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그녀가 펼친 무공은 천무공이라고 부르기에는 정확하지 않았다.
천무공은 극일가의 사내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기에.
해서 극일천주는 천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고화유를 위해 천무미화공(天武美花功)을 새롭게 창안했다.
하지만 철혈사존은 두 무공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천무공을 펼친 고화유를 고진유로 착각했다.
번쩍!
그녀가 펼친 검미에 섬광이 터져 나왔다.
강렬하게 퍼져 나간 빛에 철혈사존이 펼친 십이 성의 혈강파장이 무(無)로 돌아가며 그를 뒤로 밀어냈다.
“커어억……!”
몸 내부에 충격이 받자 내력이 흩어지며 휘청거렸다.
‘천하…… 제일인이 맞다.’
자신이 익힌 무공은 극일천무신궁에서 익힌 혈문사무장(血門死武掌).
천마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확신할 만큼 강한 무공이었다.
스팟-!
하지만 한 줄기 섬광이 지나간 뒤, 그의 허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우욱.”
다시 비명이 나왔다.
동시에 기가 단숨에 빠져나갔다.
철혈사존은 몸이 한쪽으로 무너지는 것을 간신히 잡았다.
‘이런……!’
얼른 반대편 다리에 힘을 주고자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질 듯했다.
‘망…… 할…….’
상대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푸우우욱.
정확히 심장을 향해 검이 박히고, 철혈사존의 몸이 그대로 넘어갔다.
쿠웅.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그는 땅에 쓰러졌다.
* * *
철혈사존의 죽음과 함께 철혈궁의 멸문이 중원에 퍼져 나갔다.
무림맹주 고진유는 일백 명과 함께 철혈궁을 완벽하게 멸문시켰다.
사파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함구했다.
예전이었다면 분명 사파 연합에서 무림맹에 시비를 따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이 친 것은 사파의 철혈궁이 아니라 극일천무신궁의 세력이었다.
“훗. 겨우 철혈궁 하나가 사라진 것으로 시끄럽군.”
나하중은 수곡자의 보고를 받았다.
이미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궁주님,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
나하중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런…….’
수곡자는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았다.
척.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 부복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소신이 주제넘은 말을 했사옵니다.”
“……수곡자, 이번 한 번만이다. 본좌에게 가르치는 말은 하다가는 자네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죽을 놈들이 죽은 것뿐. 누구나 죽는다. 다만 언제 죽느냐가 다를 뿐이지.”
“…….”
“그놈들의 명이 그것까지밖에 안 된 것이지.”
‘……달라지셨다.’
수곡자는 가슴이 무거웠다.
나하중은 점점 냉정하게 변해갔다.
예전에는 조금이나마 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궁주에 오른 뒤 그는 마치 신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수곡자. 자네가 할 일은 그저 본좌의 명을 따르는 것이다. 알겠는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곡자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이제 그는 오로지 궁주의 명을 따르기만 하는 인형처럼 움직여야 했다.
“살명전은 도착했는지 모르겠군.”
“지금쯤이면 명친왕부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클클…… 조만간 황성에서 재미있는 소식이 들려오겠군. 그렇지 않은가?”
“넵. 맞습니다.”
“황성의 일이 정리가 되는 대로 우리 또한 정파 중 한 곳을 칠 것이니 어디가 좋은지 정해 놓게. 철혈궁이 사라졌으면 우리도 대응을 해줘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적당한 곳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그만 나가보게.”
나하중은 그가 대전 밖으로 완전히 나갈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았다.
‘쯔쯔. 그저 따르기만 할 뿐이면 될 것을. 전혀 어려운 것도 없을 텐데.’
그는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천…… 이것들은 왜 자꾸 모이자고 하는 것인지…….’
비천의 목적은 극일천주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극일천주가 스스로 물러나면서 비천을 만든 목적 중 하나가 사라졌다.
신궁이 세워진 이상 비천은 조용히 있으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궁주인 자신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나를 계속해서 제어하려고 한다면…… 네놈들을 살려둘 수 없겠지…….’
나하중의 눈동자에 살기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 * *
드륵.
문이 열리며 황포를 두른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여윈 얼굴에 가느다란 두 눈이 주위를 살폈다.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인물.
