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찰합태의 눈이 부릅뜰 듯 커졌다.
고진유가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맹주, 그대가 관부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오?”
“언제부터 태양무국이 관부의 소속이었는지 모르겠소이다.”
“…….”
“당신들은 약속을 잊고 있군.”
“무…… 슨 약속을 했다는 것이오?”
“분명 중원에서 물러갈 때 극일가와 약속을 한 것으로 알고 있소. 시간이 지났다고 모른 체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대는…… 극일가의 인물이오?”
“그렇소이다.”
찰합태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극일가와 태양무국 사이의 비밀.
‘망했다. 완전히 예상치 못한 일이…….’
무림맹주가 극일가의 사람일 줄 몰랐다.
게다가 아직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줄도 몰랐다.
“흐음. 혹시 우리가 기억을 못 할 것으로 생각했소?”
“…….”
“분명 그때 경고를 받았을 텐데. 중원에 들어오는 즉시 태양무국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만들어주겠다고.”
찰합태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극일가의 경고를 무시한 그들이었다.
극일천이 극일천무신궁으로 바뀌었기에 별일 없을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본도는 본 가의 경고를 무시한 태양무국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울 것이오.”
“…….”
“그대들만 아니라 초원에 남아 있는 태양무국의 본영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주겠소.”
흠칫.
고진유의 말에 그는 몸이 사시나무 떨 듯 한기가 들었다.
“설…… 마…….”
“지금쯤이면 본 문의 사형들이 태양무국의 본 건물에 거의 도착했을 것이외다.”
“…….”
“내가 방금 이야기하지 않았소이까? 본 가가 가장 중요히 여기는 것은 신의를 지키는 것. 먼저 어긴 것은 그대들이니 놀랄 필요 없소.”
찰합태는 양손을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어차피 돌아갈 곳은 없으니 그대들은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말이오.”
“…….”
무림맹주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본영을 기습한다면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는 말이군.’
슈우욱.
찰합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극일가의 무서움을 들어서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다르다고 여겼다. 무공 또한 태양천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사부께서 태양천법을 십이 성 대성한다면 중원 무림에 적수가 없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사부님은 내가 십이 성을 익히지 못할 것이라 보셨지. 하지만 난…… 완벽히 익혔다.’
그는 태양신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천하제일인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견식하고 싶소.”
“실망하지 않도록 해주겠소이다.”
고진유의 말에 자신감이 느껴졌다.
다른 인물이라면 자만심이라 생각했겠지만 그라면 당연한 말처럼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오직 상대방의 목숨뿐.
서로의 무공이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필요한 건 한 번의 초식.
한 번의 초식에 생사의 승패가 정해질 것이었다.
‘딱 한 번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그가 중원 최고의 무인이라고 해도 한 번의 초식이라면 상대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스르르륵.
태양신검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고진유의 정면에서 멈췄다.
햇빛을 받은 태양신검이 산산조각 부서지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팟팟팟팟팟!
태양신검의 빛이 닿는 곳은 지옥이라도 뚫지 못할 곳이 없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검광은 고진유를 향했다.
‘좋은 검이다. 하지만 검광의 세기가 약하군.’
번쩍!
사의검에서 섬광이 터졌다.
빛과 빛의 대결.
하지만 차원이 달랐다.
반딧불과 태양의 차이라고 할까.
사의검에서 터진 섬광은 순식간에 태양신검의 검광을 녹였다.
빛이 사라지면서 세상이 다시 나타났다.
“…….”
찰합태는 손에 든 태양신검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손잡이만 있을 뿐 산산조각이 난 태양신검은 부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뚝뚝.
반쯤 잘려 나간 허리에서 피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크크크…….”
너무나 어이없는 결과에 그는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중원에 나온 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태양무국의 멸망을 볼 수밖에 없었다.
광명에 선 그의 신형.
그는 무신(武神)이었다.
‘칸의 영광은 끝이로군…… 무신이 있는 한…… 중원에 들어올 수 없다.’
차가워진 몸은 천천히 아래로 쓰러졌다.
