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극일십우 암영검의 직속 암영단.
그들은 호숫가에서 혼자 앉아 있는 고진유를 찾았다.
도망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대하면서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며 고진유를 감쌌다.
한쪽으로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오른 눈을 가린 사내.
암영단주 곤적호는 걸음을 멈춘 채 매서운 시선으로 사내의 등을 노려보았다.
‘변용을 한 채 움직인다고 했다.’
다급하게 내려온 소식.
화산도협을 그린 초상화의 얼굴은 잊어야 했다.
어떤 얼굴로 돌아다닐지 알 수 없었다.
귀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수상한 인물이라면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호숫가에 홀로 앉은 청년의 모습.
‘수상한 인물이다.’
곤적호는 오른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스르르르.
허리에 찬 검파(劍把)를 쥐며 천천히 잡아당겼다.
검집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날카로운 검이 타원을 그리며 고진유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뚜욱.
그리고 정확히 목덜미의 한 치 앞에서 검이 멈췄다.
‘무인이 아니라는 것인가?’
등을 보이며 앉아 있는 그는 전혀 검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옆에 내려놓은 검을 봐서는 일반인은 아니었다.
곤적호의 긴장한 목소리가 나왔다.
“돌아서라.”
고진유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미소를 짓는 얼굴과 시선이 마주쳤다.
“…….”
수십 명이 둘러싼 상황을 보면서도 청년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너무나 느긋했다.
‘확실히 수상한 놈이다.’
휘익.
곤적호는 뒤로 물러나며 암영단의 수하들에게 손짓으로 진영을 펼치도록 했다.
채애애앵!
수하들은 재빨리 검을 뽑은 뒤 고진유를 향해 겨누었다.
사내가 극일천에서 찾는 화산도협이라면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네놈은 누구지? 정체를 밝혀라.”
“본도에게 볼일이 있어 오지 않았나?”
“화산…… 도협.”
“맞아. 잘 찾아왔소.”
슈우우욱!
고진유는 대답과 동시에 곤적호의 눈앞에 다가섰다.
“그대가 암영단주이겠군. 내가 가볼 곳이 있어서 말이오. 빨리 끝냈으면 하는군.”
“……!”
곤적호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아.’
쭈삣.
곤적호의 온몸에 전율이 퍼져 나갔다. 상대의 눈빛에서 나온 내기는 살기가 분명했다.
그의 몸은 살기 위해서는 도망가야 한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모두 피……!”
곤적호의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고진유의 손이 눈앞을 지나가면서 얼굴을 가격했다
쿠우웅!!
그는 이보다 강한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바위도 부술 수 있는 고진유의 일격에 두개골이 깨어지며 그대로 즉사했다.
곤적호의 죽음은 한순간의 찰나였다. 수장을 잃은 암영단의 수하들은 제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움직일 수 없었다.
“허어. 가만히 서서 죽고 싶지는 않을 텐데.”
고진유의 목소리에 그들은 정신이 돌아왔다.
“단주님의 원수를 갚자!”
부단주가 먼저 소리를 지르며 앞장선 채로 달렸다. 그의 뒤로 암영단 전인원이 검을 든 채 고진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퍽, 퍽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매화 향기가 흘렸다.
곤적호가 죽은 그때부터 암영단의 죽음도 기정사실.
그들은 고진유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진유는 이번 싸움은 굳이 검을 펼치지 않았다.
오십 명의 암영단을 모두 때려눕히는 데 걸린 시간은 일각.
일권필살.
한 번씩 손을 펼칠 때마다 일권에 한 명씩 나가떨어졌다.
고진유는 철저하게 극일천을 부술 생각이었다.
암영단이 중원 무림인이었다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극일천 중에서도 진극일천의 무인들.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힌다고 해도 그건 고진유의 운명이었다.
결국 암영단의 전 인원이 죽음에 이르렀다.
“…….”
호숫가에 시체를 두고 그냥 떠날 수는 없었다.
고진유는 호숫가 한편 바닥에 거대한 구멍을 판 뒤 그들의 시신을 모두 묻었다.
파악!
그리고 나무판을 구해 온 뒤 글을 새겼다.
