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수비천인은 처음부터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패룡무군의 검들은 비정했다.
또한 무정했다.
그들이 죽이는 대상을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을 한 괴인으로 여겼다.
슈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수비천지의 공간을 메웠다.
“커어억!”
“어억.”
짧은 비명만이 바람 소리 뒤로 들릴 뿐이었다.
고도유는 패룡대검을 옆으로 내려놓은 채 제자리에 섰다.
앞에 다가선 노인.
수비천지의 주인 수비천이 노기를 드러내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맛보는 공포의 두려움이 몸을 지배했다.
“극일가에서…… 전쟁을 원하는 것이오?”
“허튼소리.”
고도유는 쌍각용투구를 천천히 벗었다.
상대는 너무나 젊었다.
겨우 이십 대 후반인 사내의 얼굴.
“수비천이란 인물이 현 상황을 모르는 척하니 불쌍하군.”
수비천의 눈이 커졌다.
‘화산도협도 아니거늘…….’
그가 아는 용맥의 전인은 한 명밖에 없거늘.
근데 분명 또 다른 젊은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내기는 용맥의 기가 틀림없었다.
“당신들이 잘 알고 있는 화산도협이자 무림맹주인 진유가 내 사촌 아우이지. 고로 나도 극일가의 사람이라는 것이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소?”
“…….”
“설마 용맥의 후계자가 하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소? 본 가는 독문계승의 가문이 아니외다. 물론 그렇다고 말한 적도 없거니와.”
“…….”
이런 어이없는 현실이라니.
수비천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극일가의 가주만이 용맥의 전인이라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가주만 잡아낸다면 남아 있는 극일가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극일천주만 잡아낸다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이었다.
“멍청하기는…… 당신의 얼굴을 보니 지금까지 극일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겠군. 극일천주께서 사내아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군. 극일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고도유의 말이 맞았다.
전대 가주를 마지막으로 용맥이 끊어지게 된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 여겼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극일천주에게 속았으며 극일가에는 또 다른 용맥을 이은 사내가 존재했다.
“후후, 우리가 속였다고 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지레짐작으로 허튼 짓거리를 한 것뿐이니. 멍청한 머리를 지닌 그대들의 탓이외다.”
스윽.
고도유는 다시 쌍각용투구를 얼굴에 썼다.
“그만 끝을 냅시다. 좋은 사실을 알려줬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지 않겠소?”
“보, 본좌를 얕보지 마라……!”
“이미 얕보였소이다.”
타아앗!
고도유는 패룡대검을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린 뒤 앞으로 내리쳤다.
슈우우우우욱-
패룡대검이 지나가는 자리 뒤로 대기가 비틀리며 잘려 나갔다.
수비천은 양손에 수비천기를 전력으로 끌어 올렸다.
“우우우욱.”
그는 앞으로 다가온 검강을 양손으로 막아내고자 뻗었다.
파아악!!
수비천의 눈앞에서 패룡의 푸른 눈빛이 번쩍이며 쏟아냈다.
그와 동시에 패룡의 거대한 입이 휘몰아치면서 그를 지나갔다.
“으으으으윽…….”
수비천의 양손이 잘려 나갔다.
덜덜덜.
손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백발을 묶어놓았던 문사건은 이미 녹은 뒤였고 그의 옷은 반 이상이 찢겨 휘날렸다.
‘이…… 것이…… 극일가의…… 힘이라는 것인…… 가?’
비천인 자신을 너무나 쉽게 죽인 그를 보면서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힘을 가지고도……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거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당신들이 있기 때문이니까. 음이 있어야 양이 존재하듯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
비천과 일월가의 존재 때문에 극일가 또한 세상에 존재한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수비천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 싸우고 싶어도 내력과 힘이 사라졌다.
고도유는 그의 앞에 서며 천천히 패룡대검을 들었다.
“오랜만에 있는 힘껏 무공을 펼쳤소이다. 당신이 끝까지 잘 싸워준 덕분이오.”
“…….”
고도유는 그의 머리 위에까지 올린 패룡대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번쩍.
순식간에 떨어진 패룡대검의 뒤로 사선으로 수비천의 몸이 갈라졌다.
