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신궁주 나하중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완전히 속았군. 화산도협이 천주의 아들일 줄이야.”
“신궁주님, 그때의 소문이 맞았습니다. 유모들이 했던 말. 서로 다른 아기 같다고 했습니다.”
“…….”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렸던 말.
‘쌍둥이였어.’
나하중은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알 듯했다.
스윽.
그가 일어나자 수곡자는 옆으로 물러났다.
“수곡자, 앞장서게. 천주궁에서 가서 천주를 만나야겠어.”
“알겠습니다.”
나하중은 앞장선 그를 따라 천주궁으로 향했다.
천주궁은 영산의 깊은 곳에 있었다.
‘이건…….’
두 사람은 천주궁의 입구 실개천에서 멈췄다.
“신궁주님, 진법이 사라졌습니다.”
“…….”
실개천 너머는 진법으로 항상 운무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들의 앞에 운무가 사라지고 천주궁이 그대로 나타났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수곡자는 먼저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는 빈 가구들만 있을 뿐 개인적인 물품들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떠났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가지고 갔군.”
천주의 방뿐만 아니라 천화공녀가 지낸 건물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나하중도 안으로 들어서면서 주위를 살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천주께서 떠난 모양입니다.”
“떠났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극일천을 떠난 것 같습니다. 신궁을 세우도록 허락하신 것도 이곳을 떠나고자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와 인연을 끊고자 하는 것이겠군.”
나하중은 천주의 뜻을 알았다. 그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겼다.
“수곡자, 더 좋은 일이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
“괜히 뒷방에 있는 늙은이의 눈치를 보는 듯했지.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신궁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수곡자는 그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천주가 사라진 후 과연 극일천의 유산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나하중은 인상을 쓴 채 천주궁을 바라보았다.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수곡자, 이곳을 전부 태워라.”
“…….”
“그가 우리와 사이를 끊고자 한다면 본좌 또한 그와 끊을 것이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 *
화르르르-
천주궁이 불타올랐다.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나하중은 움직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그의 백의가 강렬한 화염에 붉게 비쳤다.
이것으로 모든 인연을 끊었다.
스스로 사라져 간 천주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변했다.
이젠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스으윽.
나하중은 수염을 쓰다듬고 대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크하하하!! 드디어 내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도다!”
* * *
극일천무신궁은 영산의 중턱에 세워져 있었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연상되듯 극일천무신궁은 웅장했다.
산문을 지난 뒤 중턱으로 오르는 길에 극일천무신궁을 본 모든 이들에게서 감탄이 나왔다.
“대단하군.”
묵경은 천검궁도 가보았다.
그곳 역시 중원 최고의 문파답게 장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천검궁도 이곳에 비하면 초라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거야?”
“네.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곳이 대단한 줄은 알았다만…… 이건 뭐…… 대단하다고 말을 할 수 없을 정도군.”
묵경은 일행과 조금 떨어진 두 남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친구…… 안 되겠구만.”
“푸흐, 서로 잘 통하는 모양인가 보죠.”
“그래? 근데…… 왜 나한테 이야기 안 했어?”
“뭘요?”
“누나가 있다는 말.”
“아시잖아요. 제가 기억을 잃었다고.”
“아하. 맞지. 내가 또 깜빡했다.”
“묵경 형은 누나가 원하는 사내상이 아닙니다.”
“뭐? 내가 어때서?”
“형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누나는 예전부터 다정하고 감성적인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
장두총은 피식 그를 보며 웃었다.
“야, 두총, 왜 웃어?”
“묵경 형은 다정이 아니라 만인의 연인이잖아요.”
“흥.”
“신궁에 가면 천검봉 금 소저가 왔을지도 모르죠.”
“그, 그냥 그렇다는 말이잖아. 말뜻을 몰라.”
“그렇습니까? 후후후.”
휙.
묵경은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선두에 있는 고진유와 북소연의 곁으로 붙어 섰다.
“진유 아우, 근데 사람들이 왜 안 보여? 분명 마을에서는 많았잖아.”
“우린 지름길로 갑니다. 돌아서 가야 하지만 조용하게 가는 게 좋잖아요.”
