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형주에서의 생활은 편안했다.
무림맹에서 보내는 생활과 달리 이곳에서 함께 지내는 이들은 가족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 일 없이 누워서 잠을 자도 누구 한 명 눈치 볼 필요 없었다.
세상 사는 데 가장 편안한 곳은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휙휙휙!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로 가득했다.
고진유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옆에 앉은 북소연을 보며 물었다.
“저기서 다들 뭐 하고 있소? 방금은 인양 같은데?”
“네. 인양 도련님이세요. 화산파 제자들과 신법을 수련하는 중인가 봐요. 지칠 때까지 계속 달리고 있네요.”
“무림에서 신법이라면 인양을 따라갈 만한 인물이 없지. 역시 내 동생이야. 잘하고 있군.”
“……그렇긴 하죠. 전부 수련을 한다고 고생들이 많네요.”
“좋은 일들이오. 열심히 수련하는 게 좋아.”
북소연은 물끄러미 눈을 감고 있는 고진유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공자님은 계속 쉬고 계시는 건가요?”
“소저가 보기에 이 몸이 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나도 열심히 수련 중이외다.”
“무슨…….”
“지금도 눈을 감은 채 수십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 수련을 하고 있었소이다.”
“코를 골면서요?”
“……그랬소?”
“그랬어요.”
“그건 못 들은 거로 하세요.”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죠.”
북소연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생각이 난 듯 다시 물었다.
“무림맹에서 굳이 이곳으로 올 필요는 없었죠?”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처럼 한다면 무림맹도 괜찮지 않았을까 해서요.”
스윽.
고진유는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켜 멀리 수련에 열중한 인물들을 가리켰다.
“무림맹에서는 저들이 따로 수련할 수 없잖아요. 저들만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
북소연은 그의 말을 인정했다.
스윽.
고진유는 고개를 돌려 정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흠, 지금쯤이면 돌아올 때가 되었을 텐데. 연락이 없나요?”
“누구 말이에요?”
“누님하고 호중 사형요.”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두 분이 제대로 사귈 수 있을까요?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잖아요.”
“남녀가 좋아하는데 무슨 나이가 문제가 되겠소이까? 그리고 누님은 백 년 동안 동면을 했기에 실제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아요. 충분히 조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흐음. 두 분이 사귀면 재미있긴 하겠어요.”
“후후후. 이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더니…… 도착했네요.”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정문에 도착한 그들의 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고진유의 말처럼 무혼신녀와 혁자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지만, 표정이 뭔가 알 수 없는 듯 애매하게 보였다.
고진유가 먼저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누님, 돌아오셨습니까?”
“둘이서만 여기에 뭐 하느냐? 노는 거야?”
“수련 중입니다. 소연 소저는 저를 열심히 내조하고 있습니다.”
무혼신녀는 주위를 살폈다. 바닥 전체에 온기가 느껴졌다.
“꽤 누워 있었던 모양인데?”
“반각 정도 누워 있었습니다.”
“정문에서 들어오는데 거의 모두가 죽을 둥 살 둥 수련하고 있더군.”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열심히 수련해야지요.”
“넌?”
“저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누워서?”
“제 정도의 무공이라면 생각만으로도 최상의 수련을 하는 것이지요.”
“……그건 맞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그녀는 인정했다.
북소연은 그가 한 말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아직 그녀와 그가 말하는 수준의 무공에 이르지 못했기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다.
“언니, 정말로 생각만으로도 수련이 가능한가요?”
“뭐, 진유 정도라면 가능하지. 이미 몸은 한계를 넘어선 상태이니. 정신이 몸을 어느 정도 좌우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진유는 예전에 이미 탈신의 경지를 넘어섰어.”
“……가능하구나. 대단하네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란다.”
고진유의 앞에 두 사람이 앉았다.
무구천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어떻게, 잘 다녀오셨어요?”
“네 예상대로 나오더구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고진유는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그녀에게 사전에 말했었다.