수비천의 죽음.
그리고 수비천지의 멸살이 뒤를 이었다.
* * *
수비천과 화비천의 죽음으로 비천은 난리가 났다.
세 명의 비천인들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사실이었다.
토비천과 목비천, 그리고 마지막 금비천이 한자리에 모였다.
두 사람과 달리 금비천 나하중의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놀랄 일도 아닌 일로 화들짝거리는지 모르겠소이다.”
“금비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이게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오?”
“본인은 그동안 그 녀석에게 많이 당한 탓인지 익숙해서 한 말이외다.”
“허.”
목비천은 그를 보면서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금비천. 대책을 세워야지 않겠소이까?”
“대책이라…… 목비천이 원하는 대책이 무엇이오?”
“정말로 남의 일 보듯이 하겠다는 것이오?”
목비천은 화를 버럭 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두 곳에서 당한 게 당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나하중은 두 사람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본인이 그에게 당했을 때 남의 일 보듯이 한 분들이 아니오. 난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것이오?”
“…….”
목비천과 토비천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한동안 당하고 있을 때 도움을 주기보다 지켜만 본 게 사실이었다.
“크흠, 미안하오. 그때는 이렇게까지 일이 크게 일어날지 몰랐소이다.”
“됐소. 어차피 그때 나섰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깐.”
극일가를 상대로 비천의 조직만으로는 이기기에는 힘들었다.
나하중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좀 더 확인한 뒤에 움직여야 했었다.
일월가를 끌어내기 위한 극일가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이제 싸움은 무림과는 상관이 없소이다.”
“…….”
“극일가와 본 가의 싸움이지 않소이까? 그게 저들이 원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에 오시지요.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
“그들과 싸워 자신이 있다면 알아서 남아 있든지.”
목비천과 토비천도 할 수 없었다. 두 곳이 화비천과 수비천에 비해 월등히 강한 것은 아니었다.
“본 가에서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중원에 나오려면 무리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지 않소이까.”
“…….”
그들은 극일가와 일월가 사이에 일어난 두 번의 대전쟁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결과는 두 번 모두의 대참패.
한 번 남은 지상으로의 출격에 모든 것을 내걸어야 했다.
만일 이번 싸움도 패배로 돌아선다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것을 일월가도 알고 있었다.
신중에 신중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나하중은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젠장…… 그놈의 철갑 때문에…….’
* * *
갑자기 형주가 부산해졌다.
무림맹주와 함께 형주로 들어선 친협들.
화산파 제자들과 남궁세가의 무인이라고 하기에 명확하지 않은 무인들까지, 모두가 지옥혈림에 도착했다.
형주의 백성들은 대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온갖 여러 가지 추측들만이 형주는 물론 중원에 퍼져 나갈 뿐이었다.
지옥혈림 밖과는 달리 안은 소란스러울 만큼 떠들썩했다.
묵경과 인양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임시로 모였지만 마땅한 단체명은 있는 게 좋을 듯했다.
“음…… 좋은 이름이 없을까?”
“우리가 정한 게 뽑혀야 할 텐데. 그죠, 형?”
“맞다. 이건 영원히 무림사에 남을 이름인데 당연하지. 어디 한번 들으면 화악! 이끌리는 이름이 필요한데…….”
묵경은 최대한 머리를 돌리면서 여러 가지 이름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인양은 지나가는 듯 중얼거렸다.
“으으음…… 진유 형은 화산파를 사랑하잖아.”
“……!”
묵경은 머릿속에 번뜩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거 어차피 진유 아우가 정하는 거잖아! 크하하하! 내가 일등이다. 인양아! 가자!”
“어어, 넵!”
타앗!
묵경과 인양은 곧장 광장으로 달렸다.
퍼어어엉-
퍼어어엉-!!
광장에서는 화산파 제자들을 위해 고진유와 사형제들이 수련을 도와주고 있었다.
화산파 제자들의 실력은 분명 중원 무림에 비해 뛰어났지만 사형제들을 제외하고서는 한 단계 더 올라설 필요가 있었다.
휘익!
“진유 아우!”
