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운무산에서 암영검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극일천 최고의 무인.
극일십우 일인은 중원무림 웬만한 중소방파 한 곳을 전멸시킬 정도의 무력을 지녔다.
한데 벌써 그에게 세 명의 극일십우가 목숨을 잃었다.
극일천의 육십사괘무장부터 십전의 수장들까지 화산도협을 상대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상대는 극강의 무인이었다.
휘익!
흑의사내가 건물을 돌아서며 모습을 드러냈다.
육 척의 키에 다부진 몸매.
그리고 넓은 이마에 가느다란 눈매와 입꼬리가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간 사내였다.
“지문전주님, 뵙습니다.”
그의 앞으로 다가선 중년 사내가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자.”
“네.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지문전의 장방이라 일컫는 모사 주현재가 앞장을 섰다.
드르륵.
그들의 앞으로 문이 계속해서 열리고, 가장 깊은 방으로 들어섰다.
“전주님께서는 앉으십시오.”
“음.”
지문전주 동후변은 그의 앞으로 지나간 뒤 상석에 앉았다.
모사 주현재가 부복을 했다.
“전주님의 폐관이 끝나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십 년 만인가?”
“네, 그러합니다.”
지문전주 동후변은 정확히 십 년 전 폐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며칠 전 폐관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방금 천문전에 다녀온 길이다.”
“…….”
“왜 알리지 않았지? 충분히 알릴 수도 있었을 텐데.”
“별일 아니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별일 아닙니다.”
“크하하!!”
동후변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허리를 숙인 모사 주현재를 내려다보았다.
“하긴. 별일이 아니긴 하지. 어차피 경쟁자들이 죽은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전주님께서 폐관에 들어가신 게 아닙니까.”
십전의 전주이자 극일십우의 일인.
동후변은 야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스윽.
동후변은 옆에 높인 탁자에서 술잔을 들었다.
주현재는 그의 곁에 다가온 뒤 술을 따랐다.
벌컥.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크으으, 적당한 온도군. 자네는 여전히 내 성향을 잘 알고 있어.”
“고맙습니다.”
주현재는 한 잔을 더 따른 뒤 물러났다.
“폐관에 들어간 사이 무림의 상황이 너무 많이 바뀐 모양이야.”
“재미있게 변한 것입니다.”
“크크크. 자네가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혹시나 다른 곳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말게. 괜히 욕을 들을 수도 있지 않겠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허리를 숙이며 말을 했다.
지문전주 동후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천문전주께서 상당히 귀찮은 듯 말씀을 하시더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화산도협을 이렇게까지 키운 것은 그분이십니다. 철갑을 찾기 위해 기다리다가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지요.”
“훗. 그분의 입장이라면 당연했겠지. 철갑에 든 게 필요했으니깐.”
“전주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자네가 보기에 어떻게 된 것 같나?”
“당연히 성공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전히 폐관 중이셨을 테지요.”
“맞다. 난 성공했다. 더는 신무신단을 복용하지 않아도 내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젠 본 천에서 전주님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후…… 그건 모를 일이지. 천문전주께서도 계시고 비천에서 키우는 애들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중원 무림의 최강의 무인, 천주께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맞습니다. 그들 모두가 강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게 강하신 분이 전주님이십니다.”
주현재는 믿었다.
폐관에서 신무신단의 중독을 끊을 정도라면 얼마나 독하게 내력을 수련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신무신단의 중독을 넘어설 정도의 내력이라면 천문전주를 넘어섰을 게 확실했다.
어쩌면 천주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후후후. 자네 말이 맞아. 나도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
“이번 기회에 화산도협을 잡는다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 녀석은 내가 맡도록 하지.”
“전주님께서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현재는 지금까지 그를 상대한 자들을 연구했다.
“소신이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후후후. 또 분석을 했군. 무엇인가?”
동후변은 그의 능력을 잘 알았다.
상대와 싸우기 전에 모든 장단점을 파악하고, 단점을 파고들어 결국은 이기게 했다.