“우리가 지름길로 올라간다면 혹시나 다음에 필요할 때 이 길을 사용하지 못하지 않나?”
“그렇긴 하네요.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겁니다. 올라가죠.”
툭툭.
극일천무신궁의 후문에서 경비를 서던 사내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문에서 근무를 서야 재밌는 구경거리들이 많이 있었다.
“에이, 하필이면 후문에 배치가 될 줄은…….”
“조금만 참아. 개파식은 두 시진 뒤에 열리잖아. 그때 가도 충분히 볼 수 있어.”
“휴우, 알겠네.”
후문 호위들은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였다.
후문 아래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거기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우린 무림맹에서 왔소이다.”
“……!”
후문 호위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행을 보았다.
“당신들이 무림맹에서 왔다는 말이오?”
“그렇소이다. 여기 초청장이 있소.”
인양은 초청장을 받은 뒤 후문 호위에게 보여주었다.
-무림맹 맹주.
분명 개파식 초청장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웬 중년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본인은 지옥혈림의 혈성존이다.”
“……!!”
혈성존의 초청장을 본 후문 호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 이 길은 어떻게 알고 오셨소이까? 여긴 함부로 올 수 없는 곳입니다.”
“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살았거든요.”
“…….”
일행 사이에서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소저,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요. 천화라고 하면 다 아는데.”
“……!!”
‘천화공녀? 극일천주의 외동딸이라고?’
‘미치겠군. 대체 무슨 일이야?’
후문 호위 명비는 정신이 없었다.
“저…… 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상부에 보고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명비는 얼른 이곳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정문으로 달려갔다.
반각이 지났을 때였다.
후문으로 십여 명의 인물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수곡자는 열린 후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천화공녀…….’
그녀가 분명했다.
‘정말로 쌍둥이였군.’
고진유와 고화유. 이름이 비슷하지만 단 한 번도 쌍둥이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중원에 같은 이름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휴우…….’
그는 후문에 다가서기 전에 호흡을 했다.
굳었던 얼굴 근육을 풀며 미소를 띤 얼굴로 고화유의 앞으로 다가섰다.
“천화공녀께서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천주궁에 다녀온 모양인가 봐요?”
“…….”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본녀가 떠났는지 몰랐을 텐데. 안 그런가요?”
“…….”
수곡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맞아요. 극일천이 사라진 이상 아버지께서 천주궁에 더 있는 것도 불편하시다고 해서 나왔어요.”
“나가시더라도 말씀이라도 남겨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극일가에 돌아가신 것입니까?”
“그래요. 조용히 지내고 싶으시다며 본 가에 돌아가셨어요. 난 동생과 함께 마지막으로 개파식을 보고 난 뒤 가려고요.”
“…….”
그녀가 분명 화산도협을 보며 동생이라 했다.
확인차 다시 물었다.
“동생이란 분이…… 무림맹주 화산도협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알고 있겠지만 제 쌍둥이 동생이 맞아요.”
“…….”
그의 신분이 이제 확실해졌다.
“왜…… 그에 대해서 숨겼습니까?”
“글쎄요. 그건 아버지께 물어보세요. 나도 몰랐으니까.”
수곡자는 시선을 돌려 고진유를 향했다.
“맹주께서는 신분을 알면서도 극일천과 싸웠던 것이었소?”
“속이지는 않았소이다. 본도는 망혼대법으로 그동안 기억을 잃었을 뿐이외다.”
“망혼대법이라 했소?”
“그렇소이다. 들어봤을 겁니다. 본도도 얼마 전에 기억을 되찾았소이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수곡자는 망혼대법이라 말에 이해가 되었다.
“바로 말씀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번에 몰라뵈어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공자라…… 극일천무신궁의 인물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소이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죄송합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 * *
고진유와 고화유는 불에 탄 천주궁 앞에 내려섰다.
개파식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행이 휴식을 가지는 동안 고진유와 고화유는 천주궁에 찾아가 보고 싶었다.
고진유는 피식 웃음이 났다.
“몰래 나온 탓에 화가 많이 난 모양입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사람이 대범하지가 못해서 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에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봤는데.”
