 그대의 자존심을 꺾어줘야 하니까.”

“후후후. 다시 싸울 의지가 불타오르는 모양이구려. 오늘 우리의 만남이 잘 된 것 같소이다.”

“…….”

나하중은 더는 상관없이 돌아섰다.

그러고는 왔던 길 그대로 악양루를 내려갔다.

목비천과 일월가의 무리들이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나하중을 보며 목비천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를 잘 끝냈는가?”

“…….”

“함께 싸우지 않겠나?”

“나와 몫을 나누고 싶은가?”

“그건 아니지. 그냥 해본 말이었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게나. 빨리 마무리를 짓고 오겠네.”

“…….”

나하중은 걸음을 멈춘 뒤 악양루로 올라가는 그와 일월가의 무리들을 보았다.

일월가에서 나온 인물들.

나하중도 처음 보았다.

그들이 얼마나 강할지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

그들의 무공 수준이 어떠한지 궁금하긴 했다.

‘……명왕괴수인보다 저들의 무력이 높은 것 같군. 역시 일월가의 인물들이다.’

일백 명의 그들이 보여준 내력의 기는 금비천의 일천 명이 뿜어내는 무력보다 높아 보였다.

‘저 정도의 무력이라면 그를 잡을 수 있을지도…….’

그때였다.

멀리 동정호에서 다가오는 기를 느낄 수 있었다.

‘뭐지?’

나하중은 동정호를 자세히 보았다.

거대한 흑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지옥혈림 소속의 흑선이 분명했다.

“허어…….”

나하중은 어이가 없었다.

고진유도 동정호에 혼자 온 게 아니었다.

흑선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의 수하들이 함께 왔다는 뜻이었다.

“나를 믿지 못한 게 아니라 비천을 믿지 못한 것이로군. 후후후.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야.”

나하중은 그에 대해 진심으로 탄복했다.

흑선이 나타난 것을 본 목비천의 당황하는 얼굴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엉뚱한 녀석이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고 할까?”

그동안 자신이 당했던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구경이나 해볼까?’

* * *

목비천은 일월가의 무리들과 고진유를 잡기 위해 악양루에 올라섰다.

‘저놈이…….’

예상과는 달리 악양루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동정호가 바로 연결된 아래로 가는 모습.

‘훗, 도망가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동정호로 내려가는 고진유를 보며 비웃음이 나왔다.

‘멍청한 놈.’

악양루를 내려간다고 해서 도망갈 길은 없었다. 넓은 동정호로 들어가지 않은 이상 말이다.

천천히 그를 따라 내려가고자 할 때였다.

“……!”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동정호에 흑선이 서 있었다.

그리고 흑선의 갑판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당장에라도 아래로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흑선이라면…… 지옥혈림의 배이거늘…….’

목비천은 당황했다.

그때, 악양루 아래로 내려가던 고진유가 돌아서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요?”

“…….”

“혹시 본도를 만나고자 온 분들이오?”

목비천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금비천이 홀로 나섰다면 상대도 혼자 나왔을 확률이 높다고 여겼다.

“비천에서 오셨소?”

“…….”

“저기 금비천과는 방금 헤어졌소이다. 오는 도중에 만났을 텐데…… 혹시 본도에게 따로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난 돌아가는 길인데.”

‘저…… 새끼가…….’

목비천은 짜증이 밀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 놀리는 게 맞았다.

당장 뛰어 내려가서 방정맞을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금비천, 그는 분명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혹시 몰래 기습하려고 따라온 것이오?”

“…….”

“대답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군. 목비천이 비천 중 가장 야비한 인물이라고 하더니…….”

“이노오오오옴!!”

목비천은 고함을 내질렀다.

속물로 만드는 그의 말에 노기가 솟아났다.

“이런…… 화를 내는 것을 보니 그래도 부끄러운 모양이군요. 하긴 사람이라면 현 상황이 떳떳하지는 않지요.”

“화산…… 도협. 오늘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혹시 그건 당신 생각이오?”

고진유는 그의 뒤에 선 인물들을 보았다.

지금까지 만났던 비천의 인물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강시나 죽은 자들은 아니었다.

살기가 아닌 사기(死氣)가 온몸을 지배하는 인물.

세상에 그런 인물은 일월가밖에 없었다.

“당신 생각이 아니라면 본도를 죽인다고 하면 안 되지요. 후후후. 아 참, 그리고 당신 뒤에 그들을 보니 일월가에서 나온 모양인데, 겨우 그 정도로 본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목비천은 시선을 돌려 일월가의 무리들을 보았다.

그 또한 이들과 싸운다면 이길 수 없었다.

“당신은 본도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극일가의 인물이외다.”

“…….”

