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고진유의 모습 뒤로 천주 황야의 모습이 겹쳐졌다.
지문전주 동후변은 손이 떨렸다.
그 어떠한 무공도 무(無)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천무공(天無空)이 틀림없었다.
“화산파 제자 고진유이외다.”
“…….”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요?”
“똑바로 말하라.”
“무엇을 말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동후변의 표정이 굳어졌다.
“망할 놈…….”
그의 전 내력을 금마검에 불어 넣었다.
‘한 번 더 확인해 보면 알겠지. 네놈이 누구인지.’
그는 다시 움직였다.
“받아라……!!”
두두두두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
고진유의 목을 베기 위해 날아오는 금마검의 위력은 상상 초월이었다.
“이렇게 나와야 당신을 죽일 수 있지 않겠소이까.”
고진유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번쩍!
광천섬광(光天閃光)과 함께 탄검무결(彈劍武結)의 초식이 사의검에서 동시에 뻗어 나갔다.
‘망…… 할 놈……!!!’
동후변은 상대가 펼친 무공을 알아보았다.
변화가 있긴 하지만 저건 극일절대천황무공이었다.
“크윽…….”
가슴 한쪽이 형체가 없을 정도로 찢겨 나갔다.
사의검을 옆으로 내려놓은 채 무심한 시선.
“너언…… 누…… 구…….냐?”
“화산도협 고진유라 하지 않았소이까?”
“…….”
“하아, 죽는 사람 소원은 들어줘야겠군. 본도에게는 쌍둥이 누나가 있소이다. 이름을 말하면 누구인지 알 거요.”
‘쌍둥이…… 누나?’
“고화유라고 하지요. 이제 본도가 누구인지 알겠지요?”
털썩.
그는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시선은 고진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고화유에 대해 어떻게 모르겠는가.
천주 황야의 유일한 독녀라 알려진 천화공녀가 아니었던가.
천주궁에서 흘러나온 소문이 사실이었다.
천화공녀가 아기 시절 유모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앞이 보이지 않은 어둠에서 항상 젖을 물렸다고 했다.
그리고 천주궁에는 항상 서너 명의 유모를 동시에 구했다고 했다.
한데,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유모들 사이에서 아기에 대한 설명이 달랐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저 아기가 젖을 많이 필요로 하는 줄 알았다.
“천…… 주께서…… 그분이…… 가만히…… 있을 리…… 없겠지.”
동후변은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화산파 제자라고 하지만 화산도협이 왜 강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는 극일천주의 아들이자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을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천주 황야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분은 극일천이 무림에서 조용하게 사라지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극일천의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천(秘天)은 만일 극일천이 해체되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천주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변질했다.
그동안 천주 황야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선계에만 관심을 보일 뿐 나머지 일들은 천문전주에게 모두 맡겼다.
‘그것이 끝인 줄 알았거늘.’
천주는 비밀리에 홀로 준비를 한 게 틀림없었다.
극일천을 상대하기 위해 천주는 무림을 이용한 듯했다. 게다가 그분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을 줄은 예상조차 못 했다.
‘그냥 천주를 따랐어야…….’
동후변은 더는 생각하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그의 죽음으로 지문전과의 싸움은 끝이 났다.
고진유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검상을 보면 어떻게 당했는지 알게 되겠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고진유의 곁으로 사형제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고진유가 지문전주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궁금했다.
“대체…… 그 무공은 무엇이냐?”
“천무공이라는 가전무학입니다.”
“…….”
가전무학이라는 어감이 이상했다.
다섯 명 모두 약간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허, 가전무학이라고 하니 딱히 문제가 없을 것 같군.”
“본 문 외의 무공을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단 예외로 가전 무학은 상관없긴 하지.”
화산파의 무공을 좀 더 강하게 펼치기 위해 다른 무공을 익혀 보완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였다.
혁자영도 화산파의 규범을 어긴 게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문전주의 죽음으로 이제 급한 일은 없어졌다.
“사제, 이젠 끝났지?”
“네. 우리도 노곽으로 출발하죠.”
“좋은 기회야. 기대돼. 사제가 있을 때가 아니면 언제 마교를 때려잡아 보겠어?”
장두총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방금 보여준 고진유의 무공을 보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게 있었다.
마교주 천마도 사제에게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진유는 앞장을 섰다.
“사형들 갑시다.”
