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91화 (291/425)

291화

천문전주 나하중은 아래에 놓인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백돌과 흑돌은 혼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가 이길지 몰랐다.

백돌을 든 그의 손이 도중에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허허. 한숨 자고 와도 되겠는가?”

“…….”

타악.

나하중이 흑돌로 둘러싼 좌상변에 백돌을 내려놓았다.

“음…… 좋은 자리에 놓았군. 일부러 사석을 만든 뒤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겠다는 뜻인가?”

“시끄럽네. 자네는 바둑을 입으로 두는구만.”

“클클클, 입바둑이 본인의 특기가 아니겠는가.”

흑돌을 쥔 백의노인이 살포시 백돌 옆에 내려놓았다.

그들의 바둑은 거의 종반을 향해 마무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음…… 아직도 두고 계시는군.’

여의정으로 다가오던 수곡자는 입구에서 멈춰 섰다.

천문전주과 함께 바둑을 두는 백의노인은 후전 십당의 공당주 가병후..

‘이젠 후전에서도 나와야 할 정도인가?’

후전은 십전과 달리 극일천 안에서도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십전에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하기 위한 세력이었다.

후전 또한 십전처럼 열 개의 조직인 십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곡자는 정자 입구에서 이각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기다렸다.

“들어오게.”

그때, 여의정에서 그를 찾는 나하중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자에는 이미 바둑판이 정리되어 있었다.

수곡자는 다급히 여의정으로 올라섰다.

“전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가병후에게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가 당주님을 뵙습니다.”

“수곡자, 오랜만일세. 천문전에 있다는 말을 들었네. 많이 기다린 모양이지? 자네가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수곡자는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

“허허. 내 말이 틀렸는가? 본 천에서 자네만큼 까다로운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하중은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수곡자를 보았다.

“무슨 일인가?”

“…….”

수곡자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괜찮네. 말해보게.”

“지문전주께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지문수각군은?”

“지문수각군도 거의 전멸 상태입니다.”

나하중은 물론 가병후도 그 말에 흠칫했다.

다른 인물도 아닌 지문전주는 극일십우였다.

“수곡자, 그렇다면 지문전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는 말이군.”

“송구하옵니다.”

“훗, 자네가 미안할 게 뭣이 있겠나. 똑바로 못한 그들 잘못이지.”

지문전이 나선다고 했을 때 예견했던 일이었다.

그들로서는 화산도협을 직접 잡을 수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를 직접 상대하려면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하지.”

“나 전주, 너무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이건 심각한 일이야. 동 전주가 당했네.”

“능력이 안 되면 사라지는 게 맞네. 심각할 필요도 없지. 그리고 그 정도의 인물은 만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동안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지문전주처럼 만들고자 한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자네들이 있지 않은가. 열심히 키워서 보내주게나.”

“허어. 너무하는군. 우리가 애써 만들어주면 자네는 소모품으로 버리는구먼.”

“앞으로는 조심해서 사용하겠네.”

그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수곡자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표정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수곡자, 더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지?”

“지문전주의 시체에서 찾아낸 게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지문전주를 죽인 무공을 알아냈습니다.”

나하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는 화산파의 제자. 화산파의 무공이었다면 따로 보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화산파 무공이 아니군. 그를 죽인 무공이 뭐지?”

“천무공이었습니다.”

“……!!”

수곡자의 대답은 나하중에게 충격적이었다.

탁자의 한쪽 부분이 그의 손에 잡힌 채 부서졌다.

그의 목소리에 긴장이 실렸다.

“천무공이 확실한가?”

“수십 번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천무공에 당한 게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천무공을 펼칠 수 있는 무인은 오직 천주밖에 없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가병후의 목소리도 떨렸다.

“지문전주를 죽인 범인이 천주 황야란 뜻인가?”

“그건 아닙니다. 검상의 흔적이 천무공이긴 하지만 외부의 검식이 섞여 있었습니다.”

“외부의 검이라면 화산파의 검공인가?”

“그 또한 탈형의 경지를 넘어선 탓에 정확하게 알지 못하겠습니다.”