“화산도협은 거의 결점이 없는 싸움을 합니다. 상대가 개인이든 집단처럼 세력이라도 같습니다.”
“결점이 없다는 말이 무엇이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대를 피하지 않고 모두 싸워 이겼습니다.”
“…….”
“그 과정에서 완벽한 강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상대가 고수든 하수든 상관없이, 죽여야 할 적이라면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강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 방심은 그에게 없습니다.”
“흐음. 재미없는 인물이로구만. 너무 빡빡하게 싸우는 녀석이군.”
강한 무력을 지닌 인물이 방심조차 안 한다면 하수들은 그저 그에게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주현재의 말처럼 그에 대한 결론은 싸움에 있어 약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네는 이게 끝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당연합니다. 약점이 없다는 그대로 싸우면 됩니다.”
“똑바로 말해보게.”
“한 번도 진 적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지는 것인 줄 모릅니다.”
“그렇겠지.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
주현재는 순간 멈칫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그에게는 자신이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전주님의 곁에는 소신이 있지 않습니까.”
“후후후. 자네만 믿겠네.”
“걱정 마십시오. 전주님께서 나서는 순간 그의 목숨은 이미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현재의 머릿속에는 이미 모든 계획이 차례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 * *
고진유는 북쪽 사천성으로 향하며 하남성에서 퍼져 나온 소문을 들었다.
“전부 잘들 하고 있구나.”
소림사가 묵룡마문의 결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내용이었다.
‘후후후.’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소문 중에서도 인양의 이야기에 대견함이 느껴졌다.
“완전 전국 무림인이 다 됐어.”
묵룡마문을 상대로 이겨낸 의제권협의 명성은 계속해서 높아져 갔다.
그리고 무혼신녀의 무공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신마승은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안휘성에 이어 하남성도 정리가 되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겠지.’
고진유는 마도팔문은 걱정하지 않았다. 충분히 잘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신경 쓸 곳은 마교였다.
그들은 중원으로 내려올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게 확실했다.
그들이 중원에서 마도팔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갔다.
“흐흥, 지금쯤 머리깨나 아플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하늘에 굉음이 떨어졌다.
고진유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폭포를 올려다보았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상쾌한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천성으로 넘어가기 위해 적수(赤水)에 도착한 뒤 잠시 멈춘 것이었다.
“여기엔 폭포가 사천 개나 있다고 하더니…….”
소문대로 적수는 폭포의 마을이었다.
‘이런.’
순간 고진유는 미간을 좁혔다.
피이이잉!
그때, 폭포의 물줄기 사이를 뚫고 검기가 빠르게 날아왔다.
고진유는 옆으로 몸을 틀며 검기를 비켜 가는 동시에 폭포를 향해 사의검을 그었다.
쏴아아아아-!!!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가 양단되며 분리된 폭포 안으로 한 명의 중년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파아앗!
슈우욱.
고진유는 그와 동시에 움직이면서 폭포 안으로 사의검을 밀어 넣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
중년 사내는 폭포 옆으로 달리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고진유와 그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좀 당황했네?’
마치 상대가 생각보다 강해 놀란 듯한 표정.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반격에 바로 공격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색마 놈이 무공이 좀 강하구나.”
“……?”
“색마 놈아! 이번에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중년 사내는 전력을 끌어 올렸다.
‘쯧, 겨우 색마 한 놈 잡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줄이야……!’
중년 사내의 검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가 들은 색마의 실력이라면 최소한 부상을 입을 것이라 확신했다.
채애앵!!
중년 사내의 검이 머리 뒤로 튕겨 나갔다.
‘이, 이놈이…… 이렇게 무공이 강했다고?’
또 한 번 어이가 없어졌다.
한 번은 우연히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두 번이나 막아냈다면 우연이 아니었다.
색마 놈은 생각보다 강했다.
고진유는 중년 사내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색마로 알고 있군.’
중년 사내는 극일천의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도도 아니고, 사파인도 아니었다.
우선 그가 가진 오해를 풀어야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본도를 누군가로 잘못 안 것 같소이다.”
“……!”