“좋아. 출발하자구.”
* * *
마교의 진영으로 흑색 마차가 들어섰다.
진영이 술렁거렸다.
사방이 막혀 있지만 마차에 어떤 인물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흑색 마차는 멈추지 않고 뇌군의 막사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뇌군은 진영 입구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은 후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왔군.’
소요마군과 함께 마차가 도착했다.
“뇌군을 뵙소이다.”
“소요마군.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소.”
“고생이라고 할 게 있겠소. 그분께서 계속해서 천형마비에 힘이 들었을 것이외다.”
“그렇겠지요. 지금은 어떻게 하고 계시오?”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요.”
“그분을 막사에 모셔 놓은 뒤 천마님께 함께 가겠소이다.”
“그렇게 하지요.”
소요마군은 수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철컹.
마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수하들은 어느 정도 익숙한지 마차 안으로 들어간 뒤 정신을 잃은 그를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뇌군은 막사로 앞장을 서며 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정신을 잃었어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했다.
“휴우……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외다.”
“전대 천마님이지 않소이까. 근데 왜 저분을……?”
“천마님께 가시지요.”
“……알겠소이다.”
소요마군은 그를 따라 천마가 있는 군막으로 향했다.
천마가 지내는 군막은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뇌군은 밖에서 그들이 왔음을 알렸다.
“천마님, 소요마군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게.”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군막에 천마기가 가득했다.
척.
소요마군은 앞으로 나선 뒤 부복을 했다.
“소신, 신교의 주인, 천마님을 뵙습니다.”
“소요. 일어나라.”
“소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바로 일어난 뒤 옆으로 물러났다.
“그분께서는 괜찮으신가?”
“…….”
소요마군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그때 뇌군이 나섰다.
“전대 천마께서는 여전하셨습니다.”
“그렇군. 다행이네.”
“마령침혼대법을 성공할 수 있겠는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좋아. 뇌군, 그대를 믿지.”
소요마군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눈썹이 꿈틀거렸다.
뇌군의 명에 공무천마를 데리고 온 이유를 알았다.
‘그분께 마령침혼대법을 펼치겠다는 것인가?’
소요마군도 마령침혼대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마기가 강한 고수일수록 마기에 의해 정신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짧은 시간이나마 올바른 정신이 돌아오도록 만드는 대법이었다.
하나…….
그 시간은 오래 지속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마령침혼대법을 펼치는 이유는 단 하나.
정신이 맑을 때 스스로 무인다운 죽음을 택하기 위함이었다.
“뇌군, 마령침혼대법을 펼치는 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두 시진 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렇군. 지금 바로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뇌군은 마교에서 그가 오기 전 모든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무림맹에 알려라. 두 시진 뒤에 생사결을 하겠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뇌군과 소요마군은 뒤로 물러난 뒤 군막을 나섰다.
소요마군의 그를 보며 물었다.
“뇌군…… 그분을 여기에 데리고 온 이유가 이것이었소?”
“그렇소이다. 그분께서 무인의 생을 보낼 마지막 장소이외다.”
“…….”
천마였던 그분의 삶에 최후의 생이 될 수 있는 자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그렇군요.”
소요마군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뇌군은 군막에 도착했다.
“휴우…… 들어가 볼까?”
그는 호흡을 크게 내쉬며 안으로 들어섰다.
* * *
무림맹 진영에 비상이 걸렸다.
두시진 뒤 마교에서 생사결을 원한다고 연락이 왔다.
생사결을 겨룰 한 시진 전, 화산파가 도착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림맹주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전서였다.
처음부터 화산파가 사천성까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먼저 도착한 사천무림의 세 문파를 통해 화산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유천을 완벽하게 제거한 화산파 덕분에 움직이지 못했던 사천 무림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무림맹에서 떠나기 전 고진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화산파가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합류할 것이라는 계획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
화산파가 무림맹과 함께 합류한다면 마교를 상대하는 데 충분했다.
‘두 시진 뒤라.’
제갈양은 곧바로 마교의 뜻을 받아들였다.
생사결은 화산파에게 맡길 것이었다.
그 전에 무림맹의 인물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확답을 받아 놓아야 했다.
무림 군사의 명으로 육협 중 한 명에게 맡길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맹주가 화산파이기에 밀어준다는 식으로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될 수 있는 곳이 무림이지.’
