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천주님께서 천주궁에서 만나고자 하십니다.
천주궁에 다가선 천문전주 나하중은 뜬금없이 찾아온 천영령으로부터 천주의 명을 전해 받았다.
그것도 마침 비천을 움직이려고 하는 시기에.
‘얼마 만에 그를 직접 대면하는지 모르겠군.’
천주궁은 그로서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장소였다.
천주의 허락이 있어야 천주궁 앞에 흐르는 실개천을 넘어 들어설 수 있었다.
운무 속에서 적홍로(赤紅路)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을 파훼할 수만 있다면…….’
천주를 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천주궁 앞으로 운무사홍진(雲霧死紅陣)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멈칫.
운무가 사라지면서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은 절벽이 나타났다.
실제로 절벽이 아니지만 운무사홍진의 무서움은 마치 몸과 정신이 현실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진법에 펼쳐진 낭떠러지에 떨어진다면 실제처럼 충격을 받게 되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나하중입니다.”
쏴아아아-
운무가 주위에서 피어오르며 나하중의 전신을 가렸다.
잠시 뒤, 이번에는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운무가 사라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낭떠러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듯한 여인.
“천화공녀가 마중을 나왔구려.”
“어서 오시지요.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음…… 우리가 안 본 지 오 년이 지난 것 같지 않소? 그동안 어디 갔다 온 모양인가 보구려.”
“천주궁에 있다 보니 갑갑해서요.”
“허허. 그때와 비교하면 어엿한 여인이 되었소이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녀를 따르겠소이다.”
나하중은 그녀를 따라 천주궁으로 들어섰다.
‘천주…….’
정원 사이로 꽃을 구경하는 사내.
극일천의 극에 올라선 천주 황야는 건장한 중년 사내의 모습이었다.
백발노인인 자신의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갈수록 젊어지는군.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인가.’
그의 모습은 믿기지 않았다.
나하중은 다가서면서 천주의 강렬한 시선을 받았다.
나하중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나 전주, 우리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소이다. 반갑구려.”
“네, 그러하옵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나하중은 먼저 돌아서며 건물 안으로 움직이는 그의 등을 보았다.
“…….”
순간 그에게서 세상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천주궁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고화유가 차를 준비했다.
“나 전주, 한 잔 마시게.”
“고맙습니다.”
나하중은 찻잔을 들었지만 조급함이 밀려왔다.
차향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 마실 뿐이었다.
“요즘 본 천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별 탈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천영령의 말과는 다르군.”
“…….”
스윽.
천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하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무림맹주와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들었네.”
“큰일은 아닙니다. 사소한 일들이지요. 본 천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음…… 철갑이 열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영향이 없지는 않을 텐데.”
“중원에 심어 놓은 간자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미미합니다.”
“미미할 정도라면 굳이 힘들게 중원 무림에 넣어둘 필요가 있었나?”
“…….”
나하중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본 천에서 힘을 들이지 않기 위해 간자를 넣어둔 것입니다.”
“알겠네. 그냥 물어본 것이네. 나 전주가 알아서 잘하겠지.”
천주는 더는 상관이 없는 듯 말을 멈추었다.
“천주님. 저를 찾으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아 참. 깜빡했군.”
“…….”
“그대를 부른 이유는 저 멀리 신강에서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부는 듯해서일세.”
‘어떻게 알았지?’
나하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 천으로 중원을 상대하는 것까지는 그대가 알아서 하겠지만 마교까지 중원에 부를 생각인가? 재고할 생각이 없는가?”
천주는 마교가 나서지 않는 걸 원하는 듯했지만 나하중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왕 무림을 정리할 것이라면 이번 기회에 마교까지 나오게 한 뒤 한꺼번에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전주는 마교가 쉽게 정리가 될 것이라 보는가?”
“우선 정파와 마교가 싸우도록 만들어야지요.. 두 곳의 힘이 빠진 뒤 모두 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군. 하나 정파와 마교가 나 전주의 뜻대로 될까?”