“분명 그와 싸웠다고 하지 않았나?”

“지문전의 생존자가 말하기를 분명 화산도협이라 했습니다.”

나하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어떻게 천무공을 익힐 수 있었지? 화산도협, 대체 네놈의 정체가 누구란 말이냐?’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가병후가 다시 물었다.

“이보게, 수곡자. 화산도협이 천주님과 만난 적이 있던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만났다고 해도 천무공은 하루 이틀에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닙니다. 극일가에 의하면 태중에서부터 선천태황무심공(先天太皇武心功)을 수개월 동안 받아들여야 익힐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천화공녀가 범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천무공은 사내만이 익힐 수 있습니다.”

“아…… 하, 그렇지. 너무 놀라서 잊었네.”

가병후 또한 천무공을 펼친 인물은 고진유가 맞다고 확신했다.

나하중은 입을 제대로 열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화산도협이 그분의 아들이라는 말인가?”

“전주님, 혹시 그것보다 극일가에 천주 외에 다른 사내가 있었던 게 아닙니까?”

“…….”

두 사람은 수곡자의 의견처럼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게 아니면 천주께서 주모가 아닌 다른 여인 사이에서 자식을 출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다.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 천주는 여인을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화산도협은 누구란 말이오?”

세 사람은 다시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은 이상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을 듯했다.

스윽.

가병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주궁에 다녀오겠소이다.”

“자네가?”

“그래도 자네보다는 내가 더 친하지 않은가? 나중에 보세.”

가병후는 정자를 내려온 뒤 천주궁으로 향했다.

* * *

‘흐음. 오랜만에 오는군.’

천주궁 앞에 도착했다.

운무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순식간에 그를 감싸면서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가병후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선 채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가 숙부께서 오셨군요.”

운무 사이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오자 여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천화공녀?”

“네, 맞아요.”

“이런…… 벌써 이렇게 자라서 숙녀가 되었구나. 십 년 전에 봤을 때는 완전히 아이였는데…….”

“가 숙부께서는 변한 게 없으시네요.”

“후후후. 듣기 좋은 말을 해서 고맙다.”

“사실인걸요. 아버지를 뵈러 오신 모양인가 보네요.”

“천무전주를 만났다가 천주님을 뵙고 싶어서 왔네.”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고화유는 앞장을 서며 그와 함께 천주궁으로 들어섰다.

운무가 완전히 걷히면서 천주궁이 나타났다.

“저기에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군.”

가병후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 * *

스윽.

가병후는 천주의 앞에 도착한 뒤 바로 허리를 숙였다.

“천주 황야를 뵙습니다.”

“가 당주, 십 년 만인가?”

“그렇사옵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겠지?”

“그저 지나가는 길에 천주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런가? 그래도 다른 녀석들보다 자네가 조금 낫군. 어디 술이라도 한 잔 마실 텐가?”

“술이라면……?”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담아놓았던 것이지.”

“고맙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게. 술을 가지고 오겠네.”

천주가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가병후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천주궁으로 들어섰다.

“가 숙부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간단하게 안주를 준비하겠어요.”

“알겠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천주가 손에 항아리를 들고 나타났다.

밀봉된 상태였지만 주향이 강하게 퍼져 나왔다.

타악.

천주는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

“앉게나.”

“고맙습니다.”

퍼엉.

밀봉된 뚜껑이 열리면서 소리를 냈다.

“이보게, 향이 좋지 않은가?”

“네. 향만 맡아도 취기가 오르는 듯합니다.”

“이게 바로 완전히 약술이라네. 자네가 와서 특별히 만년하수오를 담은 술을 꺼내왔지.”

“너무 귀한 술이 아닙니까?”

단번에 백 년의 내공을 만들 수 있다는 만년하수오가 아닌가.

“이건 천화가 태어날 때 기념으로 담은 술이지.”

“…….”

스윽.

천주는 항아리에 국자를 넣은 뒤 술을 펐다.

“한 잔 받게나.”

“감사합니다.”

두 개의 술잔에 가득 채웠다.

“마시게나.”

“알겠습니다.”

