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305화 (305/425)

305화

‘음…… 여긴가?’

고진유는 가느다랗게 물이 흐르는 개천을 지나기 위해 징검다리를 하나씩 밟으며 가볍게 건넜다.

십여 장을 걸어가자 마당이 내려다보일 정도의 낮은 담이 있는 문 앞에 섰다.

황성으로 들어온 뒤 고진유는 잠시 따로 움직였다.

이곳에서 유천정(儒天亭)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이 없는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 기다리자.’

고진유는 잠시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고목 아래에 앉을 수 있는 바위가 보였다.

이각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흠.’

그때, 실개천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중년 사내와 함께 노인이 유천정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분인가 보군.’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노인과 중년 사내도 고목 아래에 서 있는 청년을 보았다.

중년 사내는 노인을 호위하듯 앞으로 나섰다.

‘무인.’

고진유는 그의 몸에 흐르는 내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중년 사내가 경계를 하며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있는가?”

“유천지에 볼일이 있습니다.”

“……!”

유천지(儒天地).

정확히는 극일가의 무량삼천지인 중원유천지.

중년 사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유천정이라 부르지 않고 유천지라 부르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그대의 신분은?”

“여기 있소이다. 이것을 보여주면 되겠지요?”

고진유의 손에는 이미 극일가주의 신패가 들려 있었다.

신패를 알아본 중년 사내의 눈이 커졌다.

“가주령패…… 혹시 그대가…… 무림맹주이십니까?”

중년 사내는 고진유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그가 듣던 모습과 달라 보였다.

슥슥.

고진유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천면변화공…….”

“바로 알아보는군요. 본도가 무림맹주이외다.”

“…….”

중년 사내가 뒤로 물러나자 그의 자리로 노인이 다가섰다.

“가주령패가 맞군요. 유천지의 노신 적소운이 가주님을 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진유라 합니다.”

“금천지주의 말처럼 그분과 닮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분을 만나보셨군요.”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그렇군요.”

“극일가에서 그분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걸 저에게 주신 뒤 떠나셨습니다.”

“전 가주님께서는 진정한 영생을 얻으셨습니다.”

그는 두 손을 모은 채 전 가주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들은 여전히 문밖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 * *

무량삼천지로 알려진 유천지는 겉보기에 평범한 작은 장원이었다.

유천지주 적소운은 마주 앉은 고진유를 유심히 보았다.

“극일천이 더는 중원 무림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것이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늘 극일천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신 분이었지요. 하지만 그 자리에 극일천무신궁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 전주가 그만큼 욕심이 많다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보다는 그의 배후에 있는 인물들이 원하던 바일 겁니다.”

“비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극일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 극일천의 힘을 그대로 승계하겠다는 뜻이 아닐런지요.”

“가주님께서는 그대로 두실 생각입니까? 가만히 두기에는 아깝지 않습니까?”

그의 말처럼 극일천무신궁에는 극일천주를 따르는 인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알아서 판단할 것입니다. 신궁에서 나올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나왔을 테지요.”

“…….”

고진유의 말이 맞을 수 있었다.

천주를 따르던 인물들이라면 그가 없는 이상 극일천무신궁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대로라는 건, 극일천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소청입니다.”

문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너라.”

드륵.

문이 열리며 젊은 여인이 들어섰다.

“할아버지, 손님이 왔다고 들었어요.”

“여기 계시는 분이시다. 인사를 드려라. 소신의 손녀입니다.”

“그렇습니까?”

여인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가 누구인가?

현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할아버지였다.

근데…….

할아버지가 젊은 사내에게 높임말을 쓰고 있었다.

“안…… 녕하세요. 적소청이라 합니다…….”

“적 소저, 반갑소이다. 본도는 고진유라 하오.”

“……천하제일인.”

그녀가 아무리 여인이라 해도 중원인이라면 고진유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맞소이다. 본도이외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서며 마치 신기하다는 듯 고진유를 자세히 보았다.

무림맹주이자 화산도협으로 알려진 사내.

‘천하제일인이라고 하기에 무시무시한 사내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어.’

무림맹주이자 천하제일인이라는 고진유의 신분이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천하제일인이라는 무림인에게 말을 낮출 이유가 있던가?

“저…… 근데…… 할아버지께서…… 말을 낮추시는 건가요?”

“하하.”

고진유의 신분을 모르기에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소청아. 우리 가문이 어디라고 했느냐?”

“유천적가입니다.”

중원 유림의 하늘이라 불리는 가문.

중원이란 땅에서 나라의 주인은 항상 변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라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인물들은 무인들이 아니라 문인들이며 유생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지도자이자 스승인 인물이 바로 유천적가의 가주이었다.

“맞다. 그렇다면 전에 내가 이야기 한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본 가가 모시는 가문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디라고 했지?”

“……극일가라고 했습니다.”

“잘 알고 있구나. 극일가를 모시는 세 곳의 가문은 어디이더냐?”

“귀주금천지와 무옥천지, 그리고 유천지라 했어요.”