중년 사내는 말없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앞으로 겨누었던 검을 내려놓았다.
“어…… 미안. 내가 착각한 모양이다. 넌 누구지?”
“내가 누군 줄 알고 공격했소? 아니, 누구를 쫓고 있었소이까?”
“화유색마를 쫓고 있는 중이었네.”
“별호를 보니 대충 어떤 놈인지는 알겠소이다. 한데 그놈 신상도 제대로 확인을 안 한 채 쫓는 것이오?”
“얼굴을 워낙 자주 바꾸는 놈이라 일단 모르는 얼굴이면 잡고 난 뒤 조사할 생각이었네.”
“허, 진짜 큰일 날 사람이군요. 그렇다고 무작정 검을 펼치다가 애먼 사람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게…… 다치게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고진유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저어…… 그럼 그대 신분은 어떻게 되는지?”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중년 사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지 않은가?”
“장유유서를 챙기는 분이 예의 없이 무작정 사람을 다치게 만드는 것이오?”
“그, 그건 미안하네. 워낙 신출귀몰한 놈이라 다급해서 그랬다네.”
“……뭐,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는 가는군요. 본도는 고진유라 하오.”
“……!”
중년 사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진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누…… 구?”
“고진유.”
“화산도협? 무림맹주?”
“맞소. 바로 본도요.”
“……!!”
고진유는 허리에 묶여 있는 신패들 중 맹주령패를 꺼냈다.
중년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뚫어지게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맞…… 구나.”
“됐소?”
그는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굴렸다.
“근데…… 맹주가 여기에는 왜 있소?”
“그럴 일이 있소. 개인적인 일이라서 알려줄 수는 없소.”
“그렇군요…….”
“이젠 당신에 대해 알려줘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 본인은 곡경인이라 하오.”
“……유랑검협(流郞劍俠). 중원오협의 일인.”
“맞소이다. 본인을 아는군요.”
“이름과 별호…… 그리고…….”
“그리고?”
“듣고 싶소이까?”
“말을 하다 멈추고 그러시오. 말해보시오.”
“……사람은 좋으나 대화에 약간 모자람이 흐르는 인물…… 로 답답함을 줄 수 있다고 하더이다.”
“……크흠, 맹주께서도 그 말이 맞다고 보시는 게요?”
“……그렇군요.”
“……너무한 게 아니오? 사람을 앞에 두고 당연하다고 말하다니.”
“본도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외다.”
곡경인은 바른 말만 한다는 고진유를 보면서 눈을 흘겼다.
피식.
고진유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는 게요?”
“미안하외다. 본도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군요.”
“됐소. 그만 갈 길이나 가시오. 바쁜 것 같은데.”
고진유는 미안한 듯 물었다.
“화유색마가 무슨 짓을 했소이까?”
“색마 놈이 무슨 짓을 하겠소? 여인들을 욕보인 뒤 죽이기까지 했소.”
“정말 죽일 놈이군.”
“사지를 비틀어 버릴 놈이지. 나에게 잡히면 일단 그것부터 잘라 버릴 생각이오.”
“맞소. 그런 놈이면 일단 거세부터 한 뒤 사지를 자르는 게 좋겠소이다.”
곡경인은 동조하는 고진유의 말에 살짝 기분이 풀렸다.
“어디에서 쫓다가 놓쳤소이까?”
“적수로 왔다는 소문을 들었소.”
“가죠.”
“어디를?”
“그놈을 잡아야 할 게 아니오. 내가 아무리 바빠도 그놈을 잡는 데 함께하겠소이다.”
“오! 맹주가 도움을 준다면야 당연히 고맙지요.”
고진유는 걸음을 옮기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놈이 변장을 하고 다닙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다른 특징은 없소이까?”
“음…… 좌수검이라고 한 것 같소이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검흔이 있다고 했소.”
“그 정도면 찾는 데 충분하겠군요. 우선 마을로 들어가 봅시다.”
“마을에는 왜?”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함정을 파서 기다려 보는 겁니다.”
“…….”
“흐흥.”
고진유는 미소를 띠며 마을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