-암영단, 여기에 잠들다.
* * *
나무 묘비 앞에 선 중년 사내의 눈빛은 담담했다.
묘비에 새긴 글을 보았다.
“수습은 하고 갔군.”
그곳에 살아남은 수하는 보이지 않았다.
암영단이 전멸했다. 그와 싸워 한 명도 살아나지 못했다.
휘익.
암영검은 수하들이 묻힌 묘를 보며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하나 꺾어 던져 놓았다.
“잘들 가시게.”
추모사는 간단했다.
수하의 죽음에 노기가 솟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의 목소리도 표정처럼 담담했다.
“단주와 그대들의 복수는 내가 해주마. 저승에 그놈이 내려가길 기다려라.”
그는 묘비 앞에서 물러나 뒷짐을 쥔 채 생각에 잠기며 호숫가를 걸었다.
수하를 죽인 화산도협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인물이지?’
지금까지 알던 그가 아니었다.
‘극일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화산도협은 중원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 귀영까지 홀로 내려왔다.
현재 무림맹은 마도팔문과 마교를 상대로 싸우는 중.
무림맹의 수장인 그가 혼자 귀양까지 유람차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정말로 귀양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내려오는 것인지…….’
고진유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해졌다.
‘우선 그를 먼저 찾는 게 순서겠지.’
수하들이 그의 행적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귀양에 온 목적이 그곳이라면 결국 나타날 수밖에 없을 터.
“먼저 가서 기다리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휘익!
암영검은 신형을 틀며 호숫가를 빠르게 떠나갔다.
* * *
멀리 호숫가를 향한 시선이 있었다.
‘암영검이군.’
극일십우의 고수.
그의 모습은 멀리서 봐도 알아보았다.
스윽.
고진유는 내력을 거두며 숨겼던 신형을 드러냈다.
‘내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알고 있어.’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암영검뿐만 아니라 나머지 극일십우의 인물들이 함께 몰려온다면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귀주금천지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천문전의 그에게 들어갔을 것이다.
무구천도 모르는 극일천의 극비.
이를 알고 있는 외지의 인물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면, 천문전주는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한데 계획보다 너무 상대가 너무 빨리 움직이는걸.’
귀주금천지에 들어가서 한바탕 휘젓고 나올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들이 귀주금천지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어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확실했다.
극일십우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고진유, 그로서도 어려울 것이었다.
극일십우와 한 명씩 붙는다면 충분히 자신이 있었지만 세 명 이상은 부담이 되었다.
‘귀주금천지가 안 된다면…….’
고진유는 운무산에서 방향을 돌려 귀양의 마을로 움직이기로 했다.
귀주성의 교통과 물류의 중심은 귀양.
그곳 또한 여느 중원의 대도시와 다르지 않게 장사꾼이 가득했다.
귀양에 들어서자 남명강이 마을 중심을 관통하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고진유는 강변을 따라 걸었다.
운무산이 아닌 반대로 마을에 들어온 이유가 있었다.
강변 중간까지 따라 걷자 목조로 지은 삼 층의 건물이 보였다.
“저기가 갑수루라는 곳이군.”
황금빛 담장과 푸른 기와의 전각은 부드러운 곡선 느낌을 주었다.
고진유는 갑수루를 돌아서 석교를 걸었다.
‘저곳인가?’
부옥교 끝자락에 세워진 건물.
귀주성의 산과 물을 그대로 담아놓은 듯한 누각과 정원이 보였다.
고진유가 가까이 다가서자 삼 층 지붕 처마 아래, 취미원(翠微園)이라 적힌 오래된 현판이 보였다.
갑수루와 달리 취미원의 정문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취미원의 문은 열려 있었다.
‘들어가 볼까?’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그러자 백의인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고진유의 앞에 섰다.
“어떻게 오셨소이까?”
“…….”
그가 나타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오십 대 초반 중년 사내의 모습.
백의는 햇빛을 받아 투명한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태북천 원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분을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백의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취미원의 원주에 대해 중원에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원주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리고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귀양의 백성들은 이래저래 추측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한데 처음 보는 청년이 취미원의 원주를 만나고자 했다.
