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황궁 위로 어둠이 찾아왔다.
휘익!
세 개의 그림자가 어둠 속을 뚫고 황궁의 지붕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음…….’
미세하게 흐르는 기운.
인양은 곧바로 한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저기에 진유 형이 있을 것 같아요.]
인양은 달리면서 묵경과 녹림야검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들이 도착한 건물은 금의위군의 전각이었다.
‘앗, 진유 형이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인영.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왔구나.’
고진유는 아래로 내려선 세 사람을 보았다.
“혀어어엉!”
인양이 가장 먼저 다가섰다.
“잘 찾아왔네.”
고진유는 인양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바로 따라 내리던 녹림야검을 보며 반겼다.
“녹검 씨도 잘 왔어요.”
“넵, 공자님.”
묵경도 마지막으로 내려섰다. 그가 변복으로 황금 무복을 입은 고진유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냐? 혼자서 재미 보면 쓰나.”
“그래서 형을 불렀잖아요. 역시 서신을 제가 보낸 걸 아셨군요.”
“너하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그걸 모르겠어? 근데 여긴 어디야?”
묵경은 주위 건물을 둘러보았다.
“금의위군입니다.”
“그래? 무슨 일인지 들어볼까?”
“우선 안으로 들어가죠.”
“알겠다.”
고진유를 따라 세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혼자 황궁에 온 이유가 뭔지 말할 차례이지?”
“많이 궁금한 모양인가 봅니다.”
“당연하잖아.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는데, 안 그래? 최소한 우리에게는 말을 해야지.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야?”
“알겠어요. 내가 왜 조용히 여기에 왔는지 말해줄게요.”
고진유는 혼자 와야만 했던 이유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간략하게 삼황숙 명친왕이 황제를 죽이기 위해 극일천무신궁에서 살수를 불렀다고 했다.
묵경이 바로 물었다.
“명친왕이 극일천무신궁에서 살수를 불렀다는 건 딴 맘이 있는 게 아니냐?”
“맞습니다. 명친왕부에서 노리는 건 황위를 찬탈하기 위한 명분이지요. 황제가 죽은 틈을 타서 황궁을 장악할 계획이에요.”
“직접 상대하지 않고 무림인을 이용하다니.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 그의 주위에 있군.”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명친왕부를 칠 생각이야?”
“비슷하긴 합니다만 우리가 먼저 치는 것은 아닙니다.”
“음…… 우리가 할 일이 있으니 불렀을 테고. 지금부터 우린 뭘 하면 되는데?”
“내일 문친왕의 연회에 참석하는 황제의 호위를 맡을 겁니다. 분명 명친왕은 연회에서 극일천무신궁에서 온 그들을 이용해 시해를 시도하겠죠.”
“그가 사주한 걸 모르게 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죽으면 아마 군사를 일으킨 뒤 황궁을 장악할 계획이겠지요.”
“음…… 그럼…… 문친왕이 황제를 시해한 독박을 쓰겠군. 머리 좋은데?”
“우선 우리는 극일천무신궁에서 보낸 인물들을 막아내면 됩니다.”
“그것만 하면 되는 거야? 범인은 명친왕이잖아.”
“그를 잡는 데 순서가 필요해요. 무턱대고 몰아갈 수는 없어요. 그놈들을 잡아도 누명이라고 우기면 손을 댈 수 없으니까요. 우선 그와 관련된 인물들은 끊어내는 겁니다.”
고진유는 재차 설명이 이어졌다.
대장군 독중기와 명친왕의 관계, 그리고 그를 잡기 위해 탄핵을 준비한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대장군도 볼장 다 봤군. 불쌍하게도 하필이면 너에게 걸리다니. 그의 인생도 끝장이야.”
묵경은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여하튼 재미있겠다.”
“우선 도독을 만나보도록 하죠. 따라오세요.”
고진유는 세 사람을 데리고 도독 한청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살명전주 여형교는 오십 명의 수하들과 함께 명친왕부로 올라왔다.
궁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명친왕부에게 가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알 것이라 했다.
대충 올라오면서 예상이 되었다.