“극일가의 수장을 겨우 일월가 백 명 정도로 죽일 수 있다고 여겼소?”

목비천은 흠칫거렸다.

순간 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용맥의 기를 받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겨우 백 명의 일월가에 의해 죽을 정도면, 일월가는 극일가에 당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화산도협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만 했어. 백 명이면 될 줄…… 알고…….’

“당신 바보 아니오? 일월가 백 명으로 극일가의 가주를 잡을 수 있다면 왜 수백 년 동안 숨어 있었소? 그냥 붙어 싸우면 될 것을. 머리는 장식이 아니외다.”

“…….”

목비천은 완전히 놀림을 당했다.

타아앗!

일월가의 무리들이 동시에 움직이며 고진유가 내려간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이런…….”

고진유는 그들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본도 앞에 나타난 것이오?”

“화산도협, 당신이…… 용맥투기를 타고 난 것을 본 적이 없다.”

슈우우우우욱-

사내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고진유의 전신에서 그들이 보고 싶지 않은 기운이 솟구쳤다.

“혹시 이것을 말하는 것이오?”

고진유의 전신을 휘도는 투룡을 모습.

‘젠…… 장…….’

사내는 당황한 듯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스르릉.

고진유는 사의검을 뽑으며 물러난 사내를 향해 피식 웃었다.

“용소살심(龍笑殺心)이라고 들어봤는가? 본인을 무시하는 건 죽음이지.”

사내는 순간 몸이 굳어졌다.

번쩍!

고진유의 사의검에서 섬광이 폭발했다.

일월가의 무리들은 빛을 보는 순간 눈앞에서 붉은색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을 알았다.

“커어어억……!!”

털썩.

사내는 몸이 잘려 나가며 바닥에 쓰러졌다.

“분명 말하지만 본도에게 잘난 체하면 먼저 죽소이다.”

꿀꺽.

생기조차 보이지 않는 그들의 신형들이 꿈틀거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일월가의 무리들은 싸우다 죽으면 되는 일이었다.

죽은 뒤 명왕의 권세로 명족으로 태어나면 된다고 여겼으니까.

다만 명왕의 세상이 되지 않은 이상 세상으로 올라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극일가의 무인.

문제는 극일가의 무공에 의해 죽는다면 명왕이 권세가 있다고 한들 영원히 새롭게 태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극일가의 무공에는 절대 무(無)로 만드는 용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일월가의 무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명왕의 권세로도 다시 태어날 수 없으며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묵비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는 일월가의 무리들을 보면서 실수했음을 알았다.

“허허…… 이보게, 목비천.”

“……!!”

언제 다가왔는지 그의 뒤로 금비천이 다가서 있었다.

“계획은 좋았네.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는 법이지. 안 그런가?”

“금…… 비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가? 난 그와 싸우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지. 이기지 못하면 차라리 가만히 있자. 괜히 힘을 들일 필요가 없더군.”

“…….”

“잘해보시게나. 난 구경이나 하겠네.”

금비천은 뒤로 물러났다.

정말로 나서지 않고 싸움 구경을 하기라도 하듯 물러나는 그였다.

“금비천, 함께 싸우지 않고 뭐 하는 짓이오?!”

“목비천, 지금 저기 흑선을 보면서도 여전히 싸울 생각이오? 난 자신 없소이다. 도망을 가든 싸우든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방금 나에게 내려가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

목비천은 그의 말대로 흑선을 보았다. 당장에라도 갑판에서 내려올 것만 같았다.

‘쳇……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고진유는 손을 번쩍 들었다.

흑선 위에서는 갑판 위에 있던 세 사람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려섰다.

묵경이 고진유의 앞으로 나아갔다.

“혼자서 끝내는 줄 알고 섭섭했다.”

“이런 잔챙이들은 형님이 맡아서 처리해야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향천주는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 일월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드디어 만나보는구만.”

묵경은 앞으로 나서며 일월가의 무리들을 살폈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종족들.

늘 호기심이 가득했던 일월가의 존재이었다.

“향천주의 말처럼 사람 같은데 사람 같지 않군. 특이한 인간들이야.”

“묵경 형, 그런 것 같아요. 재미있겠어요.”

인양도 신기한 듯 그들을 자세히 살폈다.

뒤에서 고진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한 대로 마지막에는 극일가의 내력으로 저놈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시작할까?”

“나를 죽이려고 왔는데 한 놈도 살려줄 이유가 없습니다.”

“알겠다.”

묵경은 함께 나선 인양과 녹림야검을 보았다.

“누가 많이 베는지 내기다. 향천일대는 저놈들을 처리하라!”

타앗.

묵경의 말과 동시에 수십 명의 향천일대 수하들이 일월가의 무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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