대장군 독중기와 서창 독주 유기가 허리를 숙여 황포 노인을 맞이했다.
“왕야를 뵙습니다.”
현 황제의 삼숙이며 명친왕 주예후가 바로 그였다
명친왕과 함께 자방이라 알려진 장개지가 가까이 따랐다.
팔자로 자란 콧수염에 이마가 툭 튀어나온 모습이 전형적인 모사의 얼굴이었다.
명친왕의 모든 계획은 장개지의 머릿속에서 세워졌다.
네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대장군 독중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소신들을 부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대장군, 우리의 부탁대로 무림인들이 도착했다네.”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습니다.”
극일천무신궁에서 보낸 무림인들이 한 시진 전에 도착했다.
독중기가 다시 물었다.
“왕야, 무림인들이 왔다면 계획대로 움직여야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 황제가 죽을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
“드디어 왕야께서 빼앗긴 황위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훗. 축하는 이르지 않은가?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이번에는 유기가 그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이르지 않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왕야께서는 황제가 되실 것입니다.”
“황제라…… 듣기만 해도 벌써 기분이 좋군. 하하하하!”
주름이 많은 그의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독중기는 굳이 무림의 인물들을 부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왕야, 군부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무림인이 아니라도 모두를 죽일 수 있습니다.”
“허어. 대장군, 그건 아니라네. 물론 죽일 수 있지. 하지만 그건 다른 인물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네. 항상 조심해야 해.”
“맞습니다. 장 선생의 계획대로 황제를 죽인 후 명분을 만들기 위해 무림을 이용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서창 독주 유기도 장개지가 세운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중원 최고의 문파.
황제를 죽여줄 수 있는 간 큰 문파로 극일천무신궁과 협상을 했다.
명친왕이 그들에게 요구한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당금의 황제를 죽여달라는 청부.
그 대신 보답으로 극일천무신궁에서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했다.
이에, 황제를 죽이기 위해 극일천무신궁에서 보낸 무림인들이 도착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면 당장에라도 황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이었다.
“왕야, 무림인들이 무작정 황궁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기습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대장군, 그것 또한 미리 계획을 세워 놓았다네. 황제가 건청궁에서 나올 때 움직이면 된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황제가 밖으로 나오도록 만들면 된다는 것이지.”
“어떻게 하심이…….”
“조만간 문친왕부에서 연회를 열 것이네. 형님이 연회를 연다면 황제도 참석을 할 수밖에 없을 걸세.”
“연회에서 황제를 기습할 것입니까?”
“후후후! 형님은 오래 사셨네. 황제를 죽인 무림인들의 배후자를 누군가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생각이십니다.”
“여기 장 선생의 계획이라네.”
독중기는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장 선생의 계략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구려.”
“아닙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가능한 방법입니다.”
장개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연회는 이틀 뒤 열릴 것입니다. 대장군께서는 군사들을 준비하셨다가 황제가 죽는 순간 군사들과 함께 황궁으로 빠르게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이번에는 유기를 보았다.
“그리고 군사가 황궁으로 들어오는 즉시 독주께서는 장인태감과 금의위를 제압하도록 하시지요.”
“알겠소이다. 장 선생의 계획대로 움직이겠소이다.”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보였다.
명친왕은 기분 좋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가 원하는 것은 복수였다.
황위를 물려받는 것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 황위를 받아 황제가 되어야 했다.
부황의 아들 형제 중 가장 뛰어난 황자는 자신.
누구라도 자신이 황위를 물려받을 게 확실했다.
‘하지만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황위를 뺏겼다.’
큰형인 황제는 황위에 오른 뒤 약속했다. 다음 황위는 아들이 아닌 자신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하지만 거짓이었다.
그들 부자에게 농락당한 게 확실했다.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황위를 되찾아야 했다.
‘모두 죽일 것이다. 내가 황위에 오르면 안 된다고 한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구족을 멸할 것이니라!’
일 갑자를 넘은 그이지만 복수의 감정은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문친왕 절일 연회에 참석을 원하는 초대장을 받았다.
연회의 장소는 문친왕부였다.
도독 한청은 심각했다.
드디어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
문친왕은 조용한 성정을 지녔다.