* * *
화산파 오백여 명의 제자들은 무림맹을 나선 뒤 태양무국의 본영을 향해 움직였다.
두두두두-
중원을 넘어서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초원에 들어섰다.
휘랍목인이라 불리는 초원.
휘익.
우종성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추게 했다.
사방에 끝이 보이지 않는 대초원이었다.
“광활하군.”
초원은 중원의 대평야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런 곳에서 살았으니 기마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겠어.”
묵경 또한 하늘과 맞닿은 초원의 끝을 보았다.
“진유 아우가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도저히 찾기 힘든 곳이었겠는걸.”
“그러게 말입니다. 무작정 돌아다닐 뻔했어요.”
인양은 지도를 보면서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방향이네요.”
“그렇군. 드디어 도착했다.”
꽤 힘든 장거리 이동이었다.
우종성은 돌아서며 장두총을 불렀다.
“호경, 오늘은 여기에서 쉰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바로 움직이도록 하자꾸나.”
“옙.”
장두총은 화산파 제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대사형의 말씀을 들었겠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
“넵, 알겠습니다.”
화산파 제자들은 빠르게 야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 *
밤이 깊었다.
인양은 눈을 뜬 채 하늘을 보았다.
하늘 위로 수만 개의 별이 눈앞에 펼쳐졌다.
“형…… 자요?”
“아니, 왜?”
“여긴 중원보다 별이 더 많은 것 같아서요.”
“초원이잖아.”
“…….”
인양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있는 묵경을 보았다.
“초원에는 별이 더 많아요?”
“당연하지. 주위가 더 넓게 보이잖아. 산에서 보면 주위가 막혀서 하늘이 조금 밖에 안 보이고. 안 그래?”
“와아…… 묵경 형은 정말 똑똑하세요.”
“이제 알았냐? 사실 내가 귀찮아서 머리를 안 쓰는 것뿐이야.”
두 사람 옆에서 누워 있던 녹림야검도 한마디 했다.
“음…… 역시……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벌떡.
그때, 인양이 갑자기 누웠던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묵경과 녹림야검도 다급히 따라 일어났다.
“왜 그래?”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인양은 재빨리 한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인양이 보던 방향을 따라 보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느낌인데?”
“괴기해요. 뭔가 안 좋아요.”
“…….”
인양의 감각은 고진유에 비해서도 뛰어났다.
묵경과 녹림야검도 인양의 감각에 대해 인정했다. 인양을 믿었다.
묵경은 다시 물었다.
“저 방향이 태양무국의 본영이 있는 곳이 맞지?”
“네. 그렇습니다.”
“혹시나 모르니 전부 깨우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우종성의 군막으로 다가섰다.
“우 형, 일어나 보게.”
묵경의 목소리에 안에서 다급히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 찾아왔다는 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우종성이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인양이 태양무국 방향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
우종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심각한가?”
“저곳에서 느껴지는 기분이 나빠요. 정확히는 모르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게 확실합니다.”
태양무국을 치고자 달려왔다.
결정은 우종성의 몫이었다.
“지금 가봐야겟지?”
“희미해져 가고 있어요.”
“……무슨 일인지 보는 게 좋겠군.”
우종성은 곧바로 화산파의 제자들을 모두 깨웠다.
일각이 지나자 모든 제자들이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모두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인양, 앞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인양은 화산파 제자들 앞으로 나섰다.
어둠 속으로 오백여 기의 말들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인양이 없었다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 방향이다.’
인양은 오로지 감각에 의해 방향을 잡으며 움직였다.
얼마를 걸었을까?
죽음의 냄새.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혈향이 강하게 밀려왔다.
인양의 옆으로 묵경과 우종성이 다가왔다.
“저곳이 태양무국이 맞아?”
“……우리가 제대로 왔다면 맞을 겁니다.”
“괴기스러운 기운은 사라졌어요.”
“알았다. 가보자.”
우종성은 화산파 제자들에게 주의를 시켰다.
“모두 조심해서 움직인다.”
“넵. 알겠습니다.”
태양무국에 제대로 찾아왔다.