“그들이 욕심을 부릴 줄은 몰랐다. 난 당연히 모든 것을 정리할 줄 알았거든.”
“첫 느낌이 안 좋으면 역시 끝까지 좋지 않네요.”
고진유는 그들과 처음 만난 그날을 생각했다. 극일천을 상대한다는 그들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었다.
“네가 부탁한 대로 전부 마무리를 짓고 왔다.”
“소림사에도 들렀다 왔습니까?”
“그래. 오는 길에 그를 만났지. 그도 죄송하다면서 스스로 무공을 폐했다.”
“그럴까지는 없는데…… 여하튼 수고하셨습니다. 무구천은 극일가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누님이 미안할 건 없습니다. 잘못은 그들이 한 게 아닙니까?”
“같은 오무천자의 일인으로서 책임을 느끼는 것이지.”
“누님은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아 참……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적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잘하셨습니다. 먼 곳에 갔다 오시느라 수고했는데 조금이라도 쉬세요.”
“알겠다.”
무혼신녀는 혁자영과 함께 일어나면서 그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예전이라면 그냥 돌아섰을 것이다.
고진유는 그녀의 모습을 정확히 보았다.
“사형, 축하해요. 이야기가 끝났군요.”
“……!”
혁자영에게 말한 것이었지만,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어어얼…… 말이냐?”
“크흠, 아시면서…… 나중에 봐요!”
“…….”
혁자영도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본 뒤 빠르게 걸어 나갔다.
두 남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북소연은 피식 웃었다.
“짓궂게 왜 그러세요.”
“혹시 했는데 진짜로 사귀는 모양인가 봅니다.”
북소연은 히죽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갑니까?”
“언니한테요. 먼저 가볼게요.”
“그렇게 하세요.”
그녀는 먼저 사라진 무혼신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 나갔다.
“후후후.”
고진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잘됐네. 누님도…… 사형도…….’
하늘은 구름 한 점도 없을 정도로 푸르게 보였다.
‘죽을 때까지 세상이 조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다다닥!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문에서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군.’
발걸음의 주인은 정문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어딜 가나 나를 찾는 사람들이 있군. 인기남은 달라.”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난 고진유가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보았다.
“향천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남궁세가의 진남궁인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라고 하던가요?”
“신궁에서 왔다고 전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신궁이라면…… 수곡자일 경우가 있겠군.’
극일천무신궁의 인물이 찾아왔다는 건 의외의 일이었다.
이건 고진유로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보면 알겠지요. 여기로 안내를 하세요.”
“알겠습니다.”
수하는 돌아선 뒤 정문으로 향했다.
고진유는 그를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이럴 때에 나를 만나고자 한다고?’
수곡자가 왔다는 건 그가 모시는 인물이 보냈다는 뜻일 터.
‘금비천. 나하중…… 지금까지 많이 싸웠던 인물인데.’
그랬던 그가 항복하려는 건 아닐 것이었다.
수하가 정문으로 나간 지 반각도 지나기 전에 그의 뒤로 눈에 익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수곡자가 맞군.’
고진유는 가만히 자리에 앉은 채 앞에 멈춘 그를 맞이했다.
“맹주를 뵙소이다.”
“여기서는 맹주보다는 향천주라고 부르면 됩니다.”
“……향천이 맞소이까?”
“어떻소? 마음에 드시오?”
“좋은 이름이외다. 새로운 조직의 수장이 될 걸 감축드립니다.”
“뭐 새롭기보다는 무림맹에서 나온 것뿐이외다. 제대로 싸울 생각이라.”
수곡자는 멈칫했다.
나하중이 이야기했던 이유와 같을 것이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대가 직접 찾아오는 날이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향천주께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그대가? 아니면 그대가 모시는 주인이오?”
“제가 모시는 주인이십니다.”
“금비천 나하중이란 인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뵙고자 하십니다.”
“이유는 무엇이오?”
“그건…… 따로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음…… 내가 만나야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군.”
“…….”
고진유는 그를 만나는 일에 대해서 특별하게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수곡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지요. 못 볼 이유가 없을 것 같군요.”