그의 절일이라 하여도 문친왕부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연회를 열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회를 열면서 황제를 초대했다.
연회를 여는 이유는 나이가 많아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기에 한 번은 꼭 조카인 황제를 모시고 연회를 베풀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황제가 참석하려면 황궁을 나서야 한다는 것.
도독 한청은 고민에 잠겼다.
“맹주, 그들이 움직이는 것 같소이다.”
“그렇군요. 무슨 계획인지 알겠습니다. 연회에서 시해하겠다는 것이군요.”
“참석하지 않은 게…… 좋지 않겠소이까? 황궁 밖이라 너무 위험합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소이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조만간 그들은 살수를 보낼 것이지요.”
고진유는 시선을 돌려 황제를 마주 보았다.
“폐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맹주의 말이 옳소이다. 계속 긴장한 채로 지내는 것보다 빨리 매를 맞는 게 낫지 않겠소. 연회에 참석하겠소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의 옥체는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맹주께서 곁에 있으니 전혀 두렵지 않소이다.”
도독 한청은 여전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맹주가 황제의 호위를 서겠지만 적의 무공과 인원이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었다.
“도독께서는 걱정이 있는 모양이군요.”
“맹주를 못 미더운 게 아니라 홀로 폐하를 호위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살수들이 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도독께서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오늘이나 내일 정도이면 본도의 의형제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고진유는 철혈궁이 무너지기 하루 전날 묵경에게 비밀리에 전서를 보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전서.
내용은 한 줄로 단순했다.
황궁과 삼(三).
묵경은 전서를 보낸 인물이 갑자기 사라진 고진유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었다.
“맹주의 의형제들이라면 친협을 말하는 것이오?”
천하제일인 화산도협의 친협들에 대해 그도 잘 알았다.
‘그들이 온다면…….’
한청은 안심이 되었다. 더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면 문제가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황제께 고했다.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맹주께서 계신다면 세상 누가 오더라도 안전하실 것입니다.”
“알고 있네.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문친왕부에 알리게.”
“황명을 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 * *
멀리서 황궁을 보는 세 명의 시선.
무림맹에서 올라온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이었다.
“묵경 형, 여기에 진유 형이 있는 게 맞아요?”
“맞아. 분명 여기에 있어.”
인양은 이상했다.
소문에 의하면 철혈궁을 멸문시킨 인물도 무림맹주라 했다.
“그럼 철혈궁은요?”
“누가 있겠어? 그들이 무림맹주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화유 누나라는 말인가요?”
“그럴걸? 화유 공녀라면 분명 진유 아우와 같은 무공을 익혔을 게 분명해. 둘 다 천면변환공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아하…… 화유 누나구나. 어쩐지 이상하더라. 진유 형과 함께 무림맹에서 나간 인물도 없었잖아요.”
“화유 공녀와 함께 움직인 그들은 아마 극일가의 무인들이 맞을 거야. 대단한 집안이야. 겨우 백 명으로 철혈궁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거든.”
묵경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그는 철혈궁을 쳐야만 했던 이유 또한 알 듯했다.
“황궁에 온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 봐. 그래서 중원의 시선을 철혈궁으로 돌린 것이지.”
“누구에게 숨긴다는 겁니까?”
녹림야검이 물었다.
“당연히 극일천무신궁이지. 그렇군. 진유 아우가 황궁에 온 건 그놈들과 연관이 있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 아무도 몰래 갈 이유가 없어.”
“그럼 우리 행적도 숨겨야지 않습니까?”
“그래서 변장했잖아.”
“오, 그러네요.”
세 사람은 황성으로 올라오는 동안 정확한 사정을 몰라 일단 변장한 상태였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려면 한 시진은 더 남았다.
“어두워지면 궁에 들어가자.”
“진유 형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황궁은 넓다고 들었는데. 일일이 찾아다닐 수 없잖아요.”
“다른 말이 적혀 있지 않았으니 뭐. 황궁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모양이다.”
“알겠어요.”
“그럼 그때까지 황성 구경이나 해볼까? 우리가 지금 아니면 언제 여길 오겠어?”
“맞습니다. 일단 황성이라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지 않습니까?”
세 사람은 순간 입맛을 다셨다.
“가요!”
휘익.
그들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