“맞다. 그 세 곳을 무량삼천지라 부르며 세 가문들은 극일가를 모시고 있지. 이제 이분이 누구신지 알겠느냐?”

적소운이 더는 말을 하지 않아도 고진유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극일가의…….”

“…….”

“이분께서 극일가의 가주이시군요.”

적소청은 말을 하면서 고진유를 자세히 보았다.

한번 만나고 싶은 인물이었다.

극일가의 가주.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다. 드디어 오늘 그와 마주 섰다.

“적소청, 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적 소저, 한 번 더 인사를 하는군요. 반갑소이다.”

고진유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아…….’

그와 인사를 나눈 그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신형에서 흐르는 기운은 신비스러웠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극일가의 가주라는 사실을 떠나 그는 중원 최고의 사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에게는 여인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할아버지, 제가 얼른 차를 준비하겠어요.”

“그렇게 하려무나.”

그녀는 밖으로 나가면서 생각했다.

‘서너 명의 여인이 있다는 건 한 명 더 있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해.’

자신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적소운은 밖으로 나간 그녀를 본 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가끔씩 놀러오곤 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는 고진유가 인사차 들르기 위해 유천지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 이제, 가주께서 소신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요?”

“황제가 무림맹에 사람을 보냈더군요.”

뜬금없이 황제의 이야기가 나왔다.

“누구를 보냈다는 것입니까?”

“금의위가 찾아왔더군요. 나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황제께서…… 가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흐음…… 몰랐습니다.”

그 또한 황성에 대해 정보를 얻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무림맹에 직접 금의위를 보낸 사실은 처음 알았다.

“황제가 사람을 보냈다고 했지만 가주께서 직접 올라오셨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단번에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황성에 올라온 건 황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명친왕부와 신궁에서 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했습니다.”

적소운의 깊은 주름이 더욱더 짙어졌다.

“허허. 그들이 하지 말아야 짓을 하려고 하는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황성에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게 확실했다.

혹시나 이번 일에 유림에서도 관련된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가주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요?”

“될 수 있는 한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음……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렇게는 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명친왕부의 일만으로 끝이 나면 가장 좋겠지만, 그들과 군부가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 부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명친왕부와 극일천무신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명친왕부와 군부의 관계를 끊어내야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본도도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고진유는 그와 생각과 같았다.

조용하게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는 먼저 군부를 제거해야만 했다.

대장군이자 병조상서 독중기.

그를 내치는 일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를 암살하는 것.

“만일 그를 죽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가 사라지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닐 듯합니다. 그를 따르던 인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를 죽인 배후로 황제에게 시선을 돌릴지 모릅니다.”

“암살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명친왕부에 군사를 일으킬 명분을 줄 수도 있습니다. 좋은 방향보다는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지요.”

“역시 좋은 방법은 아니군요. 결국 군부가 문제군요.”

“맞습니다. 그들은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명친왕부에서 군부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사이를 제일 먼저 끊어놔야겠습니다.”

“가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군부를 장악하도록 하죠.”

문제없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대장군 독중기의 자리에 황제의 인물이 올라서야만 했다.

“그를 물러나게 할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반발을 줄이고 정당하게 군부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탄핵입니다.”

“탄핵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죄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대장군 같은 인물은 굳이 털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적소운은 명확하게 말할 정도로 확신했다.

“이번 일에 대해 지주님께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유천지가 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탄핵을 할 때 반발이 없도록 그와 관련된 모든 인원을 잡아냈으면 합니다. 그것만 준비해 주신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님의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대략 계획이 세워진 것 같으니 본도는 금의위 도독을 만나러 가야겠소이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이어 적소운이 바로 일어섰다.

“벌써 가시고자 하십니까?”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지요. 지주께서 증거를 찾는 대로 연락 주시면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휘익.

고진유의 신형이 유천지에서 사라졌다.

* * *

극일천무신궁의 대전으로 들어선 인물.

긴장한 표정인 영휴당주 욱일진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중앙 대전을 지나 신궁좌를 향해 걸었다.

쿵.

부복을 하며 숙인 그의 큰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감사합니다.”

그는 부복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명친왕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본 궁의 뜻을 수락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하겠지. 그는 욕심이 많은 인간이다. 우리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나하중은 그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황제의 자리일 뿐이지. 멍청하게도 그 후의 일은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살명전을 보내주도록 해라.”

“궁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욱일진은 서너 걸음 뒤로 걸은 뒤 대전을 물러났다.

그가 사라진 동시에 수곡자가 앞으로 나섰다.

“궁주님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무림맹에 맹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화산도협이 어디에 갔다는 것인가?”

“그건…… 그의 행방에 대해서 아무도 모릅니다.”

“대체 똑바로 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더냐?”

“송구하옵니다. 며칠 동안 맹주전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

“그의 친협들에게도 말없이 사라진 모양입니다.”

나하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갑자기 사라진 고진유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인물들에게도 밝히지 않고 사라졌다.

후다다닥!

그때, 대전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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