“고맙습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은 본인이 정하는 게 맞지요?”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진유는 전음으로 그에게 알려주었다.
수곡자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포권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분께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수곡자가 지옥혈림을 나왔다.
‘다행이군.’
나하중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만일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만날 이유가 없었다.
고진유 또한 다른 사람들 모르게 만날 셈인 것 같았다.
‘나하중 님께 빨리 돌아가야겠군.’
수곡자의 신형이 형주에서 사라졌다.
스으윽-
수곡자의 신형이 사라진 후, 그 자리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옥혈림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곳에서 나왔다는 것은…… 서로 내통하지는 않았겠지만 금비천의 마음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겠군.’
수곡자를 말없이 그에게 보낸 것을 보면서 의심이 들었다.
‘잘하면 좋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군.’
인영의 입가에 살소가 나타났다.
* * *
끼이익-
동정호를 가로지르는 나룻배의 노 젓는 소리.
노인은 나룻배에 앉아 잔잔한 동정호의 수면을 보며 뱃놀이를 하는 듯 시간을 즐겼다.
아직 그와 만날 시간은 반시진이 남았다.
‘이것도 괜찮군.’
나하중은 일찍이 신궁에서 내려왔다.
수곡자가 그를 만나고 돌아온 뒤 장소를 날짜를 알려주었다.
보름 뒤 정오. 장소는 동정호의 악양루였다.
그는 한 시진 일찍 도착한 뒤 여유롭게 배를 타며 동정호를 구경하고 있었다.
다행히 뱃놀이를 하기에 날씨가 좋았다.
“크으, 좋구나.”
그는 미리 구한 술을 따른 뒤 한 모금 마셨다.
동정호에서의 술 한잔이라.
시성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듯했다.
“저어…….”
배를 젓는 사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혹시 저기 오시는 분들이 아는 분인가 해서 말입니다.”
“…….”
사공이 가리킨 방향에서 거대한 유람선이 나타났다.
“아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아…… 네에…….”
나하중은 품 안에서 금화를 하나 꺼낸 뒤 앉은 자리 옆에 내려놓았다.
“뱃삯이라네. 수고했네.”
“…….”
나하중은 다가오는 배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익!
그 자리에서 신형을 띄운 그가 다가오는 유람선으로 내려섰다.
“어허. 그대가 여기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이다.”
“섭섭하외다. 신궁에서 내려온 뒤 한가롭게 뱃놀이를 즐긴다고 미리 말을 하지 않았소이까?”
목비천의 눈가에는 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까지 그대에게 보고해야 하는지는 몰랐소이다.”
“…….”
나하중은 유람선에 탄 인물들을 보았다.
“또 이들은 누구인지? 처음 보는 인물들이군요.”
“일월가에서 보내왔소이다.”
“…….”
나하중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비천의 인물이 아닌 일월가의 인물들과 함께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들이 언제 나왔소이까?”
“며칠 됐소이다.”
“왜 말을 하지 않았소이까?”
“금비천께서도 말없이 혼자 그를 만나고자 하지 않았소이까?”
“…….”
목비천은 입가에 여전히 살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단번에 그를 죽일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본인이 배신을 했다고 보는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럼…… 이들과 함께 온 이유가 무엇이오?”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지요. 극일가의 가주가 나올 수 있는 기회이지 않소이까?”
“…….”
“금비천께서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고맙소이다.”
나하중은 당황스러웠다.
‘제대로 오해를 받겠군.’
비밀리에 만나고자 했던 게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그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심란했던 현재의 마음을 다시 새롭게 잡기 위해서였다.
그를 만나게 되면 흥미를 잃었던 자신에게 새로운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에서 언제 만나기로 했소이까?”
“…….”
“그가 걱정되는 것이오?”
“반시진 뒤에 악양루에서 만날 것이외다.”
“고맙소이다.”
목비천는 만족스러웠다.
극일가의 가주이자 무림맹주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동안 당했던 걸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 이제 세상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