명친왕은 현 황제의 숙부였다.
그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황제가 될 수 있었던 황자였다.
‘훗. 억울하겠지. 황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었군. 수십 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명친왕의 자방이란 인물을 만났다.
장개지.
그를 전부 선생이라 불렀지만 전형적인 모사꾼이다.
여형교는 무인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을 선호하는 그에게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인물이 바로 장개지였다.
그가 찾아왔다.
“들어가도 되겠소?”
장개지는 말이 끝나는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자식이…….’
허락도 없이 들어선 그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오?”
“거사 날짜가 잡혔소이다.”
“잘됐군요.”
“내일 문친왕부에서 연회가 있을 것이외다. 그곳에서 계획한 대로 움직이면 될 것이오.”
“연회라…… 사람들이 많을 게 아니오?”
“그렇소이다. 그대들에게 문제가 될 게 있소이까?”
“…….”
여형교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문제라…… 문제가 될 건 없소. 사람들이 많다는 것뿐이니깐. 하지만 연회 중이라면 황제의 주위에 금의위나 동창에서 호위를 하고 있지 않겠소?”
“당신들은 무공이 강하다고 들었소이다.”
“연회에 모인 전부를 죽여달라는 것인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은 긍정이라.
여형교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자신들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오직 황제만 죽이면 될 뿐이었다.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것이군.”
“…….”
“알겠소이다. 그대들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그렇게 해주겠소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좋을 것이외다. 궁주님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하오.”
“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명친왕께서는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키시는 분이오.”
“좋소. 그렇다면 상관이 없겠지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연회장에서 황제를 죽이도록 하겠소이다.”
여형교의 미소에 살기가 묻어나왔다.
* * *
문친왕부의 대광장은 연회를 열기 위해 하루 종일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연회가 신시에 시작되려면 아직 이각이 남아 있었지만 세 명의 황숙들은 모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황제만 도착하지 않았다.
‘어허…… 아무리 황제라고 하지만 전부 나이 많은 어른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빨리 와야 할 게 아닌가.’
명친왕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허허. 황제가 조금 늦소이다.”
“이보게, 아우님. 아직 시간이 남았다네.”
일황숙인 문친왕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굳이 연회를 열 생각이 없었지만, 아우 명친왕의 권유에 의해 하는 수 없이 연회를 열었다.
“하…… 됐소이다.”
예전부터 문친왕는 몸을 사렸다.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는 어떻게 죽을지 모를 일이기에 살기 위해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다.
명친왕은 그런 그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이 자식은 왜 빨리 안 와?’
문친왕부로 향하는 황제의 행렬은 검소했다.
황제가 탄 마차의 호위는 금의위와 동창에서 맡았다.
황룡마차의 네 방향을 고진유와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이 맡았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창문 사이로 고진유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대단한 젊은이로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는 건 다른 이유라 했지만 무림맹에서 황궁으로 와준 게 고마웠다.
어제 순비와 함께 영화 옹주를 만났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녀들이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거의 잊고 지내던 아내와 딸이지만 그녀들은 원망하지 않았다. 황제가 잊지 않고 찾아온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올해 영화 옹주의 나이는 십팔 세.
그녀의 짝을 찾아주어야 했지만 잊고 있던 탓에 조금 늦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고진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그의 여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세 명이 있다고 했다.
‘천하제일인에게 세 명의 여인이라면 없는 편이지.’
황제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가 더 고민되었다.
다각다각.
그때 도독 한청이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폐하, 문친왕부에 도착했습니다.”
“알겠소.”
황제는 심호흡을 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했다.
‘휴우…… 긴장을 풀어야겠지.’
황제의 행렬은 문친왕부로 점점 가까워졌다.
후다다닥!
문친왕의 정문에 있던 호위 병사가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문친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께서 온다고 하니 나가봐야 하지 않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세 명의 황숙들은 왕부의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명친왕은 다가오는 황제의 행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 겨우 백 명 정도의 금의위를 데리고 오다니 미쳤군. 하긴 이곳이 사지(死地)가 될 줄은 모르고 있겠지.’