제갈양은 오해의 불씨가 될 수 있는 것을 초장부터 제거하고자 했다.
마교에게 생사결의 제안을 받았을 때, 무림맹에서는 서로 대표로 나서겠다며 많은 무인이 나섰다.
그들 모두 제갈양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 마교의 진영을 살피던 수하들에게서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제갈양은 단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교의 진영에서 흘러나온 소문의 내용.
‘마교에서 마차가 도착했다…… 문제는 마차에 탄 인물이 누구인가인데.’
철저하게 비밀로 했지만 마교 진영에서 수군거리는 마교도들 사이에서 그의 정체에 대해 알아냈다고 했다.
그리고 제갈양은 믿을 수 없는 이름을 보았다.
다급히 긴급회의를 소집한 그는 군막으로 사천 무림의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사천당문의 수장들과 무림맹의 군장급 인물들을 모았다.
제갈양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제갈 군사. 무슨 일이라도 있소이까?”
“군사인 본인이 여러분을 다급하게 모이도록 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교에서 생사결을 할 누군가가 내려온 모양이외다.”
“제갈 군사께서는 너무 크게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소이다.”
무림맹 총군장 황보성이 말했다.
평소와 달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갈양을 보면서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군사, 그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궁금하외다.”
당문주 당천독도 같은 생각인 듯 물었다.
제갈양은 잠시 대답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마교의 인물과 생사결을 겨루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
“흐음…….”
제갈양의 질문에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미파의 연절 사태가 대답했다.
“제갈 군사, 그건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고 싸워야 하는 게 아니겠소이까?”
“그렇지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게 순서이겠지요.”
당문주 당천독은 눈치가 빨랐다.
“제갈 군사는 마교에서 왔다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구려.”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마교의 진영에 도착한 인물은 공무천마라는 소문이 있소이다.”
제갈양의 대답에 순간 정적이 흘렸다.
“공…… 무천마가 왔다는 것이오?”
청성파 장문인 송풍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습니다. 마교의 진영에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그는 공무천마일 확률이 높습니다.”
“음…… 제갈 군사, 그는 오래전에 주화입마를 당한 뒤 목숨이 끊어졌다고 하지 않았소?”
“저 또한 마교에서 흘러나온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소문일 뿐입니다. 직접 확인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군사의 군막에 모인 인물들은 점점 표정이 굳어져 갔다.
소문에 그는 마공이 머릿속으로 퍼져 주화입마에 당했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천마의 자리를 내려놓았겠는가.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소문은 그들이 우리를 속일 생각이었군요. 역시 마교의 인물답군.”
당천독도 그가 확실한 듯 말했다.
마교 측에서 생사결에 공무천마가 나선다면 무림맹에서는 나설 인물이 없었다.
공무천마는 그 어떤 마교의 무인과 달랐다.
천마였을 때 그의 마공은 천지개벽할 정도로 가공한 위력을 지녔다.
생사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그들의 말이 점점 사라졌다.
제갈양은 주위 분위기를 살폈다.
서로 말을 하지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공무천마와 생사결을 겨루실 분이 있으십니까?”
“…….”
그들은 제갈양의 시선을 피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싸우기 원하는 인물이 나선다면 그를 보내기로 하겠습니다.”
제갈양은 군막 밖으로 나선 뒤 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똑바로 들으시오. 생사결의 마교 측 상대는 공무천마라 하오. 먼저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겠소이다. 혹시 본인이 생사결에 나서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앞으로 나오시오.”
하지만, 처음과 달리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공무천마를 상대하겠다는 무림맹 소속의 무인은 나오지 않았다.
제갈양은 그들에게 더 강요하지 않고 신형을 돌리며 군막으로 들어갔다.
“후.”
안으로 들어선 제갈양은 웃음이 나왔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씁쓸하군.’
서로 목숨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했다.
누가 죽고 싶을까?
하지만 진정한 무인이라면 생사결에 강한 상대가 나온다고 해도 도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군. 화산파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 * *
전령이 다녀간 지 한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무림맹의 진영이 웅성거렸다.
“왔군.”
제갈양은 소란스러운 기척에 밖으로 물었다.
“화산파에서 오셨습니다.”
“알겠네.”
제갈양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이 도착하겠다는 시간에 맞춰 무림맹에 들어섰다.
그는 화산파를 맞이하기 위해 진영의 입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