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고진유는 천천히 오운봉을 향해 올라섰다.
“…….”
발밑으로 구름이 다가왔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구름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여긴…….’
고진유는 걸음을 멈추었다.
구름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주변이 변했다.
쿠아아아앙-!!
거친 소리를 뿜어내면서 구름 사이로 날뛰는 거대한 황룡이 나타났다.
고진유의 머리 위로 큰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던 황룡은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더니 고진유를 향해 날아왔다.
또 한 번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아아아앙!!
황룡은 커다란 입을 벌리며 고진유를 단번에 삼켰다.
“…….”
주위가 고요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고진유는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기는 어디지?’
분명한 건 오운봉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법도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움직이고자 했지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가만히 선 채 그대로 있었다.
번쩍!
그때, 전방에서 둥근 원형의 빛이 가까이 다가왔다.
-용의 아이인가?
“…….”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인지 몰랐다.
고진유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용의 아이인지 아닌지 몰랐다.
-용의 아이인가?
또 한 번의 물음이 들렸다.
“제가 용의 아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파앗!
고진유의 전신이 빛을 받아내며 용린으로 변해갔다.
-용의 아이가 맞구나.
용린은 오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투명하게 변했다.
“누구십니까?”
-난 용맥을 지키는 수호령이다.
“용맥이 무엇입니까?”
-조율자라고 할 수 있겠지.
“…….”
고진유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조율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상의 모든 것.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서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게 조율자인 용의 아이가 하는 일이다.
“제가 조율자란 뜻입니까?”
-그렇다. 용맥의 전인이 아니더냐. 용의 아이는 용맥의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며 전해지느니라.
“만일 용맥의 전인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끊어지겠지. 그리고 난 새로운 용맥을 찾아 떠나야 한다. 조율자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혼란과 혼돈으로 빠지게 되니 조율자가 사라지면 안 된다.
“제가 조율자로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잘하고 있지 않으냐? 더 잘할 필요가 없느니라. 그냥 그대로 하는 게 조율자가 하는 일이다.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고진유는 안심이 되면서도 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 명족의 힘이 만월에 들어섰도다.
‘명족?’
처음에는 명족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내 명족(明族)이 일월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명족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혼돈을 만들고자 하는 종족들이다. 귀령의 종들이 명족이지. 혼돈의 세상이 되면 귀령이 나타나게 되어 절망과 고통의 날개를 펼치며 돌아다닐 것이다. 결국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게 되느니라.
“귀령이…… 무엇입니까?”
-귀령이란 일정한 형태로 정의 내릴 수 없다. 하지만 귀령과 마주치게 되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니라.
“알겠습니다.”
-용의 아이는 명족을 파하고 귀령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할 임무를 지녔도다.
스스스스-
고진유의 몸을 감쌌던 빛이 하나의 둥근 옥처럼 변했다.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무옥(武玉).’
-앞에 놓인 것을 받아들여라.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내밀었다.
둥근 빛이 깃털처럼 손바닥 위로 떨어져 내려져 내렸다.
번쩍!
손바닥 위에서 섬광이 퍼져 나갔다.
* * *
고진유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었다.
‘여기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창룡산장인가……?’
오운봉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옥을 받은 기억까지만 났다.
그 순간 빛을 본 뒤 정신을 잃었다.
용맥의 수호령이 자신을 보며 용의 아이라 했나?
또한 자신을 조율자라고 했다.
그리고…….
명족에 대해 알려주었다.
“일월가. 그들이 명족이었군.”
용맥의 수호 가문인 조율자와 명족의 싸움.
극일가와 일월가의 싸움은 원시무림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게 확실했다.
귀령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 극일가와 반대로 귀령이 나오도록 해야 하는 일월가.
“복잡하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율자는 무엇이며 명족인 일월가, 그리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귀령까지.
알면 알수록 상황은 복잡하게 변하는 듯했다.
드륵.
“형, 언제 왔어?”
인양이 방에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자고 있어서 조용히 들어왔다.”
“아, 그랬구나. 묵경 형과 녹검 형도 이제 일어나서 차를 마시고 있어요.”
“그렇군. 같이 가자.”
고진유는 인양과 함께 두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이 차를 마시는 접견실은 산 아래 전망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묵경은 인양과 함께 오는 고진유를 보며 손을 들었다.