비록 적이지만 어릴 적 나하중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적이 있었다.
스윽.
그때, 뒤로 나타난 기척을 느꼈다.
“그대가 천주의 아들이자 무림맹주 화산도협인 모양이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진유는 천천히 돌아서며 앞으로 다가오는 백의노인을 마주 보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그 또한 여전히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신궁주이시군요.”
“극일천과 죽일 듯이 싸우던 인물이 천주의 자식일 줄은 몰랐소.”
“지금이라도 알면 되지 않겠소이까?”
나하중은 나란히 선 두 남매를 보았다. 천주에게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자신이 우스웠다.
“후후후. 쌍둥이라니. 천주가 뒤에서 이런 황당한 계획을 세웠을 줄이야. 정말 놀랐소이다.
“당신이 놀랐다고 하니 일단은 성공한 것 같소이다.”
“철갑을 열었다고 했을 때 조금이라도 의심을 해야 했는데…… 단지 이상하다고만 생각을 했지.”
“신궁주의 감도 많이 떨어진 것 같군요. 본도라면 바로 알았을 것이지요.”
“클클, 그러게나 말이외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다 보니 그런 것 같소이다.”
“말씀 잘하셨소이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조용하게 지내면 좋지 않겠소이까?”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못할 일은 없지요. 무림을 새롭게 정리하는 게 본인의 일이외다.”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대가 본 신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보시오?”
나하중은 한 걸음 더 고진유의 앞으로 다가섰다.
한 자 정도의 앞에서 마주 설 만큼 가까이 붙어 섰다.
“신궁주는 본도가 못할 것이라 보는 모양이군요.”
“가능하겠는가?”
스윽.
이번에는 고진유가 두 사람의 간격 사이를 좀 더 좁혔다.
“…….”
나하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짝 다가선 고진유와 거의 부딪힐 정도였다.
“보면 알겠지요.”
고진유는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역시…… 대단한 녀석이군.’
나하중은 인정했다.
천하멸살계의 완벽한 실행에 가장 걸림돌임에 틀림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개파식을 할 것이오. 참석해 주어 고맙소이다.”
“초청장을 보냈으니 당연히 참석하는 게 예의가 아닙니까.”
“혹시나 본 신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두려워서 안 올 줄 알았소이다.”
“극일천무신궁의 주인이 치사한 짓을 할 만큼 배포가 작은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맹주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보시오?”
“좋은 기회이긴 하군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
고진유의 표정과 말은 진심이었다. 개파식에 참석한 인물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맹주는 그들 모두 죽어도 괜찮소이까?”
“그들이 죽는다고 해서 그들 문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장이 죽으면 다른 인물이 그 자리를 메우면 될 뿐이외다.”
“그들은 무공이 강한데…….”
“후후후. 당신들에게 당할 정도의 무공인데 강하다는 것이오?”
“맹주도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소.”
“한번 해보겠소? 본도가 살아서 나갈 수 있는지, 아니면 못 가는지.”
고진유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본도가 마음먹는다면 지금 당신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
“지금 날 노리는 자들보다 더 빨리 당신의 목을 자를 수 있소. 거짓말 같아 보인다면 바로 확인시켜 주겠소이다.”
고진유는 주위에서 수많은 살기가 쏟아지는 것을 나하중이 나타났을 때부터 알았다.
‘이…… 녀석의 눈빛은 진심이다. 천주와 똑같아. 주위를 아끼고 위하는 척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가장 아끼는 놈이야. 혼자 살 수 있다면 충분히 모두 버리고 도망갈 놈이지. 극일가의 놈들이 전부…….’
고진유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 혹시나 허풍이라고 하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싸움은 완벽한 계획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스윽.
나하중은 허공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모두 물러가라.”
“그럼 당신이 나에게 죽을 수도 있을 텐데.”
“…….”
“하하하! 농담이외다. 즐거운 개파식이 장례식이 될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휘익.
고진유는 미소를 지은 뒤 돌아섰다.
“누님, 내려갑시다. 극일천과의 인연은 모두 끝났습니다.”
“알았다.”
나하중은 아래로 내려가는 고진유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죽일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