태양무국의 깃발만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불을 밝히며 주위를 살피자,
‘우욱.’
화산파 제자들은 잠시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전부 인상을 찡그렸다.
“어떤 새끼들이야?”
장두총은 순간 욕이 튀어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온 채 터져 있었다.
온몸이 제대로 성한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사형, 사람 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짐승 같은 짓을 하다니…….”
이건 짐승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정확히 심장을 파고들어 간 것은 인간의 손 외에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지…….”
“전부 죽은 모양입니다.”
“지독하군.”
살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
인양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미세하게 흐르는 기가 느껴졌다.
‘저기쯤인데…….’
건물 한 곳으로 움직였다.
묵경과 녹림야검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인양이 가는 곳에도 처절하게 잘려 나간 시신들이 쌓여 있었다.
인양은 뒤에 따르는 두 사람을 보며 벽 아래를 가리켰다.
“밑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요.”
“여기 아래에?”
“네에…….”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시신들을 옆으로 치웠다.
땅은 피에 젖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녹림야검은 바닥을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
위에서 문이 열려 놀랐는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땅 아래에 기척을 보아 누군가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린 중원에서 왔소이다.”
“…….”
녹림야검은 다시 말을 했다.
“밖에는 우리밖에 없소.”
스윽.
곧 녹림야검은 위로 올라오는 소리에 뒤로 물러났다.
땅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당신들은 태양무국의 인물들이오?”
“그, 그렇…… 습니다…….”
그들은 대답하면서도 주위를 보며 여전히 떨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고맙…… 습니다.”
세 사람의 곁으로 어느덧 우종성과 사형제들이 다가왔다.
“이들은?”
“여기 아래 숨어 있었어.”
“누구 짓이오?”
“명…… 왕…… 괴수인…… 입니다.”
“명왕괴수인?”
우종성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묵경도 마찬가지였다.
꽤 서적을 읽었지만 명왕괴수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만든 괴물이 사람은 맞소?”
“네, 네에…….”
“…….”
그들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강시 같은 종류라 할 수 있소?”
“비, 비슷하지만…… 강시는 아…… 닙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오?”
“그건…… 칸의 대법사…… 께서…….”
“같은 편이 아니오?”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아니면 제압을…… 할 수 없다고…… 들었을 뿐이고…….”
“그것들은 어디에 갔소?”
“……그건…… 저희도…….”
그들이 말하는 명왕괴수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 참상을 벌인 괴물들이 중원으로 향한다면…….
인양은 정신을 집중시키며 괴기스러웠던 기를 다시 찾고자 했다.
이마에 땀이 흐를 만큼 모든 기를 집중시켰다.
‘……찾았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미세한 기가 느껴졌다.
척.
인양은 손을 뻗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은 중원 하북성으로 내려가는 방향이었다.
“저기로 가고 있어요.”
“인양아, 정말 저 방향으로 가는 게 맞아?”
“네, 확실합니다.”
“큰일인데…… 저 방향이라면 중원이잖아!”
“어떻게 하죠?”
우종성은 태양무국 주위를 보며 확인했다.
‘이 정도면 회생이 불가능하겠군.’
화산파 제자들과 함께 온 목적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우린 여기를 쑥대밭으로 만든 괴물들을 따라간다. 저놈들이 저대로 중원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이 다칠 테니. 혹시 반대 의견이 있는 사람은 말하거라.”
“…….”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았다.
장두총이 큰 소리로 제자들을 대변하듯 말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난 저놈들이 궁금합니다.”
“좋다. 그들의 뒤를 따른다.”
화산파 제자들은 곧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태양무국의 정리는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명왕괴수인에 대해 모른 채 무작정 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우선 그놈들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넵. 알겠습니다.”
묵경은 명왕괴수인을 쫓기로 한 우종성과 인사를 했다.
“우 형, 부탁하겠네.”
“자네들도 조심하게.”
묵경은 인양과 녹림야검, 세 사람은 화산파 제자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따로 할 일이 생겼다.
두두두-
화산파 제자들은 명왕괴수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