“…….”
그는 천주의 눈빛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대의 뜻이 확고한 것 같네. 괜히 불렀군.”
“죄송합니다. 천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이번 마교의 일은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네. 계획까지 세워 놓았을 텐데 아깝지 않은가. 그대로 진행하게. 마교까지 풀어놓는다면 일반 백성들이 피해를 받지 않을까 싶어 한 말이네. 앞뒤를 안 가리는 놈들이지 않나.”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훗. 그대가 마교의 천마라도 되는가? 조심한다고 해서 그놈들이 조심할지 모르겠군. 여하튼 잘 알겠으니 그만 돌아가도 좋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나하중은 일어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뭔가?”
“중원의 일에 더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이만큼 사는 것도 지겹네. 이젠 그만 떠나고 싶을 뿐.”
“천주님께서…… 만약 선계로 가신다면 본 천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건 나 전주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게. 지금처럼 하면 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한데…… 무림맹주에게는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극일십우에서 상대하기로 했습니다.”
“독안룡이 졌다고 들었거늘.”
“그가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다를 줄 알았건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무인이 방심했다는 말을 믿는가?”
“죄송…… 합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다를 것입니다.”
“잘해보게. 그동안 본 천을 상당히 귀찮게 하지 않았나.”
“천주님께서 염려하시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또 궁금한 게 있는가?”
“아니, 없습니다. 그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나하중은 일어난 뒤 허리를 숙였다.
그가 밖으로 나서자 고화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안내를 하겠어요.”
“고맙소이다.”
나하중은 앞서가는 그녀를 보았다.
“천화공녀, 천주님께 선계문도가 도움이 되었소이까?”
“네, 상당히 큰 도움이 되셨지요.”
“……선계에 들어가실 수 있다면 천화공녀께서는 어떻게 하겠소?”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만일 갈 곳이 없다면 이곳에 계시거나 천문전에 와도 괜찮소이다.”
“고마워요.”
그녀는 미소를 보이며 그를 천주궁 밖으로 안내했다.
“여기부터는 적홍로를 따라 나가면 됩니다.”
스르르르.
그녀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운무가 앞을 가렸다.
나하중은 천천히 걸으면서 진법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중원에는 관심이 없군. 외부의 일부터 정리하고 난 뒤 천주에 대해 고민해도 괜찮겠어.’
그의 신형이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 * *
십만대산 천마신교.
마도의 종주인 그들을 중원 무림은 마교라 불렀다.
저벅저벅.
흑의사내가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강렬한 붉은색을 띤 기둥 사이로 아수라의 이빨을 드러낸 문양의 대문이 나타났다.
끼이이익-
양쪽 문이 열리면서 천마전의 내부가 드러났다.
‘흐음.’
흑의사내는 심호흡을 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천마전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짙은 어둠이 천마전에 가득했다.
팟, 팟, 팟, 팟.
곧바로 천마전 안으로 횃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흐음…….’
양옆에는 아수라의 가면을 쓴 천마수호귀들이 호위해 있었다.
그리고 천마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인물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천마 임조학.
흑의사내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
천마의 대답이 없었다.
흑의사내는 천마의 흑안에서 나오는 강한 시선을 느꼈다.
‘다…… 달라졌어.’
얼마 전까지 보았던 천마의 눈빛이 아니었다.
흑의사내의 어깨 위로 천마기가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욱……?’
천마의 기를 막아내고자 했지만 그는 점점 바닥으로 몸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교…… 주님…….”
“여전히 건방지군. 아직도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모양이지.”
쿠우웅!!
흑의사내의 어깨 위로 천마기가 강하게 찍어 내리듯 쏟아지자 결국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명왕사, 당장 죽고 싶지 않다면 교주님께 똑바로 인사해라.”
“…….”
천마수호귀주가 살기를 뿜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죽고 싶은 모양이지?’
그는 이빨을 깨물며 천마를 노려보았다.