황룡마차가 정문에 멈췄다.
도독 한청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며 아래로 내려섰다.
문친왕이 다가서며 고개를 숙였다.
“누추한 곳에 왕래하시어 고마울 따름이옵니다.”
“일황숙의 절일이지 않소이까. 당연히 조카인 본인이 축하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고맙소이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황제는 그를 따라 들어가기 전에 문친왕의 옆에 선 명친왕과 동친왕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삼황숙과 사황숙께서도 오셨군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황제. 그동안 많이 강녕해졌습니다.”
“사황숙, 고맙소이다.”
황제는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숙부들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동친왕이었다.
“황제께서는 그만 들어가시지요.”
“삼황숙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왕부에 모인 많은 인물이 황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문친왕은 연회석에 올라선 뒤 상석을 내밀었다.
“황제께서는 여기에 앉으시지요.”
“아닙니다. 오늘은 본인이 조카 된 마음으로 왔습니다. 일황숙께서 앉도록 하십시오.”
“허허, 알겠소이다.”
문친왕은 자리에 앉으면서 손짓을 했다.
조용했던 왕부에 다시 연회장에 음악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술병을 들었다.
“조카인 제가 숙부께 생신주를 올리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황송할 따름이외다.”
문친왕은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황제는 이번에는 명친왕에게도 술병을 내밀었다.
“삼숙께서도 한잔 받으시지요.”
“고맙소.”
스윽.
명친왕은 한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 장면을 본 시선들이 흔들거렸다.
도독 한청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 하려고 했다.
[가만히 계시지요.]
한청의 귀에 전음이 들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고진유가 서 있었다.
[원래 죽을 때가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황제께서도 아무렇지 않습니까.]
그의 전음처럼 당사자인 황제는 미소를 띠며 술을 따랐다.
“숙부께서는 늘 건강하십시오.”
“조카인 황제도 건강하시게.”
“고맙습니다.”
황제는 웃음을 보인 후 그의 옆에 앉은 동친왕에게도 술을 따랐다.
연회의 분위기는 좋았다.
한두 잔의 술이 들어가고 가무를 보면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역시…….’
고진유는 주위를 살피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연회장 주위에 살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고진유는 바로 전음을 보냈다.
[모두 알아차렸죠?]
[공자님, 연회장 중간중간에 이상한 놈들도 하나둘씩 섞여 있습니다.]
[녹검 씨는 수상한 놈들이 움직이는 즉시 사정을 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연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기 시작했다.
명친왕은 잠시 자리를 비운 황제를 찾았다.
‘하필이면 중요한 순간에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그는 한청을 보며 물었다.
“황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저기 오십니다.”
황제는 금의위와 함께 다가왔다.
“황제는 술이 약한 듯하외다.”
“오랜만에 많이 마신 것 같군요. 이젠 괜찮습니다.”
황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뒤에서 한청은 주위를 살폈다.
황제를 모시고 갔던 고진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피는 중인가?’
스윽.
명친왕이 술잔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형님과 조카와 함께 술을 마시니 정말로 기분이 좋소이다. 좀 더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검무가 어떻겠소이까?”
“하하하! 당연히 좋지요. 근데 형님께서 검무를 추시기에는 무리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출 수는 있겠지만 수하 중에 검무를 잘 추는 녀석이 있다네.”
명친왕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휘익.
연회 상단 앞으로 양손에 검을 든 채 내려섰다.
사내는 매서운 시선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황제께 검무를 펼쳐 보아라.”
“넵.”
사내는 굵고 짧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 휙!
채애애앵!
사내의 검무는 강인했다. 여인의 화무와 달리 빠르고 간결하며 힘이 넘쳤다.
중간중간에 박수와 함께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이 나왔다.
“와우…… 정말 멋진 검무다.”
무인이라면 사내는 검무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날 정도였다.
‘훗. 겨우 이 정도에 넋을 놓았군.’
살명전주 여형교는 주위의 반응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이젠 끝을 내주마.’
그의 신형이 점점 황제를 향해 앞으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