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이 찝찝한 기분은 뭐지?
군사전을 나오면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제갈양의 웃음은 마치 재밌는 상황을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맹주전으로 가는 길이 점점 무거워졌다.
“추우우우웅!”
맹주전 호위무사가 다가온 고진유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고생 많습니다.”
“아닙니다. 맹주님께서 돌아오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고진유는 안으로 들어섰다.
‘흠…… 이 분위기는……?’
먼저 맹주전에 도착했던 인양이 빠르게 다가와 귓속말로 한껏 조용히 말했다.
“혀어엉. 큰일 났어.”
“왜?”
“형수님들이 전부 찾아왔어.”
“……!”
인양에게 형수들이란…….
찝찝한 기분이 이것이었나?
그녀들이 찾아오더라도 괜찮은데……?
“세 사람 전부? 설미 소저와 악 소저도?”
“어…….”
“그렇구나.”
설미와 악소소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지만, 북소연까지 세 사람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근데 왜 계속 마음이 불안하지?’
“형, 근데…… 다른 분도 왔어.”
“…….”
불안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누가…… 왔다는 건데?”
“황궁에서 우리가 몰래 나왔잖아. 그래서 옹주가 찾아왔어.”
“인양아.”
“네.”
“우리 도망갈까?”
“…….”
인양은 그의 얼굴에서 진심을 느꼈다.
“……형님이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셨잖아요.”
“인양아. 그건 장소와 때에 따라 다르거든. 이왕 맞는다면 나중에 맞아도 괜찮아.”
“…….”
그때, 망설이는 두 사람을 향해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양 도련님, 도망가다가 잡히면 국물도 없다고 하세요.”
“형, 들었죠?”
“가자…….”
고진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 * *
드르륵.
열린 문 안으로 여인들의 모든 시선이 고진유에게 향했다.
‘대체 몇 명이야…….’
여덟 명의 여인들.
무혼신녀를 중심으로 고화유, 연자련과 당우희, 북소연, 설미, 악소소, 그리고 영화 옹주까지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건 완전 여인천하구만.’
고화유가 가만히 선 그를 보며 한마디 했다.
“뭐 하냐? 문을 열었으면 안 들어오고.”
“하하! 진유 아우가 화유 동생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구나.”
“어릴 때 저에게 많이 맞았거든요.”
무혼신녀와 고화유가 만났다.
만나면 안 되는 두 사람이.
“누님들,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몰랐는데 동생이 황궁에 급히 갓던 이유가 있더구만.”
무혼신녀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영화 옹주를 가리켰다.
“…….”
고진유는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녀들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조용히 앉아 있는 북소연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는 고화유가 물었다.
“황궁에서 일이 끝났으면 바로 돌아오지 않고 어딜 갔다 왔어? 설마 또 다른…….”
“누나는 저를 어떻게 보는 겁니까? 무옥천지에 다녀왔어.”
“정말? 무옥을 얻었단 말이지?”
“어…….”
“그건 잘했네.”
고화유는 옆에 앉은 무혼신녀에게 무옥천지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용맥의 가문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군.”
무혼신녀는 네 명의 여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복받은 녀석들이야. 용맥의 여인들이 되다니.’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북소연이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한마디도 없이 사라질 수 있어요?”
“…….”
“사람이 안 보인다고 해서 마음이 정리된다고 생각하세요? 세상에서 모르는 게 없는 분이라고 하는데 남자들은 똑같네요.”
“잠깐 스치듯 황제가 소개를 해줘서 옹주를 만난 적은 한 번밖에 없었소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되는 게 만남 한 번이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한 번 만에 좋아지는 사람도 있고, 여러 번 만나야 좋아지는 사람도 있듯이.”
영화 옹주는 황궁에서 사라진 그를 만나기 위해 무림맹으로 내려왔다.
고진유를 만난 자리에서 직접 듣고 싶어서.
“정확하게 말을 하고 나오셔야죠. 무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무림맹에 혼자 찾아왔잖아요. 황궁에서 나오기 전에 정확하게 말을 했으면 가슴이 아파도 포기할 수 있었을 거예요. 안 그래요?”
