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96화 (296/425)

296화

반각이 지나갈 쯤.

마치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를 벗어난 듯 어느덧 주위가 조용해졌다.

고진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법인 모양이군.’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질적인 기운이 주위에 흐르고 있었다.

일행도 진법 안에 들어선 것을 알았다. 모두가 고화유의 뒤를 똑바로 보면서 조심스럽게 따랐다.

“여기예요. 어서들 오세요.”

커다란 대문이 나타났다.

고화유는 뒤를 돌아서며 환하게 웃었다.

“고맙소. 누님.”

“안으로 들어가면 반가운 사람이 있을 거야.”

“…….”

고진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무혼신녀가 바로 다가왔다.

“동생이 누나라고 부르니 저도 큰언니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말투를 보니 진유 아우의 쌍둥이 누나가 맞군. 반갑다.”

“저도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나중에 많은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하지.”

무혼신녀가 들어간 뒤 곧바로 우종성이 다가섰다.

“소저, 화산파 제자 호진이라 합니다.”

“아하. 동생의 대사형이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화산군협의 별호처럼 인자하신 것 같아요. 동생이 화산에 제일 든든한 대사형이 계시다고 하더니 맞는 말이네요.”

“고맙소이다.”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겠어요.”

우종성은 그녀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스윽.

묵경이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섰다.

“화유 소저, 안녕하시오? 동생에게 이런 아름다운 미인의 누나가 있을 줄 몰랐소이다.”

“묵경 오라버니이시군요. 역시 소문대로 엄청 잘생기셨어요. 말씀도 잘하시고요.”

“아우가 본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게 있소이까?”

“딱히 없어요. 그냥 형이라고 하더군요.”

“아하, 그냥 형이군요. 뭐, 든든하다 사내답다라는 이런 좋은 말을 하지 않았소이까?”

“음…… 그냥 잘생긴 형이라고만…….”

“그렇군요. 이 자식이…….”

휘익.

인양이 뒤에서 얼른 다가와 그를 잡아당겼다.

“누나. 우린 들어갈게요.”

“그래.”

묵경이 안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녀는 차례대로 나머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으로 들어선 고진유는 정문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여인.

“안녕들 하세요.”

“소연이구나. 동생은 좋겠는데?”

북소연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와락.

그녀는 곧바로 고진유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소문이 난 이상 머뭇거림이 없었다.

바로 뒤에서 끌려 들어오던 묵경이 두 남녀를 보면서 소리쳤다.

“그건 반칙이야. 남들 많은 곳에서는 하지 마!”

* * *

화산파의 여섯 사형제는 지옥혈림의 혈성존과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서 금방 친한 사이처럼 변했다.

고진유는 시끌벅적한 방에서 홀로 나왔다.

‘이곳에…… 그분이 계신다.’

달빛을 따라 건물 아래로 내려서며 걸었다.

‘앞에…….’

그때, 어둠 속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뒷짐을 쥔 채 다가오는 인영.

‘아버지.’

천주궁을 떠난 지 칠 년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진유는 바로 절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에게 만수무강이란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많이 자랐구나.”

“아버지는 예전 그대로 정정하십니다. 좋은 것을 많이 드신 듯하군요.”

“후후, 성격이 바뀐 것 같군. 예전에는 과묵했거늘.”

“그때는 너무 어려서 말을 안 했을 뿐입니다.”

“그런가?”

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내가 어떻게 아들의 성격을 모르겠느냐? 중원에 나온 뒤 바뀐 것이 많다.”

“그렇다고 하죠.”

“역시…….”

스윽.

그의 신형이 고진유 앞으로 다가섰다.

“많이 자랐어.”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키도 커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몸이 아니라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

“물론 올바르게 자랐다. 네 사부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게 맞았어.”

“사부님은 좋은 분이셨습니다.”

“나는 어떠냐?”

고진유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도 좋은 분이 맞으십니다. 저에게 정을 줄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때는 힘이 들어서 원망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고맙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혹시나 계속해서 원망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아들을 한 번 안아봐도 되겠느냐?”

“얼마든지요.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스윽.

그는 고진유를 껴안았다.

잠시나마 두 부자는 그대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 미안하다.”

“저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아닐지라도 누나에게 물어보니 좋은 아버지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말도 잘하는군.”

두 부자는 떨어지면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더 자세히 보았다.

“어째 아버지는 늙지도 않으십니까?”

“예전보다 주름이 서너 개 늘지 않았느냐?”

“…….”

“그 표정은 무엇이더냐?”

“제가 아버지 아들인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당연하지 않더냐. 넌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지.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정말로 좋아했을 텐데…….”

그의 눈동자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구나.”

“…….”

“정말 오래 살았지. 이제는 떠날 시간이다.”

“아버지.”

“내가 할 일은 없느니라. 이제 뒷일은 모두 너에게 맡기마. 여기에서 더 산다는 건 나에게 의미가 없구나. 네 누이를 잘 부탁한다.”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했다.

“다행이지 않느냐? 극일천이 사라지고 극일천무신궁을 저들이 고맙게도 세워주었지. 마음에 걸렸던 게 해결된 기분이다.”

“아버지를 따르던 분들도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후후. 극일가의 인물들은 모두 본 가로 복귀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천문전주의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굳이 그들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극일천무신궁을 위해 일할 놈들은 일할 것이고 나갈 녀석들은 나가겠지.”