“지금 돌아왔어?”
“방에서 주무시고 있던데요?”
“어…… 그래? 어느 방에서?”
“가장 안쪽 방에서요.”
“아하, 거긴 안 가봤었지.”
고진유는 자리에 앉았다. 문을 열어놓았는지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어떻게 되었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
“뭐랄까…… 전설처럼 내려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까요?”
인양이 호기심을 보였다.
“전설? 그게 뭔가요?”
“혹시 원시무림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어?”
“원시무림요? 현재처럼 구대문파나 중원 십대무가들이 정립되기 전의 무림이라고만 들었어요.”
“그 말이 맞을까?”
“아니라는 건가요?”
“보통 그렇게 알고 있지. ……원시무림이라는 정의를 내린 게 누구라고 생각해?”
“……?”
고진유의 질문에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볼 뿐 대답을 못 했다.
한 번도 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게? 난 전혀 모르겠는데?”
“저도요.”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도 원시무림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 무림인은 원시무림이 사라진 뒤 수많은 문파가 중원에 하나씩 나타나면서 지금과 같은 무림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원시무림이 왜 사라졌는지…… 그 이유는 중원에서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진유 아우는 알고 있다는 거네.”
“네, 알고 있습니다.”
“이유가 뭐야?”
“원시무림을 양분했던 두 곳은 극일가와 일월가였습니다. 긴 세월 동안 결국 극일가에 의해 일월가는 전멸했고요. 하지만 묵경 형도 아시다시피 본 문인 극일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음…… 그 말은 지금도 원시무림이 있다는 건가?”
“원시무림이라고 중원에 이름을 붙인 것도 본 가입니다. 극일가의 존재를 중원 무림에 숨기기 위해 원시무림이라고 한 거죠. 본 가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중원인들은 단순했습니다. 원시란 말에 신화나 전설로 취급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극일가는 그 후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왜 숨기고자 했지? 굳이 안 그래도 되잖아.”
“그건 일월가의 또 다른 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극일가에 의해 전멸된 세력이 전부가 아니었지요.”
“다른 곳에 일월가가 있었다는 거야?”
“그런 모양이더군요.”
“그들도 대단한 곳이군.”
“맞습니다. 어둠 속으로 숨어든 일월가를 상대하기 위해 극일가도 숨어야 했습니다. 이후 공식적으로 중원에서 활동을 멈추면서 원시무림이라 소문을 낸 것이었습니다.”
“이거 엄청난 비밀을 들은 것 같은데…….”
“그리고…… 일월가, 즉 극일천무신궁의 목적이 무엇인지 제 말을 들으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고진유는 극일천무신궁과 그 뒤에 숨어 있는 비천과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었다.
세 사람은 놀란 채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인양이 생각을 정리했다.
“일월가가 명족이고, 귀령을 중원으로 들여보내려고 하는 게 명족이며, 그들을 막아내기 위한 가문이 극일가라는 것이네요.”
“인양의 말이 맞아. 그렇게 된 거야.”
“음……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문제 같아요.”
“간단하다면 간단하지. 우선 극일무천신궁만 똑바로 막아내면 된다. 나머지는 그때 계획을 세우면 되고.”
“알겠어요.”
네 사람은 결론을 지었다. 일월이고 명족이고 귀령은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당장 그들이 막아야 하는 건 극일천무신궁이었다.
스으윽.
산장으로 공강이 들어왔다.
“공자님, 소신 공강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어제 오운봉에 다녀오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무옥을 얻으셨군요. 감축드립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주님의 눈동자에서 어떠한 생각을 하시는지 전혀 읽을 수 없습니다.”
공강은 그가 진정한 극일가의 가주가 되었음을 알았다.
“가주님께서는 소신과 함께 가실 곳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고진유는 그를 따라 일어나 뒤에 남은 세 사람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잠시 갔다 올 테니 쉬고 계세요.”
“바쁜 것도 없는데 천천히 갔다 와.”
* * *
두 사람은 도룡묘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볼 때는 작은 공간의 사원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간 뒤 돌아서 움직이자 한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는 잘 들어서지 않으면 모를 곳이군.’
고진유는 그를 따라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극일무옥천지동이라…….’
벽에 쓰인 글을 보았다.
“가주님, 이곳이 바로 무옥천지동입니다.”