“생각이…… 짧았소이다.”
“그리고 설미 동생과 소소 동생에겐 연락을 한 번도 안 했다고 하던데. 맞아요?”
“…….”
“오죽하면 둘 다 무림맹으로 찾아오겠어요?”
“미안하게 됐소이다.”
“나한테 말고 직접 말하세요.”
고진유는 설미와 악소소를 보며 돌아섰다.
“두 분께 무심해서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용서하시오.”
“아니에요. 중원에서 많이 바쁘시다는 것을 아는데…… 괜찮아요.”
“설 언니, 말씀이 맞아요. 큰일을 하시는 분이시잖아요.”
“앞으로 신경을 쓰도록 하겠소이다.”
설미와 악소소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영화 옹주는 고진유와 함께 정원을 함께 걸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닙니다. 본도가 똑바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옹주의 탓이 아닙니다.”
“…….”
“황궁에서 쉽게 나올 수 없었을 텐데 황제께서 허락하신 모양이군요.”
“그게…….”
그녀는 똑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멈칫.
고진유는 걸음을 멈췄다.
“황제 몰래 나온 겁니까?”
“……네에.”
설마 그녀가 황궁을 몰래 빠져나왔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누가 알고 있습니까?”
“장인태감께…… 말씀을 드리니 그분께서 책임지겠다고 하시면서…… 도와줬어요.”
“황궁에 연락을 보내야겠군요.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저어…… 제가 마음에 안 드셔도 좀 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나요?”
“…….”
“언니들이 정말 저에게 잘해주셔서…… 친언니들 같아서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잘해주시고요.”
황궁에서 순비의 옹주로 태어난 그녀가 적막한 곳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을지, 보이지 않는 아픔을 이해했다.
“편할 대로 하세요. 가고 싶을 때 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연락은 할 테니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네에…….”
영화 옹주는 당장 돌아가지 않은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맹주전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어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러게요. 설마 받아준 건 아니겠지?”
고화유는 북소연을 슬쩍 본 뒤 말했다.
“동생은 북 아우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아마 다른 일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고화유의 생각이 맞다는 듯. 영화 옹주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멀리 있는 무혼신녀와 고화유를 보며 소리쳤다.
“왕언니……! 맹주님이 여기에 편한 대로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언니들과 같이 지내서 너무 좋아요.”
무혼신녀와 고화유는 달려오는 그녀를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 말이 맞죠?”
“아직 애네.”
* * *
무림맹에서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무림대전 회의의 안건은 점창파에 관한 내용이었다.
함부로 움직인 탓에 극일천무신궁을 자극했다면서, 차후엔 회의를 거쳐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맹주 고진유는 당연히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회의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맹주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는데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고진유는 회의가 끝난 후 대전을 나서는 점창대사를 불렀다.
“소화 진인께서는 잠시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점창대사 소화 진인은 걸음을 멈춘 뒤 다른 인물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고진유는 무림맹의 옥좌에서 내려온 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점창파를 돕지 못했습니다.”
“…….”
소화 진인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그를 보며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또한 무림맹의 잘못도 아니었다.
어쩌면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어찌 맹주의 잘못이겠소이까?”
“아닙니다. 결과로는 본도가 먼저 나섰기에 생긴 일이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지 않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제가 혹시나 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점창파에 아직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조만간 그들의 행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고맙소이다. 정말…….”
“연락이 오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홀로 남게 될 줄 알았건만.
생존자가 있다는 말을 듣자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소화진인은 들어올 때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대전을 나갔다.
‘……나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지만 저들에게는 둘도 없는 사랑스러운 가족들이군.’
“이 녀석아. 그게 바로 측은지심이라는 것이니라.”
‘사부님……?’
그 순간 사부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 * *
휘이익!
고진유의 앞으로 호위가 내려섰다.
“맹주님, 보고드립니다.”
“무엇이지요?”
“본 맹에 도제님과 고독기검께서 오셨습니다.”
그들은 무구천의 오무천자였다.
‘정리가 된 모양인가?’
“어디로 모셨소이까?”
