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321화 (321/425)

321화

도제는 말이 없었다.

유하랑도 마찬가지였다.

무구천주로 추대하기 위해 무혼신녀를 만나러 왔건만,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고진유는 두 사람에게 결정권을 주었다.

“먼저 두 분이 오해는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극일가는 무구천이 귀속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오?”

“전대 가주께서 무구천을 세우신 목적은 극일천의 행동에 어느 정도 제약을 주기 위함이었소이다. 두 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무구천은 그들을 상대로 긴 세월 동안 충분히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지요.”

“…….”

“본도의 말이 아직도 잘 안 믿기는 모양이군요. 증거가 필요합니까?”

“증거가 있소이까?”

“본도가 알기로 그분의 마지막 유언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까지 알고 있다고?’

도제는 고진유가 무구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분의 유언 중에 극일천이 무너지는 날 열어볼 수 있는 상자가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 그렇네.”

무구천의 인물들조차 알기 어려운 상자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두 사람은 여전히 놀람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상자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있지요.”

“……!”

도제의 표정이 방금 반응과 다르게 굳어졌다.

“이런…… 상자를 열어봤군요. 하여튼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안은 텅 비어 있었겠지요.”

“…….”

도제와 유하랑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고진유의 말대로 오래전 그들은 상자를 열어본 뒤였다.

하지만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당신들은 마음에 안 들어요. 어떻게 조사께서 하신 유언을 무시하는지 모르겠군요.”

“…….”

고진유의 말에 두 사람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상자는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잘 살펴봤겠지만 그 정도로 허술하게 만든 물건이 아니죠. 내부에 숨겨놓은 상자의 바닥에 보면 글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극일천멸 극일귀문.”

“…….”

고진유의 눈빛을 그들은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그의 말이 확실하다면, 고진유가 관심이 없다고 해도 무구천은 여전히 극일가의 귀속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본도의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돌아가서 확인해 보시죠. 맞다면 그때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세요.”

“알…… 겠소이다.”

“먼 길 왔는데 배웅은 못하겠소이다. 먼저 일어나지요.”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밖으로 나가 정원에 모여 있는 그녀들 앞으로 다가섰다.

“누님, 모두 들으셨죠?”

“그래. 나도 몰랐다. 저놈들이 조사의 유언을 개떡같이 여겼다는 게 화가 나는군.”

“저 먼저 가겠습니다.”

“맹주는 여기 동생들하고 같이 가라.”

“……알겠습니다. 살살하세요.”

“알아서 하마.”

고진유는 그녀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큰누님께서 할 일이 계시다네요. 우린 맹주전에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다. 모두 진유 아우를 따라 가볼까?”

“넵. 언니, 좋아요.”

그들이 화후전을 벗어난 뒤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콰아앙-!!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림맹 전체를 울렸다.

영화 옹주는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왕언니가 무척 화가 났나 봐요.”

“그러게. 오늘 제대로 날 잡았다.”

“……언니, 저도 무공을 배우면 안 될까요?”

“음? 영화는 누구에게 배우고 싶어?”

영화 옹주는 앞에 선 여인들 모두 무림 최고의 여고수임을 알았다.

“왕언니요.”

“음…… 생각 잘해야 할 거야. 언니 성격에 엄청 힘들 텐데. 차라리 설미에게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설미 언니도 강하지만 제가 열심히 하면 되잖아요.”

“그래. 나중에 이야기해 보자.”

“넵. 고마워요. 화유 언니.”

앞서가던 고진유는 그녀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진하 누님에게 배우면…… 이러다 애 잡는 게 아닌가 몰라.’

* * *

비천의 다섯 절대자들.

비천오행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극일천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후 그들의 역할은 애매하게 변했다.

금비천 나하중은 극일천무신궁의 궁주가 되었다.

황색의 도포를 휘날리며 나하중이 들어섰다.

나머지 네 명의 비천인은 그런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를 왜 금비천이라 하는지 알겠소이다.”

“화비천께서는 본인의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려.”

“너무 화려하지 않소이까?”

“클클, 언제부터 본인의 옷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르겠소.”

화비천은 검미에 짙은 주름이 생겼다.

‘변했군.’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백의문사건의 노인, 수비천 또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비천께서는 본 비천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듯하군요.”

“후후후. 설마 본인이 그것을 잊을 리 있겠소이까? 수비천께서는 너무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분이 지금 애들 소꿉장난 놀이를 하시는 게요? 유치하지 않소이까?”

“…….”

나하중은 살형기를 끌어 올렸다.

파앗!

수비천의 앞으로 황금빛의 살형금기가 쏟아져 나갔다.

수비천은 앞으로 날아오는 살형금기를 보면서 찻잔을 가볍게 툭 쳤다.

쏴아아아-

파아아앙!

위로 솟구친 찻잔 속의 물방울이 튕겨 오른 뒤 거친 물살을 만들어내며 금비천의 살형금기를 막아냈다.

“그대만 무공을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외다.”

“……훗.”

나하중은 피식 웃었다.

타아앙!

목비천이 탁자를 내리쳤다.

“지금 우리들끼리 싸우고자 하시는 것이오?”

“목비천도 보지 않았소이까. 먼저 시비를 걸었소이다.”

“금비천께선 언제부터 말보다는 주먹이 앞선 분이 되셨소이까? 우리 중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하시던 분이 아니시오?”

“후후, 이성적이라…… 가끔씩은 감성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좋은 법이지요.”

‘흐음…….’

목비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가 세 분이 본인을 동시에 공격하겠소이다.”

금비천은 그들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스윽.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앉아 있던 마지막 인물.

토비천이 눈을 떴다.

검은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백안이었다.

“금비천.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더냐?”