“여기는 무엇이 있는 곳입니까?”
“가주님께서 익히신 천무공의 나머지 후반부가 있습니다.”
고진유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오래전 아버지에게 익힌 천무공이 완전한 무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모르셨군요. 전대 가주님께서 말씀을 안 하신 모양이십니다.”
“……아마도 시간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가주님께서는 아직 어린 나이에 무옥을 얻지 못하신 상태라 후반부의 천무공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으로 생각하신 듯하군요.”
공강의 생각이 맞았다.
전대 가주가 천무공 후반부에 대해 알려주진 않은 것은 무옥을 얻지 못한 이상 익힐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천무공을 여인이 익힐 수 없는 것도 극일가의 자손 중 용맥은 사내아이에게만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후반부는 어디에 있습니까?”
“벽을 보시면 됩니다.”
‘벽이라…….’
고진유는 바닥에 앉으며 벽을 노려보듯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순간, 고진유의 눈동자에서 무옥의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뭐지?’
잠시 기다리자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에 따르던 공강은 전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고진유만이 극일무옥천지동의 벽에 그려진 천무공의 구결을 볼 수 있었다.
전반부는 극강의 방어력을 지닌 무공이라면, 후반부는 공격을 위한 초식이었다.
‘……대단하다. 천무공의 후반부를 제대로 펼칠 수만 있다면 일검에 일천의 상대를 제압할 수 있어.’
일검일천의 경지.
만일 이대로 된다면 사람의 무공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무신(武神)…… 신의 경지다.’
과연 후반부의 천무공을 펼칠 수 있을지 스스로 답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진유는 우선 천무공 후반부의 무공 구결을 외웠다.
익숙해질 때까지 무공을 숙달할 시간은 부족했다.
고진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에서 지켜보던 공강이 물었다.
“벌써 끝났습니까?”
“우선 외워두기만 했습니다.”
고진유는 간단하게 생각했지만 공강에게는 놀랄 일이었다.
천무공의 후반부는 보지 않아도 쉽게 외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진유는 무옥천지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
다신 중원 무림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생각한 시간보다 최소 두 시진 이상 예상보다 빨랐다.
‘용맥의 전인은 다르군.’
굳이 이유를 찾고자 한다면 그는 용맥의 전인이기 때문일 터.
도룡묘를 나섰다.
휘익.
고진유는 주위를 잠시 살핀 뒤 홀로 떨어져 있는 바위 끝에 올라섰다.
스르르릉-
허리에 찬 사의검의 자줏빛 검신이 더욱 맑고 또렷했다.
‘이것도 영향을 받는군.’
고진유도 검신을 보면서 만족스러웠다.
늘 자신의 무공이 어떠한지 스스로 반성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칭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얼마든지 멋진 검을 펼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천무공의 후반 일검식.
공공무하(空空無下).
사의검이 지나가는 검로의 뒤로 세상이 사라졌다.
도룡묘의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강은 미소를 지었다.
‘용맥의 전인이 다시 나오셨다.’
그는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 * *
화산까지 올라와서 그대로 내려갈 수 없었다.
잠시라도 사조 양군경을 조용히 만나 뵙기 위해서였다.
휘익!
창문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허어. 내가 창문을 열어둔 모영이군.”
양군경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지만 굳게 닫혀 있었다.
“…….”
바람 소리가 아니라면…….
양군경의 움직임은 부드러우면서도 빨랐다.
도의 자락이 흔들리며 뒤를 확보하면서 앞을 보자,
“송구합니다.”
“허허……!”
눈앞에 선 청년.
분명 고진유가 분명했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호정! 네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더냐?”
그는 절을 하는 고진유를 보며 반갑게 소리쳤다.
소문에 듣기로는 철혈궁을 무너뜨렸다고 했다.
그런 사손이 화산파에 몰래 나타난 모습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몰래 온 것이더냐?”
“네. 사조님. 아무도 모르게 찾아뵙고자 왔습니다.”
“일단 앉아라.”
“고맙습니다.”
양군경은 자리에 앉은 고진유를 보며 다시 놀랐다.
‘또…… 변했구나. 대체 어디까지 올라갈 생각인지…….’
고진유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손인 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뢰겠습니다.”
고진유는 먼저 황궁으로 올라간 이유부터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