고진유는 광장으로 나타난 묵경의 얼굴을 보았다.
“오호, 좋은 이름이 생각난 모양인가 본데요?”
“그러게 말이다.”
우종성은 잠시 수련을 멈추고 묵경과 인양을 보았다.
“읏차! 좋은 이름이 생각났어.”
“무엇입니까?”
“향천. 어때?”
고진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매화의 향기가 천하에 흐른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세상은 매화에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묵경의 말에 우종성도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사제, 괜찮은 것 같은데?”
“네! 저도 마음에 듭니다. 공식적으로 우리의 모임을 향천이라 정하지요. 하는 김에 복장도 모두 통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복장도? 도복으로?”
“전부 도사는 아니잖아요. 그들과의 싸움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 향천의 무인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하긴. 일체감이 들면 단결력은 더 좋아지겠지.”
고진유의 명으로 한자리에 모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서먹한 사이였다.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동일한 복장을 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이건 호경 사형이 두 분 사저와 맡아서 해주세요.”
“오냐.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
“오전 수련은 그만하고 식사나 하러 가죠.”
“좋아. 오늘 식사는 뭘까?”
장두총은 사형제들과 함께 걸으면서 문득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아 참, 호중은 잘 가고 있겠지?’
* * *
무림맹을 나선 뒤 무구천으로 움직인 두 사람.
무혼신녀와 혁자영에게 다급한 것은 없었다.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은 어느 정도 편안하게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누님, 무구천을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글쎄다. 그건 그놈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움직여야겠지.”
혁자영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꺼내었다.
“제가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욕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
무혼신녀는 고개를 들어 혁자영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말한 대로 욕심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무혼신녀도 그들에 대해 잘 알았다.
고진유조차도 그녀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욕심이 없었다면 철갑을 그들이 얻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유가 나를 보낸 건 무구천이 필요해서가 아니야. 만일 필요로 했다면 너와 함께 보내지 않았겠지.”
“그건…….”
“맞아. 무구천을 지울 생각인 게다.”
“…….”
“우리가 떠나기 전 진유가 무엇을 가르쳐 줬지? 혹시나 모를 비천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무구천 그놈들의 무공을 지우기 위한 무공이었어.”
“아…… 하. 몰랐습니다.”
“그놈들이 극일가에 돌아가면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거든. 그게 싫은 것이지. 지금까지 그들 스스로 움직였지 않느냐.”
“그래서 누님 생각에는 그들이 극일가에 복귀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안타깝지만 그게 맞을 게야.”
“……제가 그런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보통은 극일가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듯합니다.”
“맞아. 그래서 머리가 나쁘다는 것이지. 화산파 장문인이 화산파 제자에게 복귀를 명했는데 싫다고 하면 가만히 있겠느냐?”
“무공을 거둔 뒤 파문을 시키겠지요.”
“맞아. 진유 아우도 그럴 생각으로 나를 보내는 거야.”
“결자해지군요.”
“그렇지. 무구천의 오무천자인 내가 끝내야 할 일이다.”
혁자영은 이해가 되었다.
가만히 두어도 될 일이었지만 극일가의 인물로서 그냥 둘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똑바로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구나.”
무혼신녀는 마지막으로 그들에 대한 정이 남아 있었다.
스으윽.
두 사람은 드디어 무구천의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야.”
그녀는 앞장을 서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무구천은 두 사람의 등장으로 긴장에 빠졌다.
도제 시남구와 고독기검 유하랑, 그리고 이무결까지 함께 나와 무혼신녀를 맞이했다.
“무혼신녀님, 어찌 멀리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을 온 것 같군.”
“그건 아닙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오셨기에…….”
도제는 그녀의 물음에 당황했다. 분명 이유 없이 찾아올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도제, 지금 무슨 짓이지?”
“…….”
“내가 남인 모양이군. 밖에서 손님 대접을 하겠다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전 단지 궁금해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안내해라.”
무혼신녀는 이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제는 앞장을 서면서 건물 안으로 안내를 했다.
“무혼신녀님, 안으로 드시지요.”
하지만 그들이 안내한 건물의 문이 열리자 무혼신녀의 인상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