토비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있던 공간이 울렸다.

“……!”

평소의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비천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뒤 부복을 했다. 그와 동시에 화비천과 목비천도 뒤이어 무릎을 꿇었다.

“명군을 뵙사옵니다.”

“…….”

“금비천, 본좌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더냐?”

금비천도 고개를 숙이며 억지로 부복을 했다.

토비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명왕께서 때가 되었으니 길을 만들라 하셨도다.”

“송구하옵니다. 명왕께서 강림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수비천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금비천은 고개를 들어라.”

“…….”

나하중은 고개를 들었다.

파앗!!

흑색의 기류가 나하중의 목을 감싸며 위로 들어 올렸다.

“커어억.”

나하중은 발버둥을 치면서 숨이 막힌 듯한 신음을 흘렸다.

점점 얼굴이 붉어지면서 조금만 더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툭.

순간, 그의 목을 감쌌던 흑색 기류가 사라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금비천, 내가 옆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를 것이라 여겼느냐?”

“……아…… 닙니다.”

나하중은 몸을 바로 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네놈이 아무리 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본좌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가?”

스으윽.

사라졌던 흑색 기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금비천의 눈동자 앞에서 멈췄다.

“그동안 수고한 대가로 용서는 이번 한 번뿐이다. 명왕의 명을 어기는 자는 혼만이 남아 영원한 고통받을 것이다. 알아들었는가?”

“명…… 심하겠습니다.”

나하중은 두려움에 떨었다.

저들은 스스로 나올 수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을 이용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타인의 몸을 통해 잠시 동안이라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그대로 있을 것을…….’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용맥을 이은 극일가의 인물들.

극일천주가 있었기에 함부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제 그가 사라진 이상 토비천의 몸으로 통해 나올 수 있었다.

“금비천, 네놈의 역할은 천하멸살계를 진행시키는 일이다. 자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라.”

“……알겠사옵니다. 최선을 다해 명왕께서 강림하시도록 혼돈의 세상을 만들겠사옵니다.”

스으으으-

토비천의 백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부복했던 네 명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우…… 숨이 막혀 질식할 뻔했소이다.”

“명군께서 직접 나서실 줄은 몰랐소.”

그들은 힘들게 일어선 금비천을 보았다.

“아시겠소? 우린…… 그저 그분들의 꼭두각시일 뿐이오.”

“…….”

나하중은 자리에 앉았다.

‘망할…….’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여겼건만.

남의 바둑판에 놓인 하찮은 바둑알의 신세일 줄이야.

‘……어차피 내 것이 안 된다면.’

마음대로 할 뿐이었다.

* * *

두두두두-

삼만 기의 거친 기마들이 오란찰포의 상도로 들어선 뒤 멈췄다.

펄럭.

수만 기의 기마대 위로 태양기가 솟구쳤다.

태양무국(太陽武國).

태양제국이라 일컫던 대원제국의 무력군이었다.

그들은 중원 무림에 있을 당시 군부보다는 무림에서 활동하던 단체였다.

대원제국과 함께 북방의 초원으로 물러났던 제일의 무력 세력이 수십 년이 지난 후 중원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각다각.

중년 사내가 태양마차의 곁으로 다가섰다.

“왕야. 전방에 적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대략 십만의 병사들입니다.”

“훗. 중원의 황제가 제법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군.”

덜컹.

태양마차의 문이 열리며 사내가 아래로 내려섰다.

이십 대 후반의 청년.

붉은빛의 얼굴에 하늘로 치켜 올라간 짙은 눈썹은 강인한 느낌을 주고도 남았다.

“이곳이 사부께서 말한 중원인가?”

“그렇사옵니다.”

청년은 대평원 끝에 모여 있는 군사들을 주시했다.

“음…… 거의 보병들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기병들이야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왕야의 말씀처럼 대부분 보병들입니다.”

“이건 우릴 너무 얕잡아본 게 아닌가?”

“멍청한 것입니다. 전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네 말대로 멍청한 게 맞군. 기병을 상대로 보병으로 막고자 하다니…….”

“공격 명령을 내리시면 단번에 쓸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조심하도록.”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년 사내는 말을 몰며 기마대의 앞으로 다가섰다.

채애애앵!!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태양무국의 전사들이여. 한 놈도 빠짐없이 적들을 섬멸하라!!”

“와아아아아-!!”

두두두두-

삼만의 기마대들이 말을 몰며 앞으로 달렸다.

땅이 흔들리며 바닥에 박혀 있던 돌들이 위로 튕겨 오를 정도였다.

“적이 쳐들어온다! 궁수대는 저들을 향해 활을 쏴라!”

피우우우웅-

피이이이잉-

병사들 뒤에 숨어 있던 궁수병들이 활을 장전하며 쏟아내기 시작했다.

수만 발의 화살들이 허공을 가르며 달려오는 기마대에 떨어졌다.

‘훗. 이것으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군.’

그는 전방에서 빠르게 달리며 소리를 높여 외쳤다.

“화살을 뚫고 들어간다!”

기마병들은 말허리에서 철 방패를 위로 들어 올렸다.

기마병들은 연이어 떨어진 화살들을 막아내며 어느덧 병사들과 마주쳤다.

“됐다. 한 명도 남김없이 목을 베어라!”

휘이이익!

스걱-

기마병들의 검과 창이 병사들을 베며 쏟아져 나갔다.

십만의 병사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평원을 가득했다.

* * *

두두두두-

무림맹으로 기마병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정문 호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말 위에서 내려선 사내는 군장을 한 무장이었다.

“황제의 명으로 무림맹주님을 뵙고자 왔소이다!”

“……?”

호위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의 명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안에 보고하겠네.”

정문 호위는 다급히 무림맹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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