가병후는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술이 목 안으로 타고 내려가자 만년하수오의 강렬한 향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찌리리릭.

한 잔의 술에 전신의 혈맥이 날뛰는 것처럼 몸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어떤가? 괜찮지 않나?”

“최고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술을 마셨지만 이것과는 견줄 수 없군요.”

“후후후. 당연하지 않나. 만년하수오에 공청석유까지 들어갔어.”

“…….”

가병후의 시선은 술항아리에 꽂혔다.

이건 술이 아니라 영약이었다.

천주는 그의 술잔에 재차 술을 채웠다.

“천천히 마시게나.”

“고맙습니다.”

가병후는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웠다.

‘크으…… 좋군. 힘이 솟구치고 있어.’

“좋은 날에 담은 술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후후. 자네가 기분 좋게 마시니 본인도 좋군.”

“이젠 극일가의 차기 주인은 천화공녀가 되시겠습니다.”

“아쉽지만 천화는 극일가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네.”

“…….”

가병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인은 극일가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천화공녀가 여인이라서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이번 경우는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는 아들이 없다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천주 또한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것이었다.

“후후. 극일가에 대해 자네가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네. 하지만 극일가는 잘 돌아가니 걱정 안 해도 된다네. 극일천에만 신경 쓰도록 하게나.”

“……네에. 알겠습니다. 근데…… 귀주금천지에 화산도협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나도 들었네.”

“그곳에 화산도협이 나타난 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귀주금천지에 이상이 생긴다면 극일천을 운영하는 데…….”

“잠깐만 말을 멈추게.”

“…….”

“귀주금천지는 극일천의 운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네. 극일가의 소유이지.”

천주는 확실하게 사실을 밝혔다.

다시 말을 이어서 설명했다.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본인이 비록 극일천의 천주를 맡고 있지만 극일가의 소유를 극일천에 넘긴 것은 아니다. 귀주금천지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곳도 마찬가지이지.”

“그렇다면 귀주금천지의 물건들을 훔쳐간 범인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본 가에서 신경 쓸 일이니 본 천은 굳이 귀찮은 일을 안 해도 된다네.”

가병후는 천주와 대화를 하면서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천주께서는 본 천의 수장으로서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나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

쪼르르르.

천주는 국자에 높이 치켜 올린 뒤 술을 아래로 따르기 시작했다.

“본 천의 수장으로서 임무를 다하라…… 이 말인가?”

“…….”

“당연히 내 말을 잘 들으면 수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겠지. 본 천도 내 식구라면 말일세.”

가병후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천주는 술을 마셨다.

“오늘 술맛이 제대로 나서 좋군. 난 너무 오래 산 모양이네.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버렸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세상을 더 재미있게 지냈을 텐데…….”

“…….”

“내가 보기에 지금 자네들은 한참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네. 음……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좀 더 열심히 하게나. 안 그러면 괴물한테 잡아먹힌다네. 후후후.”

천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천주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인가?’

가병후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로 알고 있다면 그동안 천주궁에서 가만히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만 가보게나. 오랜만에 마셨더니 잠이 오는군. 천화가 밖으로 안내해 줄 걸세.”

“알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만날 수 있다면 다음에 보세나.”

천주는 먼저 일어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천화공녀가 모습을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안내하겠어요.”

“고맙네.”

두 사람은 천주궁 밖으로 나섰다.

가병후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여인이라고 해서 극일가의 가주 자리는 맡을 수 없다면 억울하지 않더냐? 그분의 유일한 자식이 아니더냐?”

“가 숙부께서 제 걱정을 해주시네요.”

“난 단지…… 천주님의 자식이 아닌 남에게 극일가를 물려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하는 말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본 가에서 해결할 문제이죠.”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네.”

“말씀이라도 고마워요. 하지만 전 극일가의 가주에는 관심이 없어요. 게다가 가주는 벌써 정해졌거든요.”

“……!”

두 사람은 이미 천주궁 밖으로 나와 있었다.

“잘 살펴가세요.”

천화공녀는 허리를 숙인 뒤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가병후는 그녀의 마지막 대답에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벌써 가주가 정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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