“알겠습니다.”

휘익.

“……!!”

순간, 그가 손을 뻗어 고진유의 혈을 눌렀다. 고진유의 전신에 힘이 빠지면서 몸이 굳어졌다.

그는 고진유가 가부좌를 하도록 굳은 몸을 움직였다.

“이건 아버지로서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고진유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

당장 말리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고진유의 뒤에 앉았다.

“아들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이것 하나밖에 없다. 부디 재밌게 살아라.”

스으윽.

그는 양손을 뻗어 고진유의 머리를 감쌌다.

어둠.

마치 태초의 어둠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점점 진해지더니 한곳으로 뭉쳤다.

뭉친 작은 점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조금씩 커지는 빛은 수많은 어둠을 끌어당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작은 점으로 시작된 빛은 어둠을 흡수하면서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뒤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번쩍!

섬광이 터지자 암흑은 수많은 빛으로 변했다.

고진유의 눈에서 쏟아진 백광이 어둠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꿈틀.

그제야, 방금까지 굳어 있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아버지!’

고진유는 재빨리 뒤를 돌아섰다.

고개를 숙인 채 힘겨워하는 그를 보았다.

얼른 그를 품에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허어…… 난 괜찮다.”

고진유는 그의 죽음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잘 자라서…… 고맙구나.”

툭.

그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극일천은 중원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뚝.

뚝.

고진유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그의 뒤에 고화유가 나와 있었다.

“누님……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만나러 가신 거야. 돌아가신 게 아니고.”

“……그렇다면 좋으시겠네요.”

“맞아. 세상에서 아버지만큼 오래 사신 분이 없잖아. 울지 마. 기쁘게 떠나신 분이야.”

“……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앞으로 누님을 저에게 부탁했어요.”

“알겠어. 나도 극일천이 사라진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저하고 같이 지내도 되고 본 가에 가셔도 됩니다.”

“본 가에 가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뭐. 당분간 동생을 따라 다녀야겠다.”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를 어떻게 할 거야?”

“본 가에 모셔가도록 하겠어요.”

“알겠어.”

고진유는 손을 위로 들었다.

휘이익.

그러자 두 사람의 앞으로 열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극일가의 인물들.

“가주님을 뵙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요.”

“죄송합니다. 전대 가주님께서 절대로 가주님의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괜찮습니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라서요.”

“…….”

“아버지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소신들이 가문의 예로 다해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사내는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마치 그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능숙하게 일 처리를 했다.

“가주님,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잘하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스르르륵.

극일가의 인물들이 그의 시신을 들고 사라졌다.

“어떻게 알았어?”

“누군가 따라다닌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처음에는 그들이 누군지 몰랐죠. 하지만 기억을 찾은 뒤 극일가의 호신무(護身武)라고 생각했어요.”

“맞아. 네가 천주궁을 나선 뒤부터 항상 지키고 있었지.”

“배를 탔을 때도 있었던가요?”

“원래라면…… 당연히 지켰겠지. 근데 뜻하지 않게 난파가 되었잖아. 정말로 그때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했어.”

“후후…… 제가 생명줄이 조금 질깁니다. 그만 들어가죠.”

“그럴까?”

고진유와 고화유는 일행이 있는 방으로 움직였다.

“어…… 대사형.”

밖에 홀로 나와 있는 우종성을 보았다.

“…….”

우종성은 멋쩍은 표정으로 함께 오는 고진유와 고화유를 보았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

우종성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혹시 화유 누나가 안 보여서 나오신 건가요?”

“어…… 아니다.”

“음. 그런가요?”

“…….”

고진유의 미소를 보면서 우종성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대사형은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고 한 걸 기억하는데 아닙니까?”

“내가……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그래요? 제가 기억력은 좋은데.”

“관심이 없는 게 아니고 관심 있는 이가 없을 뿐이다.”

“화유 누나에게는 관심이 있다는 말씀이네요.”

“…….”

고진유는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누나, 대사형이 관심 있다는데요? 먼저 들어갈 테니 이야기 좀 나누고 오세요.”

“들어가.”

우종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

[대사형, 자신감을 가지세요. 어정쩡하다가는 다른 사내에게 빼앗길 수 있다고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누나는 다정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고진유의 전음이 들렸다.

고진유가 싫어하지 않는 것만으로 일단은 다행이었다.

“……고 소저. 사제 때문에 당황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동생이 원래 저런 성격인 줄 잘 아시잖아요. 예전에 아버지는 모르셨겠지만, 우리 둘이 있을 때는 항상 밝은 성격이었거든요.”

“그분께서는……?”

“본 가에 가셨어요.”

“아…… 본 가라면…… 극일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우리 잠시 걸을까요?”

“알겠소이다.”

고화유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지 않고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종성은 한 걸음 뒤에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슬퍼하는 것 같다.’

분명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스윽.

우종성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소저. 무슨 일이십니까?”

“…….”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본도가 도움이 된다면…….”

“방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극일천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본 가에 돌아가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맞아요. 동생에게 모든 것을 전해주시고…… 시신이…….”

우종성은 그녀의 팔을 계속해서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부모님이 방금 돌아가신 것을 참아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스윽.

우종성은 고화유를 당겨 안았다.

왜 그녀를 안았는지 몰랐지만,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우종성은 자신이 그녀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조금만 더 이대로 있으면 좋겠군요.”

“…….”

우종성의 심장이 점점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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