정확히 원주의 이름까지 알고서.
취미원의 존재를 아는 곳은 한 곳 밖에 없었다.
“혹시 극일천에서 오셨습니까?”
백의인의 말투가 바로 공손하게 바뀌었다.
“명확하게 극일천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곳에서 왔는지 묻는다면 맞다고 해야겠습니다.”
“예전에는 극일천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애매하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고진유의 애매한 말에 백의인은 어떤 상황인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실례지만 본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분을 만나뵐 수 있습니까?”
“…….”
백의인은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신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과 당장 가르쳐 줄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마주 선 청년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
백의인은 포권을 했다.
“알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원주님께 그대의 뜻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앞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백의인은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바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또 한 번 그의 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거의 화유 누님만큼 기를 알아차리기 어려워.’
만일 그가 적이 되어 싸운다면 상당히 까다로울 수 있었다.
취미원으로 안으로 들어간 백의인은 곧장 공남각으로 올라섰다.
문 앞에 선 그는 안을 향해 기척을 냈다.
“원주님, 총관 차문양입니다.”
“차 총관인가? 들어오게나.”
그는 세 개의 문 중 왼쪽 문으로 들어섰다.
콧수염이 길게 내려온 노인이 그를 맞이했다.
“무슨 일 때문에 왔는가?”
“정문에 젊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흐음. 웬만해서는 차 총관이 알아서 정리를 하거늘. 직접 여기에 와서 보고를 할 정도라면 보통 인물이 아닐 듯싶네.”
“대단한 내력을 지닌 청년입니다. 현 무림에서 그와 같은 나이에 전혀 가질 수 없는 내력입니다.”
“차 총관이 칭찬을 다 할 때가 있군. 얼마나 대단한지 만나보고 싶군.”
“그렇지 않아도 그가 원주님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나를?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허허. 나를 만나겠다라…….”
“그리고 그 청년이 원주님의 성함을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그런가? 이상한 일이군. 삼십 년이 넘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원주는 의문을 보였다.
외부의 인물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물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혹시 극일천에서 온 인물은 아니겠지?”
“대답이 애매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인가?”
“극일천에서 왔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자네 말처럼 애매하군.”
원주는 정문 밖에 찾아온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지금 바로 그를 만나고 싶었다.
“차 총관, 그를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군.”
“네, 알겠습니다. 그를 데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음. 여기 말고 남정(南庭)으로 데리고 오게. 난 그곳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겠네.”
고진유는 그가 안으로 들어간 뒤 정원을 구경했다.
취미원 연못의 물은 옥빛의 색을 띠고 있었다.
이각의 시간이 지났을 쯤 안으로 들어갔던 차 총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곳에서 취미원의 옥빛 연못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원주님께서 만나뵙고자 하십니다. 본인을 따라 오시지요.”
“고맙습니다. 앞장서시지요. 뒤를 따르겠습니다.”
고진유는 그의 뒤를 따라 취미원으로 들어섰다.
차 총관이 가는 방향은 취미원 남쪽에 세운 정자였다.
주로 귀빈을 맞이할 때 만남을 가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원주는 남정에 앉아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았다.
‘저 청년인가?’
처음에는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뚜렷해지는 얼굴을 보면서 원주의 눈이 커졌다.
‘저…… 얼굴은…….’
오래전 보았던 얼굴처럼 익숙했다.
원주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두 사람이 정자에 올라섰다.
차 총관이 두 사람 사이에서 원주를 가리켰다.
“이분께서 원주님이십니다.”
“…….”
차 총관은 당황한 눈빛이 나왔다.
원주에게 인사를 해야 했지만 물끄러미 자신만을 볼 뿐이었다.
“차 총관,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좋겠네.”
“…….”
“괜찮네. 위험한 청년은 아닌 것 같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원주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과 단둘이 앉아 있는 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원주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원주님,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는 남정을 내려간 뒤 정원까지 물러났다.
혹시나 불상사가 생길 경우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섰다.
두 사람이 대화를 듣지 못할 뿐 정자에 앉은 두 사람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원주와 고진유는 단둘이 나란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