“천마…… 이럴 수는 없소이다.”
“명왕사. 이노오오옴!! 감히 교주님께 망발을 하다니!!!”
파앗-!!
천마수호귀주의 마검이 움직이자 명왕사의 오른쪽 팔이 잘려 나갔다.
“아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지혈했다.
“대체…… 왜……?”
명왕사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고 있군. 본좌가 알려주지. 극일천에서 수십 년 동안 신교를 기만한 죄를 오늘 묻고자 하는 것이다.”
“……!!”
명왕사의 눈이 커졌다.
한쪽 팔이 잘렸지만 노기에 의해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마, 감히……!! 극일천을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모양이지? 죽고 싶은 것이더냐?!”
“네놈의 입에서 배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황당하군. 네놈이 신교를 배신했거늘.”
“이 사실을 본 천에서 알게 된다면 신무신단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텐데……!”
“멍청한 놈. 본좌가 겨우 그따위 환단에 중독되었을 것으로 보는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태울 수 있다.”
“……!!”
명왕사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수십 년 동안 신무신단에 의해 중독이 되었을 것이라 확신했었다.
‘망…… 할…… 그게 아니었다고? 그 수십 년을……?’
어떻게 된 일인지 믿기지 않았다. 천마는 분명 신무신단을 수십 년 동안 복용하고 있었다.
“큭…… 중독이 안 된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군.”
“어떻게…… 해독을 한 거냐.”
“본좌를 너무 무시하는군. 천마령기는 천지화음독까지 녹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어찌 겨우 신무신단으로 본좌를 중독시킬 수 있을까.”
“…….”
“계속 당한 척했더니 정말로 믿고 있었군.”
“왜…… 왜 당한 척한 거지?”
“몰라서 묻는가? 중원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극일천에서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다, 당신이 본 천을 이용했다는 말이오?”
“그렇다고 봐야겠지. 결과가 말을 해주는 것이니.”
흑의사내, 명왕사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천마는 알았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혹시나 나가더라도 주위에 신교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지.”
“…….”
명왕사는 끝이 났음을 알았다.
이미 한쪽 팔이 잘려 있었다. 천마와 싸워 이길 수 없었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부탁이오, 한 번에 죽여주시오.”
“훗. 끝까지 대단한 척하는군. 잘 들어라. 지금부터 본 교는 극일천의 간자들에 대한 숙청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천마의 명과 함께 손이 떨어졌다.
“이자를 죽여라.”
스으으-
천마수호귀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툭.
명왕사의 목이 간단히 잘려 나갔다.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아침이 밝기 전에 마교에 숨어든 간자들의 목이 하나둘씩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마도팔문과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모두 떠났다.
무림맹 본진도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제갈양과 함께 사천성으로 향했다.
남은 사람은 고진유와 북소연뿐.
무림맹은 마치 텅 빈 절간처럼 고요했다.
북소연은 요깃거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출출하지 않나요? 화과를 준비했어요.”
“고맙소이다.”
스윽.
북소연이 화과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보니 세상이 조용합니다.”
“모두 떠났으니까요.”
고진유는 화과를 들어 한입에 넣으면서 주위를 보았다.
“소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공자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겠어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앞으로 극일천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무량삼천지(無量三天地) 중 한 곳을 칠 것입니다.”
“…….”
북소연은 살짝 당황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고진유가 말한 무량삼천지가 보통 장소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 가는 길에 형주에 잠시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님. 혼자서…… 그곳을 치신다는 말인가요?”
“소저는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제가 무공이 약해서요?”
“아닙니다. 무량삼천지는 극일천의 인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습이라 해도 홀로 싸우면 힘들지 않겠어요?”
고진유는 걱정에 잠긴 그녀를 보며 의 손을 잡았다.
“힘들어도 이건 해야 할 일입니다.”
“……네, 알겠어요. 정말로 조심하세요.”
“충분히 가능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진유는 그녀가 안심하도록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