“화후전으로 모셨습니다. 그분들께서는 무선여협님께 볼일이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알겠소이다.”
고진유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그녀를 찾아왔는지 이유를 알 듯했다.
그녀 또한 무구천의 오무천자.
무구천의 일로 찾아왔을 게 확실했다.
‘한번 가볼까?’
고진유는 대전을 나온 뒤 곧장 화후전으로 발길을 향했다.
평소라면 정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을 것이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정원에 여인들이 나와 있었다.
“어…… 왔어?”
고화유가 들어선 고진유를 반겼다.
그녀 주위로 북소연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밖에서 뭐 하세요?”
“무구천의 사람이 찾아왔어. 이야기한다기에 자리를 피해준 거야. 그들을 만나려고 왔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번 보게요.”
“들어가. 심각한 일인가 봐. 두 사람 표정을 보니 결단을 짓고자 찾아온 것 같던데.”
“쉬고들 계세요.”
고진유는 그녀들을 뒤로한 채 건물로 들어섰다.
접견실에 그들이 모여 있었다.
‘네 사람이군.’
문 앞에 서며 안에 자신을 알렸다.
“누님, 진유입니다.”
“들어와.”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도제 시남구와 고독기검 유하랑, 그리고 청미화 조여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들 지냈습니까?”
“맹주도 잘 지낸 모양이구려. 언제 여인을 네 명이나 만났을 줄은 몰랐네.”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허, 능력도 좋소이다. 그 바쁜 시간에도…….”
무혼신녀는 도제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제, 사정을 잘 모르면 굳이 비꼬지 않아도 돼. 동생은 그런 남자가 아니니깐.”
“……죄송합니다.”
도제 또한 그녀에게는 고양이 앞에 쥐 꼴이었다.
“진유는 여기에 앉아.”
“넵. 누님.”
고진유는 자리에 앉으면서 든든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다시 두 사람을 보면서 물었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알겠습니다.”
“무혼신녀님께서 본 천을 맡아주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싫다.”
“죄송하지만 싫은 이유가 있으십니까?”
“있다. 그건 진유 아우에게 물어봐라.”
두 사람의 시선이 고진유에게 향했다.
“누님…… 제가 이유를 어떻게 안다고 하십니까?”
“저번에 나에게 이야기했을 텐데. 무구천의 시작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건 오래전 일입니다.”
“오래된 일이라도 뿌리는 제대로 알아야지 않겠어?”
도제 시남구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무혼신녀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맹주가 무구천의 시작을 알고 있다. 누가 무구천을 세웠는지 말이다.”
세 사람의 시선이 고진유에게 향했다.
무구천의 세운 분을 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었다.
“맹주, 일대 무구천주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소?”
“그분의 성함은 강조천이라 하시지요.”
“…….”
“정확히는 극일가의 무력단으로 극일무구오련의 이련주 강조천이기도 합니다.”
초대 무구천주 강조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무구천의 인물이 아니고서야 그분의 성함을 아는 인물은 없었다.
도제 시남구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혼신녀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까?”
“도제, 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분에 대한 증거를 보여달라고 한다면 본 가에 가면 얼마든지 있소이다. 혹시 무구천의 신물이 옥무환이 아니오?”
“……!”
“옥무환의 안쪽에 보면 극일무극이련주 강조천이라 적혀 있을 테죠.”
도제와 유하랑은 믿기지 않았다. 천주의 손에서 뺀 옥무환에 새겨져 있던 글자였다.
그때 그들도 처음 본 글이었다.
“맞소…… 이다.”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구천이 극일가의 세력이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극일천과 싸웠거늘…….”
“혼돈하는 모양인데 극일천과 극일가는 전혀 다릅니다. 극일가의 가주께서 만일을 대비해 무구천을 세운 것이지요. 그동안 무구천은 제 임무를 충분히 마쳤습니다.”
“내가 왜 진유 아유와 이야기하라고 했는지 알겠지?”
“…….”
“잘 해봐. 그럼 난 먼저 일어난다.”
무혼신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빠르게 밖으로 사라졌다.
마치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